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7)
그러자 조폭 두목은 펄쩍 뛰면서 말했다.
- 형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조폭 두목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오려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부터 도피 생활을 할 처지니 돈이 필요할 터였다. 지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 집을 팔고 돈을 모으고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돌아보며 조폭 두목에게 말을 했다.
- 미안한데, 돈 좀 있냐?
지훈의 말에 조폭 두목은 옆에 서 있던 녀석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지훈을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
- 얼마쯤 말씀이십니까? 지금 제가 급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러니까 한 3억 쯤 되는데요.
조폭 두목은 지훈이 그동안 자신을 봐준 상납금을 받으려는 줄 알고 자신이 줄 수 있는 액수보다 조금 더 불렀다. 지훈같은 사람과 결탁되어 있다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휴... 한 2억 쯤 줄 수 있어?
- 그럼요. 지금 현금으로 준비하겠습니다.
- 아니, 대포 통장 있으면 거기로 넣어줘. 그리고 이거.
지훈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조폭 두목에게 건네주었다.
- 이게...
- 우리 집 열쇠야. 안방에 들어가면 집문서 있으니까 그거 팔면 2억은 넘게 나올 거야.
지훈의 말에 조폭 두목이 탁자를 탕 내려쳤다.
- 박 형사님. 저 그런 놈 아니올시다. 그깟 2억 없어도 죽지 않아요.
그러나 지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조폭 두목에게 말했다.
- 얼른 대포 통장에 2억 준비하고 체크 카드로 하나 발급해 주라.
조폭 두목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지훈에게 말을 했다.
- 한 시간정도 걸린다니까 간단하게 한 잔 하시죠.
지훈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조폭 두목은 밖에 있는 똘마니 하나를 불렀다.
- 가서 양주 좋은 놈으로다 하나 가져오고, 과일 하나 깎아와.
- 애들은요?
- 필요 없어.
- 네.
똘마니가 꽁무니 빠지게 밖으로 나가자 조폭 두목은 지훈이 준 열쇠를 들고 자신의 책상 뒤로 갔다. 쪼그려 앉아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다가 일어서며 말했다.
- 제가 이쪽 세계에 있지만, 그래도 의리 하나는 있는 놈입니다. 제가 열쇠는 잘 보관해 두겠습니다. 나중에 오시면 찾아가십시오.
지훈은 조폭 두목을 보며 말했다.
- 신세를 졌군.
- 뭐 신세라고 생각하시면 나중에 신세 갚으시면 되구요.
조폭 두목이 말했을 때 문이 열리고 술과 안주가 놓였다. 조폭 두목은 술 뚜껑을 따고는 지훈의 술잔에 한 잔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술잔에 따르려고 할 때 지훈이 술병을 빼앗아 그의 잔에 따라 주었다. 조폭 두목은 다소 놀란 눈으로 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그런 눈을 무시하고 술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그리고 다시 술잔에 술을 한 잔 다시 따랐다. 그리고는 다시 급하게 벌컥 마셨다. 조폭 두목은 그런 지훈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훈은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수록 가슴이 아팠다. 지훈은 말없이 몇 잔을 거푸 마셨다. 둘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고, 조폭 두목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지도 않은 채 지훈이 마시는 것만을 쳐다보았다. 얼마 후 통장과 체크카드를 가져오자 그것을 들고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잘 마셨다. 나중에 보자.
지훈은 조폭 두목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거리에서 지훈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햇살 아래에서 술기운이 살짝 오르자 지훈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지훈은 근처 구석으로 가서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듯 울음을 터트렸다.
- 개새끼들... 내가 너희들 죽여버린다.
지훈은 주먹에서 피가 나게 담벼락을 내려쳤다. 담벼락 한 귀퉁이가 깨져나가고, 지훈의 주먹이 피로 물들었지만, 지훈은 분노와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훈은 한 손에 피를 뚝뚝 흘리며 골목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임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은 최대한 울음을 참으며 임 박사에게 박 형사의 죽음을 알렸다. 임 박사는 아무 소리 없이 지훈의 말만 들었다. 믿기지 않는 말일뿐더러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임 박사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 박사님, 저 잠시 숨어서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지훈의 말에 임 박사는 가슴에 차오른 슬픔이 터져나왔다.
- 흐... 흑...
임 박사의 울음에 지훈 역시 이미 너무 울어 말라버릴 법도 한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울기만 했다. 임 박사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지훈을 격려했다.
- 그 녀석 행복했을 거야.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까.
- 하지만 저는 이렇게 보내 드릴 수 없습니다. 그 녀석들... 제 손으로 부숴버릴 겁니다.
- 그래. 그래. 나 역시 그 놈들 부숴버릴 거야.
- 저 맥컬리 병원으로 쳐들어갈 예정입니다.
- 아냐. 그냥 들어가면 안 돼. 그리고 맥컬리 병원은 표면으로 드러난 곳일 뿐이야. 진짜는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지.
- 저는 그 안에 침투해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 그러게. 몸조심하고. 나도 그 녀석들 정보를 파 보겠네.
지훈은 전화를 끊고 골목길 안에 앉아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정신질환 연구에 대한 회의에 참석했던 최베드로는 늘 하던 대로 노트북을 켜고 오늘의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과 정신질환을 가진 인간의 구분은 늘 어려웠다. 여러 가지 특징적인 징후들이 있긴 했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들은 그간의 가톨릭에서 구분하던 내용과 많이 상이하여 최베드로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최베드로는 오늘 받은 브로셔와 논문집을 펼쳐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컴퓨터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최베드로는 회의에 참석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보다 정리하여 바티칸 정보국에 보고하는 일이 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최베드로는 지난번에 보낸 메일의 피드백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메일에 접속했을 때 처음 보는 메일을 보았다. 자신의 메일 주소는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거의 바티칸과 연락을 할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노출도 거의 되지 않았다.
