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9. 비밀의 끝(3)
지훈은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근처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여전히 그 앞은 기자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었고, 늦게 도착한 사람들이 서둘러 들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입구에서는 초대장과 이름표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보였다. 지훈은 의사 가운과 이름표를 차고 문 앞에 섰다.
- 손님들 안내하고 들어갑니다.
지훈은 경비원들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행사일수록 경비는 삼엄하지만, 손님들이나 그들을 안내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느슨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훈은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경비원인 듯 사람은 지훈의 이름표를 보고는 길을 터줬다.
'뇌과학센터 연구원 표정수'
지훈은 임 박사의 도움을 받아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의 직원에 신상과 관련된 이름표를 만들었던 것이었다. 지훈이 안으로 들어오자 로비는 의외로 한산했다. 컨퍼런스를 시작한지 꽤 시간이 지나서인지 안내데스크에 한 사람만 서 있을 뿐이었다. 지훈은 옆에 있는 층별 안내도를 흘끗 쳐다보았다. 지훈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서 5층을 눌렀다. 그 때 뒤에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선생님!
지훈은 순간 긴장을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뒤를 돌아보며 안내원을 쳐다보았다.
- 저 오늘은 손님들이 많으셔서 로비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뒤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셔야 되는데요.
지훈은 마치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안내원에게 목례를 하고 뒤쪽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건물 뒤쪽으로 옮겨갔다. 지훈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지훈이 올라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잠시만요. 같이 가요.
그러더니 한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누군가 그가 가짜 직원이라고 알아챌까봐 지훈은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그녀가 좀 더 빨랐다.
- 감사해요.
그녀가 인사를 하며 5층을 누르려다가 이미 눌려있는 것을 보고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고개를 돌리며 서 있었다. 여차하면 힘으로라도 제압하고자 했다.
- 표정수 씨?
지훈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생소한 이름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 표정수 씨!
그제야 지훈은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았다. 지훈은 내심 일이 꼬였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일단 대답을 했다.
- 네.
- 내가 기억이 가물거려서 그런데, 뇌과학센터에서 일 하세요?
지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다. 지훈은 그녀를 보며 대답을 했다.
- 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 이거 큰일인데... 안면 인식 장애까지 오는 건가? 이름은 낯익은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지훈은 띄엄띄엄 그녀의 말을 들었으나 그녀가 자신을 '표정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층에 도착하자 그녀는 인사를 하고 안 쪽 사무실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보라색 나비 머리핀이 보였다. 지훈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에 베인 땀을 닦아내었다. 어쩌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여자를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지훈은 손목에 시계를 보았다.
- 앞으로 한 시간.
지훈은 컨퍼런스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는 시간을 노려 각 사무실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임 박사의 말로는 연구소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다면서 그 시간을 노려 연구소 내부를 돌아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처음 소개를 시작하는 곳이 5층 뇌과학센터이므로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얘기에 지훈은 5층에 숨어들었던 것이었다. 지훈은 의사 가운을 벗고 말쑥한 양복 차림이 되었다. 의사 가운은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에 넣었다. 화장실에서 초조하게 앉아 있는 동안 지훈은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연구원들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 사람들 많이 왔네.
- 그러게. 봤어? 맥스웰 박사도 왔더라구.
- 정말? 난 못 봤는데.
- 내일 강연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구. 난 내일 아무리 바빠도 가서 들을 예정이야.
- 아! 하필이면 내일 CS2 분만일이어서.
- 너 CS2 분만에 참여해?
- 피터 소장님이 각 분야에서 한 명씩은 꼭 참여하라고 해서 말야.
- 대단한대. 센터장님이 널 추천한 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지훈은 순간 귀를 쫑끗 세웠다. 손을 씻고 있던 사람이 다시 말을 이었다.
- CS2가 Clone Smith의 약자라면서?
- 몰라. 그래서 그런지 소장님이 아주 민감하시대.
- Smith면 소장님 성...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는지 소리가 끊어졌다. 지훈은 그 순간 이 맘 때가 혜민의 출산일임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클론(Clone). 지훈은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에 있는 거야?'
지훈은 지금이라도 뛰쳐나가 그 두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꾹 참고 앉아있었다. 곧이어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 명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독일어, 영어가 들려왔다. 지훈은 자연스럽게 화장실 안에서 나와 손을 닦았다. 옆에서 손을 씻던 늙은 신사 하나가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건넸다.
- Guten Abend!(안녕하세요)
지훈은 노신사에게 같이 인사를 건넸다.
- Guten Abend!(안녕하세요), Sie kamen aus Deutschland.(독일에서 오셨군요.)
- 예, 처는 톡일의 의학 봑사 미하일 슈텐베르그입니다.
독일인 노신사는 어설픈 한국어로 대답을 했다.
