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9. 비밀의 끝(4)
- 안녕하세요. 오늘 오기로 한 최민영이라고 합니다.
최민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는 지훈에게 다가오며 말을 했다. 지훈과 경비원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 오늘 여기로 발령을 받았는데, 다들 양복을 입고 계셔서 어느 분이 여기 직원인지 모르겠거든요.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조금 늦었는데, 오늘 무슨 일 있나요?
- 오늘 연구소에서 컨퍼런스가 있어서 손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위층 사무실은 모두 개방이 되어 있어서...
- 아! 그런가요? 담당자 분이 누군지 알 수가 없어서요. 가운을 입으신 분이 이 분밖에 안 보여서 이리로 왔습니다만...
그러자 경비원이 옆에 있는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이건 또 무슨 일이가 싶어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지훈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 아! 저는 오늘...
지훈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을 끊었다.
- 네. 일단 오셨으니까 아래층으로 내려가시죠. 위층은 손님들이 많이 계셔서요.
- 잠시만요. 일단 확인을 한 번 해 보고요.
무전기로 경비원이 어디론가 연락을 하는데,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바쁜지 한참만에 응답이 왔다.
- 저 여기 지하실 통로인데요..
- 통로가 뭐? 거긴 출입 금지라고.
- 네. 알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 한 분이 아래층에서 내일 분만하실 분...
경비원이 말하자 그 쪽에서는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 분만한다는 내용까지 알면 내려보내드려. 내일 수술 참여하실 분이니까.
- 네... 그런데...
경비원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말을 하려고 했지만, 상대는 바쁜지 다시 응답이 없었다.
- 네. 들어가시죠.
경비원이 바를 올려 주자 지훈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새로 온 의사도 지훈을 따라 들어갔다. 경비원이 새로운 의사를 향해 '아래층은...'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 쩝. 여기 의사랑 들어가는 건데 뭐 어때.
경비원은 아래층에도 연구 시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그들이 아래로 내려가자 그냥 잊고 자리에 앉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지훈은 그와 함께 지하 연구실 입구가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지훈은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ID 카드를 꺼내 인식기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안으로 들어가며 그에게 말했다.
- 저 안쪽으로 가시면 사무실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만...
지훈은 그와 되도록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그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는지 지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무실이 있다는 쪽으로 사라져 갔다. 지훈은 그런 그를 미심쩍게 쳐다보았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이 더 급했기 때문에 그런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각 연구실은 유리로 되어 있는 철문으로 닫혀 있었고, 연구실 벽면은 반이 유리로 되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지훈은 지하 연구소를 돌아다녀보았지만, 대부분은 불이 꺼져 있었고, 몇몇 연구실에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복도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어 지훈은 더욱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 중 한 연구소의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아보았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지훈은 지하를 한 바퀴 삥 돌았지만,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방화문을 보았다. 방화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인식기가 있었다. 지훈은 안에서 인식기를 꺼내 방화문에 가져다 대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동물적으로 몸을 굴렀다. 그 순간 아까 보았던 말쑥한 남자가 아래로 내려가는 방화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훈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 저 놈 뭐지?
본인도 침입자인 주제에 침입자가 있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훈은 방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자 위층과 같은 구조의 방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 방들은 위층과는 다르게 유리벽이 없었다. 복도 역시 어두컴컴하였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복도 끝까지 갔으나 문이 모두 잠겨 있었다. 지훈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옆에 열린 방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그와 부딪힐 때 몸에 힘을 주었다. 둘이 부딪히는 순간 두 사람이 모두 뒤로 튕겨나갔다. 어둠에 눈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그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아까 자신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남자였다.
- 너 의사 아니지?
지훈이 낮고 조용하게 물었다.
- 제가 볼 땐 당신도 의사같진 않은데요?
서로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고 간 후에 두 사람이 맞붙었다. 지훈이야 싸움에는 이골이 난 형사였지만, 상대방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물론 밝은 곳에서 두 사람이 맞붙었다면 단연히 지훈이 그를 제압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위가 어두워 지훈은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지훈의 발차기를 피해낸 그는 재빨리 지훈의 앞으로 다가와 가슴 부근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지훈은 몸을 빙글 돌려 손을 피하고는 두 손으로 그의 등허리를 밀었다. 서로 자리가 뒤바뀌었고, 그는 문 쪽으로 향해 나아가려고 했다. 그 순간 계단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남자가 나온 곳으로 몸을 돌려 숨었고, 그 역시 재빨리 지훈이 들어간 곳으로 들어갔다. 두런거리며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각각의 언어가 섞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꽤 많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공간에 서로 붙어 있던 지훈과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 목소리들이 사라지자 지훈이 그에게 말했다.
