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9. 비밀의 끝(5)
지훈은 천천히 환기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새어 나왔던 방 쪽으로 몸을 옮겼다. 지훈이 어느 정도 앞으로 가자 막혀 있는 벽이 나왔다. 지훈은 그 벽 앞에서 당혹스러웠다.
- 뭐야? 이거.
지훈은 벽을 손으로 더듬었으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너무 단단해 깨부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환기구 안에 벽이라니. 이러면 환기구의 의미가 없잖아.
지훈은 어차피 앞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돌아서 나왔다. 자신이 기어오는 동안 좌우로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싶었으나 나가던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니 의문이 풀렸다. 지훈은 앞에도, 좌우에도 연결되는 것이 없다면 나머지는 당연히 아래쪽과 위쪽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이 기어온 길의 위쪽으로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자 오는 길 중간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보였다.
- 이거로군. 그 자식 거짓말은 아니었군.
지훈은 그 좁은 통로 쪽으로 몸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움직이기는 불편했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지훈의 덩치를 보통보다 크게 느꼈던 것이리라. 지훈은 위쪽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지훈은 그 말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지훈은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 조심하세요.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멈췄다. 남자는 왼쪽 코너 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열심히 안에서 들리는 내용을 듣고 있었다.
- 저게 무슨 말이지?
지훈이 그의 옆으로 가서 묻자 남자는 손을 들어 지훈을 잠깐 제지했다.
- 잠시만요.
지훈은 하는 수 없이 말을 멈추고 환기구 좁은 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한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탁자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머리가 하얀 남자가 혼자서 뭐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그 순간 옆의 커튼이 쳐졌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거대한 실린더에 한 여자가 산소공급장치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들어 있었다. 지훈은 그 광경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 여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보는 순간 지훈의 눈이 커졌다.
- 혜.. 혜민아...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환기구 철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남자는 지훈을 붙잡았다.
- 아닐 겁니다. 저 여자는 '제니퍼 버밍험'이라고 하더군요. 그레고리 버밍험의 딸이고, 유전적으로 만들어진 지 60년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지훈은 그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조용하게 말을 해줬다.
- 아까 들으신 건 라틴어구요. 그 남자가 한 말은 사설이 길긴 했지만, 간단한 얘기입니다. 제니퍼 버밍험은 영구 보존할 예정이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다. '그'는 뇌종양이 심하다. '그'의 기억은 이미 다운로드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뭐 그런 내용이에요.
지훈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 대... 대안이... 설마 혜.. 혜민...
남자는 지훈에게 말했다.
- 내일 출산할 아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말을 멈추자 지훈은 그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뭐지?
- 내일 태어나서 검사를 해보고 적절하지 않으면 폐기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훈은 그 말에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남자도 재빨리 지훈의 뒤를 따라 기어나왔다. 환기구 통로를 통해 다시 청소 도구함 쪽으로 나왔을 때 남자는 지훈을 붙잡았다.
- 섣부르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일단 이 정보가...
그러나 지훈은 그 남자의 멱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 너는 정보가 중요하지만, 나는 사람이 중요해. 특히 그 분만할 여자는 내 아내야. 그리고 그 애는 내 아들이고.
지훈의 말에 남자는 크게 놀랐다. 지훈이 멱살을 풀자 남자가 말했다.
- 저는 장석호 신부입니다. 바티칸에서 파견을 나왔습니다.
지훈은 그의 이름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석호가 말을 이었다.
- 맞습니다. 정보보다는 사람이 우선이지요. 하지만 지금 저희 둘이서 빼낼 방법은 없지 않습니까? 더욱이 만삭인 산모를 데리고 나가는 일은 더더욱 위험하죠.
지훈은 석호의 말에 몸을 멈췄다.
- 그럼 어떻게 할 수 있지?
- 어려운 문제군요. 그리고 아직 산모가 있는 곳도 모르니..
- 하나씩 깨부수면 돼!
- 그러기엔 시간도 없고, 위험합니다.
그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났다. 그 방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귀를 세웠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안으로 모두들 들어갔는지 다시 밖은 조용해졌다.
-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어느 방으로 들어갔는지 살펴보고 올게요. 사람들이 들어갔으니까 불이 켜져 있을 겁니다.
석호는 다시 환기구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아래에서 석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석호가 위에서 내려왔다.
- 건너편 방입니다. 실린더 안에 산모가 있더군요. 만삭의.
지훈은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찾아 헤매던 자신의 아내가 자기가 검사받던 곳에 잡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여기를 전에 와본 것 같아서요.'
지훈은 그 순간 혜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혜민이를 여기서 만든 것이구나.'
지훈은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 제가 그 방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게요. 들어가셔서 그 실린더 안에 부인을 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 그건 좋은 계획이 아닌 것 같군. 둘 다, 아니 어쩌면 셋 다 위험할 수 있는 일 같군.
지훈은 석호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 난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그리고 바티칸에서 왔다면 힘이 있을 거 아냐. 난 나가봐야 일개 형사 나부랭이야. 그러니까 네가 나가서 여기 있는 내 부인하고 아들하고 살려줘.
지훈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셋 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요.
석호는 지훈에게 아까 자기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말이 달랐다.
- 일단 여기서만 나가면 위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자들 사이에는 바티칸에서 온 저의 스승님도 계시구요. 그리고 기자들도 많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겠죠. 저희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죠.
지훈은 그 말에 수긍을 했다.
- 위험한 일일 텐데.
지훈은 진심으로 석호를 걱정했다. 하지만 석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이 정도는 악마와 싸우는 것보다 조금 쉬운 일에 속하죠.
지훈은 석호의 말에 석호를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 갑시다.
