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9. 비밀의 끝(1)
9. 비밀의 끝
- 오케이. 위치 파악. 수신자 파악. 강남 경찰서, 수신자 박지훈. 추적할까요?
컴퓨터 앞에 앉은 이가 전화기에 얘기를 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글쎄. 지금 추적한다고 달라지나? 감시만 하나 붙여놔. 어떻게 하는지 보고만 하고.
- 네. 알겠습니다.
피터는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았다. 자신들에게 꼬여오는 날파리야 언제든 쉽게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날파리가 어떤 놈인지 알아보기 위해선 적절한 미끼가 필요한 법이었다. 박 형사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간 보고에 의하면 CS2의 남편은 이미 부인을 잊은 것처럼 경찰서 일에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의심스러운 행동도 보이지 않았고. 물론 예의 주시 중이었지만,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돌출 행동이 없었기에 그냥 놔두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건드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곳 저 곳으로 옮기게 해도 그저 순응하고 따르는 무능한 인간으로 보일 뿐이었다.
- 훗. 우습군. 다른 사람을 통해 일을 하게하고 뒤에서 숨어있었다니. 후후. 이제 그 날파리만 잡으면 되는군.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린더가 있는 방으로 갔다. 그 안에는 전류가 흐르는 진공관같은 작은 실린더가 하나 있었고, 두 여인이 커다란 실린더 안에 있었다. 만삭의 여인은 이제 곧 아이를 낳을 것처럼 배가 잔뜩 불러 있었고, 한 여인은 살아있다는 신호만 계기판에 보일 뿐이었다.
피터는 버튼을 눌러 연구원을 호출했다. 호출을 받은 연구원이 오자 피터는 작업의 진행 정도를 물었다.
- 홈즈 스미스의 기억 분류가 완료되었나?
- 여기에서 전류 흐름을 보시면, 개인적 기억들은 현재 NP1으로 모으고 있고, 기업 운영과 관련된 기억은 NP2로 모으고 있습니다. 대인 관계와 관련된 내용은 NP3로 모으고 있고...
- 음.. 그럼 언제쯤 완료되겠나?
- 앞으로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데이터로 변환 중이긴 한데, 워낙 방대한 양이라 시간이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피터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연구원에게 말했다.
- 기억 저장 실린더를 두 개 더 만들게. 아주 중요한 일이 될 거니까.
피터의 말에 연구원은 고개를 한 번 숙였다. 피터는 연구원을 보내고 두 명 앞에 섰다. 그러고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 CS2의 남편이 궁금하군. 어떤 인간이기에 우리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는지 보고 싶군.
피터는 혜민의 실린더 앞에 있는 계기판을 보았다.
Days = 255/266
Weight = 3.46(B)/59.3(P)
BMI = 20.7
Pulse = 128(B)/89(P)
피터는 다음 화면을 누르며 혈압이며 양수의 양 등을 체크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피터는 고개를 들어 혜민을 보았다.
- 이제 이틀 남았구나. 내 딸아.
피터는 혜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두 번째 아이였다. 피터는 첫 번째 만든 CS1보다 두 번째로 만든 CS2에게 묘하게 끌렸던 자신을 떠올렸다. CS1을 만들 때는 어리기도 했을 뿐더러 자신의 정자와 '그녀'의 난자로 아이를 만들고, 조작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었다. 그래서 CS1이 만들어지고, 어느 정도 배양액에서 큰 후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그저 다른 복사체가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었다. 특히 '살인 기술'을 뇌에 각인한 채 나가는 것이라 자기 앞에 설 때는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CS2는 달랐다. 아니 애초에 CS2는 계획에 없었다. '1'이 붙은 클래스가 어느 정도 성공을 하자, '2'의 연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하던 연구가 한 조직원의 배신으로 파괴되었다. 그 배신에 동조했던 조직원들을 암시 요법으로 모두 죽게 한 후 추후 이러한 배신이 이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로 모든 이들에게 경고를 내렸다. 그래서 사실상 '2' 클래스 연구는 멈춘 상태였으나 피터는 조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 클래스인 'CS2', 즉 혜민을 만든 것이었다. 피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리고 조직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이용해 혜민을 만들었다. 몇 번의 실패 과정은 있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보완점을 찾아내고, 수정을 하여 드디어 'CS2'를 만들었고, 'CS1'에게 'CS2'를 부탁하는 암시를 걸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CS1'은 암시와 각인 효과를 뛰어넘어 'CS2'를 보호하고자 하는 모성 본능이 강하게 발현되었다. '엄마'는 아니었지만, 마치 CS1은 엄마처럼 'CS2'를 보호하였다. 'CS2'의 존재를 보고하던 그들의 가짜 부모도 'CS1'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그들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CS2'가 타고 있다고 보고를 한 후 'CS2'의 존재를 감춰왔던 것이었다.
