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54화 (5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9. 비밀의 끝(2)

'세계 유전자 연구 컨퍼런스'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연구 협력 기관에 컨퍼런스를 개최한다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 포럼에 참석하기로 한 학자들은 노벨 의학상 및 화학상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하여 각국의 석학들과 교수들 등 다수였다.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는 정부에도 공문을 보내 그들에게 호텔 및 편의 시설 제공에 대해 요청하였고,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인 대규모 학회가 한국에서 열린다는 사실이 대한민국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최베드로는 은밀하게 그들을 뒤쫓고 있는 형사들을 추적하였다. 강남교구에 있는 신부의 소개로 그들과 함께 했던 최 형사를 만난 최베드로는 그에게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 그 사건 뒤쫓다가 다 사라졌죠. 저나 다른 형사들이야 살인 사건 추적만 했지 그게 어느 놈들 짓인지 알 수가 있나요. 그나마 가장 많이 파악했던 박상철 형사도 물에 빠져 죽고, 박지훈 형사는 그 사건 뒤쫓다가 와이프 납치되서 그 놈들 잡는다고 지금 서에도 안 나오고 있는 상태죠. 뭐 살인 사건이야 저쪽 팀에서 미친놈 잡았으니 끝난 상태구요.

- 그럼 그 사건은 종결된 것입니까?

- 종결났죠. 찝찝하게 끝나긴 했지만.

- 그럼 그 분들하고 수사를 같이 했던 다른 분은 없습니까?

- 뭐 저희 말고는 딱히... 아! 박상철 형사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주던 국과수 임 박사님이 있죠.

- 임 박사님이요?

- 네. 국과수 법의관이신데, 박상철 형사와는 아주 친한 관계였습니다.

- 아! 그럼 의학적인 내용은 모두 그 분에게 문의를 했겠군요.

- 뭐 그런 셈이겠죠.

- 감사합니다.

최 형사와 헤어진 최베드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찾아갔다. 임 박사는 신부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의아해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깡말랐지만 안광이 유달리 빛나는 신부 하나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임 박사에게 인사를 했다. 임 박사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최베드로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그..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 혹시나 했는데, 우리가 추론했던 것이 맞았군요. 나쁜 놈들.

-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쩌면 인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모릅니다.

- 그렇군요. 어허...

- 이번에 한국에서 컨퍼런스가 하나 열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네. 그 녀석들이죠.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 그 곳에 참여해서 그들의 의도를 들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 그들이 과연 얘기를 할까요?

- 입구에서 검문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저같은 신부는 들어갈 수 없지만, 박사님께서는 그래도 그 분야에서 연구를 하셨던 분이니까 아마 쉽게 들어가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쩌면 샘 에드워드 교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을 만나실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임 박사는 최베드로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게 하지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 봐야지요.

그리고 바로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에 전화를 걸었다. 그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문의를 해 보았다. 사실 박 형사의 죽음은 임 박사로 하여금 모든 일에 흥미를 잃게 하였고, 임 박사는 국과수에도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소장이 직접 나서서 임 박사의 사직을 만류하고 있었지만, 임 박사는 어떤 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국가를 위한 봉사도, 자신을 위한 발전도 아무 의미없어 보였다. 자신이 지난 세월동안 추구해왔던 것이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에 쓰이고, 또 자신의 지식이 자기의 지기(知己)의 생명을 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 박사는 박 형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삶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도대체 잘 사는 것, 정의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했다. 임 박사는 그 때 알았다. 슬픔이 가득 차면 오히려 눈물이 마른다는 것을. 마음속은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오히려 정신은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그리고 오로지 슬픔만이 마음속에 가득 찬다는 것을. 박 형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임 박사로 하여금 더욱 절망스러웠다. 한평생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올곧게 살다간 사람의 죽음을 덮고 있는 가혹한 진실이 한스러웠다. 그러기에 더욱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 박사는 그들을 지켜보고 싶었다.

- 임 박사님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오히려 저희가 먼저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유전자 연구 분야에서는 나름 유명한 임 박사였기에 그들은 무척이나 호의적인 태도로 임 박사의 참여를 반겼다.

- 네. 감사합니다.

임 박사가 전화를 끊자 최베드로는 임 박사에게 인사를 하며 말을 했다.

- 어쩌면 그들도 임 박사님을 찾으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 놈들은 자신들의 뒤를 쫓는 그 누구든 가만히 두지 않으니까요.

- 이미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 각오가 아닙니다. 임 박사님은 그들에게 그렇게 쉽게 당하시면 안 됩니다. 컨퍼런스에 참여하신 후에 이리로 오십시오. 저희는 임 박사님과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최베드로는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이름도 전화번호도 없고, 약도만 하나 있었다.

- 이건?

- 뒷일은 저희가 해결할 것입니다. 임 박사님은 가족들과 함께 이리로 가시면 곧장 바티칸에 있는 연구소로 가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 그... 그 무슨...

- 저들은 우리 바티칸보다 과학적인 내용에서는 한참을 앞서 가고 있습니다. 저희 사제들로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지요. 제가 옥스퍼드에 간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만... 임 박사님같은 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임 박사는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을 다졌다.

- 그러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임 박사는 최베드로와 헤어진 후 지훈에게 전화를 했다.

- 3일 후에 컨퍼런스가 하나 있는데,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사람들 중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컨퍼런스에 참석할 거야. 그 날이라면 쉽게 침투할 수 있을 거야.

그런 후 무언가 말을 하려 잠시 망설였다.

- 왜 그러십니까?

- 아닐세. 아니야.

- 네. 그럼 그 날 안에서 뵙는 건가요?

- 아니 못 볼 걸세. 아마도...

-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갔다 와서 뵙지요.

- 그러세.