- 이제 좀 떨어지지. 곰팡이 냄새 나니까.
그러자 그 남자는 지훈에게서 살짝 떨어져 나와 몸을 툭툭 털었다.
- 너 뭐하는 놈이야?
지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남자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 자신의 신분 먼저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요?
- 나 참... 이거야 원...
지훈은 그 남자의 말투나 행동에 적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자신의 명치를 때릴 수 있는 분명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가슴을 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난 여기 수사하러 왔고. 당신은?
지훈의 말에 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 여기 의심이 가는 일이 있나 보죠?
그러나 지훈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말했다.
- 이젠 당신 차례인데?
- 음.. 저도 수사라면 수사를 하러 왔죠.
- 수사? 어느 서인데?
지훈의 말에 그 남자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어느 서는 아니구요. 여기서 이상한 실험을 한다고 해서요.
남자는 왠지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역시 지훈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경계하는 느낌이 들었다.
- 둘 다 침입자 신분인데, 웃기는군. 수사하러 몰래 오니.
-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 서에 계시지요?
남자의 질문에 지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 이 일은 내 일이니까 방해하지 마라.
- 네? 아... 그런데 어쩌죠? 이 일은 제 일이기도 한데요.
지훈은 능글거리면서 말하는 사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자는 그러다가 한 마디 했다.
- 어차피 여기를 조사하는 게 목적이라면 같이 하시죠. 저한테 계획이 하나 있는데...
-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당신은 나를 어떻게 믿고.
- 그런가요? 음.. 신뢰가 없는 사이라... 그럼 이렇게 하죠. 어두우니까 서로에게 신분증을 교환하는 게 어떨까요?
그 말에 지훈은 코웃음을 쳤다.
- 신분증이 위조된 거라는 걸 어떻게 알지?
그러자 남자는 쉽게 수긍을 했다.
- 하긴 그렇겠네요. 하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숨어 있는 걸로 보았을 땐 우리가 서로 돕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요.
남자의 말에 지훈 역시 그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 그렇겠군. 아까 말한 방법이 뭐지?
지훈이 쉽게 수긍을 하자 남자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플래시를 꺼냈다.
- 아까 들어와서 봤는데, 여기 천장에 환기구가 있더라구요. 외국 영화에서 보면 기어다니는 양철통 같은 거요.
지훈은 고개를 들어 플래시 빛이 가리키는 천장을 보았다.
- 그래서?
- 아까 보니까 저기 안으로 들어가시긴 힘들 것 같은데, 제가 저 안으로 들어가서 안에서 문을 열어드리죠.
- 밖에 사람들 소리 못 들었어? 문 열여주기 전에 잡힐걸.
- 그런가요? 그렇다면 제가 가서 보고 온 걸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저도 어차피 이리로 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을 모르니까요.
- 웃기는군. 난 정공법으로 들어갈 거야.
그 말에 남자는 웃음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 아까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렇게 하면 들어가기 전에 잡힐 걸요.
지훈은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여기에 잠입을 한 것이라면 분명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와는 가깝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사람들에게 여기는 단순히 유전자 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연구소와 종합 병원이 있는 곳이었다. 자신처럼 어떤 목적이 없다면 잠입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 일단은 당신을 믿어보지.
지훈은 그가 자신의 어깨를 밟기 쉽도록 몸을 수그렸다. 남자는 그런 지훈을 보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옆에 있던 나무 상자들을 쌓고 환기구 뚜껑을 능숙하게 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지자 지훈은 수그렸던 몸을 폈다.
- 쪽팔리게.. 밟고 올라가지.
지훈은 어둠에 혼자 남았다. 그 남자가 어떤 걸 알아오던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다. 그런데 구석에 있는 문 사이로 흐릿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훈은 그곳으로 아까 내려왔던 사람들이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훈은 그 빛을 의지해 주변을 보았다. 연구소에 굳이 이런 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지훈은 다시 아까 열려 있던 곳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보았다. 청소 도구들이었다.
- 젠장. 청소 도구함에 숨어 있어야 하다니...
한참을 기다려도 남자는 오지 않았다. 사실 기다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지훈은 초조함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지훈은 옆에 있는 나무 상자들을 쌓았다. 낮은 상자 몇 개를 쌓자 환기구 입구에 손끝이 닿았다. 지훈은 손 끝에 힘을 주고 몸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환기구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환기구 안은 아까 남자가 얘기했던 것처럼 양철통이 아니라 그냥 좁은 통로같은 것이었다.
- 이 자식. 날 속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