석호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옆방의 문 앞으로 갔다. 문이 잠겨 있는지 주머니에서 스위스 군용 칼을 꺼냈다. 열쇠 구멍에 무언가를 넣고 돌리자 문이 열렸다. 석호는 문을 활짝 열고 안에다 크게 소리를 쳤다.
- 미친 노인네들아!
그러면서 안으로 뛰어 들어가 거기 모인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훈도 뒤따라 들어가 걸리는 대로 때려눕혔다. 그리고는 앞에 있던 의자를 들어 실린더 쪽으로 집어 던졌다.
-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해 줄게.
그러나 실린더는 멀쩡했다. 지훈은 다시 의자를 들어 실린더를 가격했다. 뒤에서는 석호가 사람들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 자네 부인을 죽일 셈인가?
그 소리에 석호와 지훈이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석호와 지훈에게 맞던 학자들은 몸을 움직여 흰머리의 사내에게로 갔다.
- 그게 무슨 소리지?
- 아! 자네로군. CS2의 남편. 꼭 만나고 싶었지.
- 개소리는 집어 치우고.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지훈은 흰머리의 사내 피터를 향해 악을 썼다. 피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 자네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네 아내는 열성 유전자의 발현체이지. 그러니까 자네의 아이를 갖게 되면 반은 자네 유전자지만, 반은 자네 아내의 유전자이지. 자내 유전자야 그대로 나타나겠지만, 아내 유전자는 열성이 더 강하게 나올 수도 있지.
그 말에 석호가 뒤로 물러나 지훈에게 다가오며 피터에게 물었다.
- 열성이 강하게 나온다는 말이라면... 혹시...
피터는 석호를 보며 말했다.
- 자네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자내가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네. 돌연변이.
지훈은 그 순간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표정을 굳힌 채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돌연변이건, 괴물이건 내 자식이야! 이 개자식아!
- 왜 아이만 돌연변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자네 아내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호르몬의 변화가 있을 테고, 당연히 자네 아내도 위험하게 되지. 출산 전인 지금이 가장 위험하지. 안 그런가?
피터는 석호를 보며 말했다. 석호는 그 말에 수긍을 하는지 침묵을 했다. 그러나 지훈은 그 소리야 말로 가장 천하의 개소리로 들렸다.
- 돌연변이건, 미치광이건 내 아내를 함부로 납치해 간 건 너희들이야. 개새끼들, 다 죽여버리겠어.
지훈은 자신의 옆에 있던 의자를 피터를 향해 집어던졌다. 피터는 날아오는 의자를 피했다. 지훈은 다시 옆의 의자를 들어 실린더를 내리쳤다. 그러나 깨지지 않았다.
- 말해주지 않았나 보군. 그건 총으로도 안 깨지는 유리지.
지훈은 힘을 다해 실린더를 계속 내려쳤다. 그 때 석호가 지훈을 붙잡았다.
- 늦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지훈은 실린더를 내리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석호는 강제로 지훈을 잡아 끌었다.
- 나가야 돼요.
- 놔! 혜민아! 혜민아! 내가 구해 줄게..
지훈의 양손은 의자를 내려치면서 찢어지고 갈라져 피가 흘렀다. 지훈의 눈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문 안으로 경비원들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리자 옆에 있던 석호가 쓰러졌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지훈은 그 순간 앞에 놓여 있던 수술 도구대에서 메스를 하나 들어 학자들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 중 행동이 가장 느렸던 여의사 하나를 붙잡았다. 지훈은 여의사의 뒤에서 목을 부여잡고 목에 칼을 들이댔다.
- 가까이 오지 마!
지훈은 여의사 목에 칼을 댄 채 석호 쪽으로 다가갔다. 경비원들은 지훈을 향해 총구를 향할 뿐이었다. 누군가의 방아쇠 움직임 소리가 들리자 피터가 소리를 쳤다.
- 쏘지 마! 절대 쏘지 마! 저 여의사는 살려야 해.
지훈은 그 여의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보라색 나비핀이 꽂혀 있었다. 그 순간 이 여의사가 오늘 낮부터 자신과 마주쳤던 건망증이 심한 여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훈은 여의사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 잠시만 인질이 되어 주십시오.
지훈은 석호에게 말을 했다.
- 일어설 수 있어요?
석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 뛰기는 무리겠군요.
- 뛸 필요 없어요. 아까 말대로 위로만 올라가면 돼요.
지훈은 석호를 자신의 뒤에 세우고 경비원들 사이로 걸어갔다. 경비원들을 뒷걸음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지훈을 보며 놀랐다.
- 피해 주시지. 저 머리 하얀 사람이 이 여의사를 아끼는 것 같은데.
지훈은 경비원들 사이를 지나오면서도 칼끝을 여의사의 목에 정확하게 가져다 대고 있었다. 문 밖으로 나오자 지훈은 석호를 자신의 뒤에 세우고 앞에 있는 경비원들과 대치했다.
- 뒤에서 경비원들이 올지 모르니까 나랑 등을 맞대고 서야 합니다.
석호는 허벅지를 부여잡은 채 지훈의 등에 기댔고, 지훈은 여의사를 부여잡고 뒷걸음치는 방식으로 복도를 나갔다.
- 여긴 지하 2층이니까 긴장을 풀면 안 됩니다.
석호는 안 보이는 줄 알지만 고개를 끄떡이고는 자신의 윗옷을 찢어 허벅지에 묶었다. 지훈은 오히려 자신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여자가 침착한 것을 보고는 더 놀랐다. 이런 인질극에서 큰 위험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발버둥을 치기 때문인데, 여자는 마치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 듯이 지훈이 시키는 대로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녀 역시 지훈이 자신의 목에 있는 대동맥에 정확하게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문가라고 판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