임 박사는 그러다가 급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 죽지 말게나. 잘 지내야 해.

지훈은 임 박사의 뜬금없는 말에 놀랐지만, 그것에 침입하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생각하고는 임 박사를 안심시켰다.

- 저 이런 일 아주 잘 합니다.

지훈과의 전화를 끊은 임 박사는 마음이 착잡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사는 것. 그건 박 형사와 시골에 내려가서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임 박사도 스스로에게 각오를 다졌다.

한편 지훈은 침투를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최대한 얼굴을 변장하고, 옷도 준비하였다. 그리고 침투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수십 번 반복해서 그려보았다.

'세계 유전자 연구 컨퍼런스'는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3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외곽 한적한 곳이었지만 기자들 수백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석학들이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마치 레드카펫에 여배우가 지나가는 것과 같은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1층 로비에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안내원들이 서 있었고, 경비원들 역시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그 때 한 의사가 경비원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 117호 사무실 문 수리 됐어요?

그 말을 들은 경비원은 무전기에 대고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멀리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그 의사에게 말을 했다.

- 오늘 오전에 컨퍼런스 준비하느라 아직 수리를 다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이 참. 사람들도 많이 오는데... 지금 안 돼요?

- 문의 보안 장치 때문에 떼어 내야 되는 일이어서 지금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단 임시로 저희 보안 요원 하나를 그 앞에 세워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보안 책임자가 의사에게 말을 하자 그 의사는 그러라는 듯이 고개를 한 번 끄떡이고는 컨퍼런스가 열리는 3층으로 올라갔다. 컨퍼런스가 열리는 식장 안에는 몇몇 기자들도 식장 안으로 입회하여 있었다. 그 기자들은 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세계적인 석학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형 스크린이 공중에서 내려오며 거기에 발제 순서와 발표자, 그리로 최신 연구 소식에 대한 소개 순서가 나오자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자리로 가서 앉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자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의 소장인 피터 스미스가 나타났다. 멀리서도 그의 흰 머리는 인상적이었다.

- 이렇게 많은 석학들께서 모여 주셔서 저희 연구소는 더없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유전자 연구와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는 자리로...

피터 스미스는 개회 연설을 하며 인상을 깊이 남겼다.

-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을 찾아봅시다.

피터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피터는 그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슬픈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 그리고 비명(非命)에 가신 샘 에드워드 교수님을 위해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샘 에드워드 얘기가 나오자 다들 고개를 끄떡거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하였다. 임 박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고, 저 멀리 무언가 회한에 찬 눈을 한 사람이 보였다. 임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 저 사람은?

임 박사는 예전에 포드 해밍턴 교수와 세인트 조지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샘 에드워드와 유전자 연구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깡마르고 곱슬거리는 머리숱이 유난히 많아 마치 아인슈타인을 길게 만들어 놓은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샘 에드워드 교수는 임 박사와 포드 해밍턴 교수에게 '구스타프 슈뢰딩거' 박사를 소개했고, 그는 다소 시니컬하게 인사를 했다. 샘 에드워드는 세인트 조지 연구소의 실질적인 담당자라고 하면서 연구의 대부분은 그가 진행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임 박사와 포드 해밍턴 교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싸늘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앉아만 있었다. 임 박사에게 슈뢰딩거 박사는 샘 에드워드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명 논문에서도 슈뢰딩거 박사의 이름을 본 적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옥스퍼드 강의도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 박사는 슈뢰딩거 교수를 보는 순간, 그리고 그의 회한 깊은 눈을 보는 순간 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임 박사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겨 슈뢰딩거 박사 옆으로 가서 앉았다. 슈뢰딩거 박사는 학자들과 교류가 많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주변에 앉은 사람이 없었기에 임 박사는 쉽게 그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구스타프 슈뢰딩거 박사님.

임 박사가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인사를 하자 슈뢰딩거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임 박사를 쳐다보았다. 슈뢰딩거 박사는 이 낯선 동양인의 얼굴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지 갸우뚱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 누구신지...

- 아! 저는 예전에 포드 해밍텅 교수님과 함께 세인트 조지 연구소에서 진행하던 연구에 참여했던 임철환이라고 합니다.

슈뢰딩거는 어느 순간 무표정한 얼굴을 임 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아! 그러시군요.

슈뢰딩거의 시니컬한 반응에 임 박사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 샘 에드워드 박사님의 일은 유감입니다.

- 네. 고맙습니다.

임 박사는 작정을 한 듯이 슈뢰딩거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 샘 에드워드 교수가 돌아가셨으니 박사님께 묻는 게 맞겠군요. 유전자 조작체는 잘 보았습니다. 기억 주입술도 훌륭하시더군요.

임 박사의 비꼬는 말에 슈뢰딩거의 눈이 커졌다. 동양인 의학 박사가 알 만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슈뢰딩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 샘 에드워드 박사님의 작품인 건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두 분은 같은 것을 위해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나는 모르는 일이오.

슈뢰딩거는 아예 임 박사를 외면한 채 대답을 했다. 그러나 임 박사는 집요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 그러시다면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저기 밖에 있는 기자들에게 말해야겠군요. 적어도 한국에서 저와 같은 사람 정도면 헛소리를 한다고 치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임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슈뢰딩거는 조용히 임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고려 호텔 1501호요. 저녁 때 그리로 오시오.

그러나 임 박사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저는 포드 해밍턴 교수와 다릅니다. 그 분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죠. 날 만나길 원하신다면 국립과학수사원 연구소로 오시지요.

임 박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 컨퍼런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슈뢰딩거 교수 역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 일단 작전은 멈추게. 내가 따로 연락하겠네.

짧게 전화를 끊고 슈뢰딩거 교수는 임 박사가 나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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