- Ich bin Doktor 한국성.(저는 한국성 박사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어색하게 이어졌지만, 지훈은 그와 최대한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기 쪽에 있는 종이 타월을 뽑아 그에게 건네주기도 하였다.
- 쾀사함뉘다.
미하엘 슈텐베르크 박사는 종이 타월로 손을 닦고는 지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지훈은 서둘러 미하일 슈텐베르크 박사와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지훈은 복도에 많은 학자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과 함께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외부에 공개한 곳이기 때문에 물론 모든 것을 정리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분명 그들에게도 뭔가 허점을 있으리란 생각에 여러 사람들과 돌아다니며 사무실과 여러 연구시설을 확인해 보았다. 5층에서는 딱히 발견된 게 없었다. 다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지훈도 자연스럽게 4층으로 내려갔다. 둘러보며 임 박사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지훈은 내심 불안했다. 4층, 2층, 1층까지 모두 둘러 봤지만, 여전히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훈은 초조해졌다. 지훈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틈을 타 전에 1층의 사무실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무실 중 한 군데에 경비원이 서 있었다. 지훈이 그 곳을 자세히 보니 손잡이가 약간 아래로 쳐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경비원은 지훈을 보고 목례를 했다. 지훈 역시 목례를 하며 그 경비원에게 일본어로 물었다.
- このオフィスは何をしてところですか?(이 사무실은 뭐하는 곳입니까?)
지훈이 일본어로 질문을 하자 경비원은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 아.. 여.. 여기는..
지훈이 궁금한 표정으로 경비원을 쳐다보자 경비원은 다급한 말로 말했다.
- Do not enter.(들어가지 마십시오.)
- Why?(왜죠?)
경비원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 안절부절 못했고, 급기야는 지훈에게 말했다.
- Wait a minute.(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더니 바깥 쪽에 있는 사무실로 뛰어나갔다. 지훈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재빨리 그 사무실 문을 아래로 당겨보았다. 뻑뻑하긴 했지만 의외로 문이 쉽게 열렸다. 지훈은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지훈이 책상에 붙어 있는 서랍을 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 직감적으로 이 안에 무언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리라 여긴 지훈은 주변을 살피다가 코의 점막을 검사하는 긴 철사를 보았다. 지훈은 긴 철사 두 개를 구부려 책상 서랍 열쇠 구멍에 넣었다. 조금씩 움직이다 보니 책상 서랍이 열렸다. 지훈은 책상을 열어 안을 보니 몇 장의 A4지와 ID 카드가 보였다. 옆의 책상을 열어보니 의사들이 차고 다니는 호출기와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지훈은 종이와 ID 카드를 챙겼다. 서랍을 조심스럽게 닫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경비원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는 재빨리 복도를 걸어갔다. 그 때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표정수 씨!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로 걸었다. 그런데 그 때 아까 보았던 여자가 지훈에게 다가와서 말을 했다.
- 표정수 씨!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지훈은 아차 싶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였다. 지훈은 그녀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기에 발뺌을 했다.
- 누구시죠?
지훈의 반응에 여자는 놀라서 반문을 했다.
- 표정수 씨, 아니세요?
지훈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을 내려 이름표를 보려고 했지만, 지훈은 이름표가 없었다.
- 누구시죠?
여자가 지훈에게 묻자 지훈은 당혹스러웠다. 사람들이 모두 그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 독일인 노신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 오! Doktor 한.
그러면서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 Das ist mein Freund.(이 사람은 제 친구입니다.)
지훈은 놀란 눈으로 노신사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노신사를 쳐다보고는 이름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 Oh! Doktor Michael Stenberg. Wir haben uns lange nicht gesehen!(오! 미하일 슈텐베르크 박사님, 오랜만이에요.)
미하엘 슈텐베르크 박사는 놀란 눈으로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 오! 독토르 최! 여천히 아름타워요.
미하엘 슈텐베르크 박사와 '닥터 최'라고 불리는 여성은 서로 알은 체를 했다. 그리고 닥터 최는 지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네요.
지훈은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미하엘 슈텐베르크 교수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지훈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와 화장실로 갔다. 좌변기에 앉자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박 형사의 말이 떠올랐다.
'누가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라.'
지훈은 화장실에서 마주친 독일인 교수가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훈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화장실에 들어온 지 이십 분정도 지나 있었다. 지훈은 가방에서 의사 가운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 이제 갔겠지?
1층 로비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훈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지나쳐갔다. 지훈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앞으로 가자 경비원이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 어? 거기는 가시면 안 되는데요.
- 네?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지훈이 자신이 확인해보지 못한 지하 쪽을 확인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그 때 경비원이 지훈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오늘 그 쪽은 출입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지훈이 경비원을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소장님이 내일 분만하실 분 확인을 해 보라고 하셔서요.
그러자 경비원은 무슨 말인가 싶어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경비원 가까이 다가갔다. 여차하면 때려눕히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때 말쑥하니 잘 생긴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