'CS2'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은 날 피터는 왠지 모를 슬픔에 젖었다. 슬픔과는 다른 뭔가 가슴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런 슬픔이 길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 'CS2'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CS2'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 그녀의 뱃속에 '그가 생각했던 이상(理想)'의 이상(以上)을 안고서.
피터는 다시 커튼을 닫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모든 사람을 소집하게. 조직과 관련된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전화를 끊고 피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이제 때가 되었군.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지훈은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성준에게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 박 형사님 시신이 확실해?
- 들리는 말로는 부산 해양 경찰청에서 발견했다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성준은 뒷말을 잇기가 난감한지 말을 끌었다.
- 왜? 무슨 일 있어?
- 그게 박 형사님이 발견된 게 대한 해협 근처 배였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장기 밀매 조직 배였나 봐요. 그래서 지금 올라온 내부 자료에는 박 형사님이 불법 밀매 조직과 결탁해서 장기를 밀매하다가 배가 침몰해서 사망했다고 나왔습니다.
- 뭐라고? 개새끼들. 죽은 사람을...
- 지금 경찰서에서도 수근수근하는 분위기에요. 삼촌하고 고 형사님이나 다른 형사님들이 그렇지 않다고 탄원서도 쓰고 하는데 아마도 이 내용으로 보도 자료를 배포할 것 같아요.
지훈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 다른 건 없고?
지훈은 분노를 누르고 물었다. 성준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이건 정보과로 내려온 공문인데요. 형님을 감사하라는 내용이었어요. 형님께 바로 말씀드리려고 전화 드렸는데 전화기가 꺼져있다고만 나오더라구요.
- 음... 그리고 성준아. 너 이 일에서 손 떼라. 파면 팔수록 무섭다.
- 네.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손을 못 떼겠습니다. 그 일에 형님만 남겨두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꽁무니 빼긴 싫거든요.
- 위험한 일이라고. 너까지 위험하게 하긴 싫다.
- 과다 출혈로 어이없이 죽는 것보다 낫죠. 아무튼 제가 정보를 구하면 이리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성준과 전화를 끊은 지훈은 박 형사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이 났다. 박 형사의 죽음을 매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정보도 조작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자신도 어떻게 만들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들을 찾아내서 부숴버리고, 박 형사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날 오후부터 뉴스에서는 평소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박 형사 얘기로 도배가 되었다. 장기 매매의 실태 보고부터 박 형사의 과거 행적, 그리고 경찰과 범죄 집단 간의 유착 관계를 조명하는 이야기로 세상은 시끄러웠다. 지훈은 안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귀를 막고 못 들은 척 했다. 지금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떠들 세상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진실이 밝혀져도 세상은 진실보다는 자극적인 거짓에 열광하니까.
임 박사는 뉴스에서 나오는 얘기를 보다가 컵을 TV로 향해 집어 던졌다. 같이 있던 연구원들은 임 박사의 돌발 행동에 다들 멍하니 임 박사를 쳐다보았다. 평소 냉철하고, 누구에게도 화 한 번 내지 않던 사람이라 연구원들의 놀람은 더욱 컸다.
- 아주 나쁜 놈들이야. 천하에 개새끼들.
임 박사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오자 연구원들은 임 박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선임 연구원이 임 박사의 말에 동조하듯 한 마디 했다.
- 그러니까요. 장기 매매라뇨. 그것도 전직 형사가.
선임 연구원은 임 박사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말을 했지만, 임 박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모르면 가만히나 있어. 전직 형사가 장기 매매? 저 박 형사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야. 개새끼들. 눈에 뻔히 보이는 조작질은. 내 평생 가장 인간답고, 정의로운 인간을 뽑으라면 저 박상철이, 박 형사를 뽑겠어. 그런데 어디서 언론 플레이야. 나쁜 놈들. 가는 사람 곱게 보내주지 못하고.
임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괜히 임 박사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 마디 했던 선임 연구원은 무안해서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밖으로 나온 임 박사는 답답함에 옆에 있던 연구원에게 담배를 하나 빌렸다. 평소 담배라면 백해무익하고 인생을 좀 먹는 것이라고 강변하던 임 박사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연구원은 어색하였다. 임 박사는 피울 줄 모르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알싸한 담배 연기가 입 안으로 들어가자 임 박사는 기침이 터져나왔다. 몹시 심하게 기침을 하자 옆에 있던 연구원이 놀라서 임 박사에게 말을 걸었다.
- 괜찮으세요? 여기 음료수라도...
그러나 임 박사는 손사래를 치며 계속 기침을 해댔다. 눈에서는 담배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침을 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눈물에 맺혀 있었다.
- 나쁜 새끼들...
임 박사의 입에서는 울음이 섞인 욕설이 터져 나왔다. 담배를 피우려고 흡연실에 있던 연구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임 박사는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 내, 너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닌데... 흑흑흑...
임 박사의 울음소리가 흡연실 안에 가득 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흡연실 쪽을 쳐다보거나 안으로 들어가 그를 위로하지 못하였다. 임 박사의 울음은 그만큼 피맺힌 절규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