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8)
슈테판 신부는 최베드로 신부의 보고 내용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석호가 지난 밤에 와서 다운로드 받은 파일 중 대다수는 복원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가 아니더라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경악할 만한 내용들이었다.
- 이게 모두 그들이 한 짓인가요?
- 예. 그런 것 같습니다. 1921년에 멕시코에서 일어났던 일부터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까지. 모두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서들이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들이죠.
- 무서운 일이군요. 그런데...
슈테판 신부는 의아한 듯이 최베드로를 쳐다보았다.
- 왜 그들이, 아니 샘 에드워드 교수가 이런 정보를 우리에게 보낸 것일까요?
그 말에 최베드로는 앞에 놓인 펜과 종이에 인물도를 그려가며 무언가를 쓰며 말했다.
- 제가 알고 있기로는 샘 에드워드는 엑소더스(Exodus) 내에서 모든 과학적 내용 전반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얼마 전에 죽은 버밍험 그룹의 회장인 홈즈 스미스가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죽음, 특히 세인트 조지 연구소의 전소(全燒)와 관련해서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제거된 것일 수도 있죠.
- 내부의 변화라... 아직 감지되는 건 없습니까?
- 특이 사실 하나는 조만간 한국에 있는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에서 전 세계 과학 석학들을 대상으로 컨퍼런스를 연다는 것입니다.
- 한국이라... 최베드로 신부님은 한국에 모국이시지요?
- 네. 그렇습니다.
- 그리고 얼마 전에 사제 서품을 받은 마태오 신부도 한국인으로 알고 있는데요.
- 맞습니다. 아주 영민한 청년이지요.
- 저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 과찬이십니다.
- 아무튼 이게 사실이라면 아주 심각하군요. 생체 실험에 유전자 조작, 그리고 암시 요법까지. 그들은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 없는 사람들 같군요. 특히 암시 요법으로 상호간에 살인을 유도했다는 것은 정말...
슈테판 신부는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 이걸로 그들의 목적이 명확하게 보입니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정점(頂點)에 이르니까 제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 도대체 그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내보낸 사람이 얼마나 된다는 얘긴지...
최베드로는 문서의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유능한 인재를 만들어 세상에 기여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과 인공 수정으로 통해 '인간'을 만들어 내 보냈다면 그것으로 그들의 역할은 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인간'들에게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암시 최면을 걸어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제거하고, 그들 스스로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비인간적인 술수를 자행한 것이었다.
- 동일한 사건만 총 네 번이었습니다. 멕시코, 네덜란드, 일본, 그리고 이번에 한국.
- 모두 그들이 연구를 진행하던 곳이군요. 그런데 왜 이번엔 한국이었을까요?
슈테판 교수의 물음에 최베드로는 얼굴이 다소 붉어졌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처럼 한국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부끄러움이 앞섰다.
- 아마도 한국이 유전자 조작이나 생체 실험에 적합한 국가였을지 모르지요. 유럽이나 미국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힘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윤리적인 것과 결부된 스캔들이 발생하면, 특히나 생명 윤리와 관련된 일이라면 비난과 처벌을 면하기 힘들지요. 하지만 한국의 정서는 유전자 조작이나 생체 실험에 대해 관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이오 산업이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만 하면 쉽게 수긍을 하는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요?
- 음... 하지만 그런 국가는 동남아시아에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외적인 이유가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가령 핵심 연구자가 한국에서 활동을 한다던가, 아니면 예전부터 어떤 기반을 마련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아무튼 이 모든 사건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현재 밝혀진 것으로는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군요. 그런데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습니다. 물론 분자 생물학을 공부하신 최베드로 신부님이기에 질문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요.
- 무엇이지요?
- 다른 게 아니라 아까 문서를 보니 인간의 기억을 저장하는 기술과 그것을 다시 각인하고, 임시 요법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 저도 그 부분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DNA는 엄밀히 따지면 인류 역사의 기록물이지요. 리처드 도킨슨에 따르면 문화는 '밈(meme)'의 형태로 전승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은 어쩌면 우리의 몸 안에 내재화되어 전승되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렇게 따진다면 '뇌'는 그것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도구이니까 당연히 '뇌'에 모든 것이 저장이 되겠지요. 그런데 뇌는 전기적 자극이기 때문에 그 생체적이긴 하지만 전기적 자극을 갈무리한다면 뇌의 기억을 다운로드 받고 다시 전기적 자극으로 뇌에 주입할 수 있겠지요. 이론상으로는.
- 그럼 그들은 이론상으로 생각했던 것을 실제로 만든 것이로군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 영국에서 복제양 돌리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충격적이었는데, 이건 더 심하군요.
- 문제는 그들이 기억에 대한 주입과 복사, 각인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공 수정을 통한 생체실험도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인데, 기억까지 마음대로 조작을 한다면 어쩌면 인류의 미래는 더 암담할 수 있습니다.
최베드로는 진짜 그런 세상이 도래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물론 샘 에드워드의 자료에서는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만약 그 연구가 좀 더 깊게 진행되어 그러한 기술을 갖게 되고,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 이 문제는 대의원 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바티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그 일을 막아야지요.
- 어쩌면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한국으로 가서 이 일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슈테판 신부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말했다.
- 마태오 신부와 같이 가도록 하십시오. 두 분 모두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활동하기가 수월할 수 있겠군요.
-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최베드로가 밖으로 나가자 슈테판 신부는 문서들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문서의 뒷부분이 빠졌지만, 열성 유전자의 발현과 관련된 내용을 읽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았다. 우성과 열성을 결정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해 왔던 믿음이 처참하게 깨지는 순간이었다.
- 더 나은 인간이라니...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슈테판 신부는 혼자 중얼거렸다. 슈테판 신부는 최베드로가 준 동영상을 재생하였다. 그 안에는 모계 유전자와 다양한 부계 유전자의 조작을 통해 같은 DNA를 갖고 있는 인간을 다양하게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실험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도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실험에 실패한 개체들의 영상은 인간이 얼마나 인간을 추악하게 다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기에 슈테판 신부는 십자가를 쥔 채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다리가 네 개인 아이, 피부가 투명하여 장기가 다 보이는 아이, 눈이 초식 동물처럼 귀 바로 아래 달린 아이, 그들은 그나마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난 이들이었다. 간과 대장이 혀 아래에서 자라 몸의 절반이 하관인 아이부터 몸에 팔과 같은 것이 수십 개 붙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는 슈테판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더욱 슈테판 신부를 경악하게 한 것은 그러한 아이들을 놓고 결과물이 오류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심판에서 그들은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간은 과연 진보하는 것인가, 더 나은 인간을 위해 현재의 인간은 도구인가'
슈테판 신부는 그런 생각이 들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이건 막아야 해.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이름으로...
슈테판 신부는 동영상 화면을 끄고 조그맣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불쌍한 그들이 죽어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편한 안식을 취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