'[email protected]'
- 샘 에드워드?
메일의 제목을 보고는 최베드로는 놀라서 바로 확인을 하였다.
'Placere auxilium Doctor Gustav Schrödinger.(구스타프 슈뢰딩거 박사를 도와주십시오.)'
구스타프 슈뢰딩거라면 최베드로도 잘 알고 있는 박사였다. 최베드로는 메일을 보낸 이가 누군지 몰라도 대단히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영어 메일이 아닌 라틴어 메일을 보내서 다른 메일과 섞여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최베드로가 메일을 열자 아주 단순한 내용이 보였다.
Secret of Exodus
ftp://ergx23rqts.multan.or.uk
IDentification : callofexodus
Password : &qx89_65*TX2pr
Please reveal this secret.
최베드로는 메일 화면을 그대로 놔둔 채 전화를 들었다.
- 마태오 신부. 잠시 내 방으로 와 줄 수 있나?
짧은 대답이 있은 후 곧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들어오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신부는 아직 앳되기는 하지만 대단히 영민해 보이는 신부였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조금은 어색한 품이었지만, 그의 뛰어난 외모 덕분에 옷은 사제복이라기보다는 마치 사제복을 흉내 낸 기성복 모델처럼 보였다. 젊은 신부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 선생님, 마태오 신부라고 하니까 어색하네요. 그냥 선생님이라도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안 되나요?
마치 인자한 아버지에게 투정을 하는 듯한 젊은 신부를 보고 최베드로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익숙해 질 때까지는 마태오 신부라고 부를 것이라네. 만약 한국에 간다면 장석호 신부라고 부르겠지.
석호는 최베드로의 대답에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어색하지만 익숙해져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석호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최베드로는 석호를 노트북 앞에 앉게 했다.
- 여기 메일을 한 번 봐 주게.
- 엑소더스의 비밀? 이게 뭐죠? 이건 FTP 주소고 아래 것은 아이디하고 패스워드인데요. 비밀을 폭로해 달라니 FTP에 폭로할 자료가 있나 본데요.
- 그래?
- 어쩌면 위험한 메일일 수도 있어요. 컴퓨터 바이러스나 그런 걸 심어 놓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 노트북으로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누가 보낸 거죠?
- 샘 에드워드. 옥스퍼드 대학교 분자 생물학과장이지. 세인트 조지 연구소장이기도 하고.
- 그 사람이 왜 신부님께 메일을 보냈죠?
- 구스타프 슈뢰딩거 교수 때문일 거야. 아무래도 이게 구스타프 슈뢰딩거 교수하고 연관되어 있는 일 같거든. 그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석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했다.
- 한 20분 정도만 있으면 가능할 것 같은 데요.
- 20분?
석호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자신의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노트북과 최베드로 노트북을 연결하고는 자신의 자료를 모두 최베드로의 노트북으로 옮겼다. 그리고 몇 번의 화면이 바뀌더니 노트북이 초기화되어 있었다.
- 이 노트북에는 아무 정보도 없으니까 여기서 확인해 보면 됩니다. 바이러스나 그런 거라도 다시 포맷해 버리면 되니까요.
석호는 FTP 클라이언트를 설치하고는 메일에 있는 주소에 로그인을 하였다. 그 안에는 동영상 파일을 비롯하여 각종 문서 자료들이 보였다. 석호는 그 자료들을 모두 다운로드 받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문서를 받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CRC 에러가 나기 시작했다. 석호는 CRC 에러가 나는 것들을 다시 분류하여 다운을 받았다. 그러나 또다시 CRC 에러가 났다.
- 랜선 문제인가?
석호는 노트북에 연결된 랜선을 빼버리고 휴대전화를 연결했다. 그리고 다시 다운로드를 받기 시작했다. 랜선을 연결했을 때보다 느렸지만, CRC 에러가 나지 않았다.
- 랜선 문제였군.
그러나 몇 개의 파일을 받자 다시 CRC 에러가 났다. 석호는 그 순간 핸드폰을 빼버렸다. 옆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단 최베드로가 한 마디 했다.
- 아직 다 다운받지 않았는데 왜 그러나?
- 해커입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저만 노리고 있어요. 어쩌면 서버에 덫을 쳐 놓고 있다가 제가 접근하니까 저의 자료를 빼내가려고 한 거죠.
- 그럼 바이러스인가?
- 아뇨. 바이러스보다 더한 것이죠. 말 그대로 해킹입니다. 아까 접속한 서버는 보안이 뛰어난 서버 같거든요. 뭐 해커가 뚫으려고 마음먹으면 언젠가는 뚫리겠지만요. 그게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 서버에서 다운을 받는 IP를 추적해서 그 IP에 해당되는 컴퓨터를 해킹하려는 것이죠.
- 성경보다 더 어렵군.
- 분자 생물학보다는 쉽습니다.
- 아무튼 지금 받은 자료들을 한 번 볼 수 있나?
석호는 어떠한 외부 연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료를 열었다. 첫 번째 문서는 손상된 PDF 문서라고 나왔지만, 석호는 볼 수 있는 부분만이라도 살렸다. 첫 번째 문서부터 최베드로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석호는 영어로 되어 있는 문서라 읽고 해석이야 가능했지만, 전문적인 용어나 그림이 많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 추.. 출력.. 아냐. 출력하면 안 될 것 같군.
- 무슨 내용이신데 그렇게 놀라셨습니까?
-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짓.
- 네?
최베드로는 자리에 앉아 다음 문서를 열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운받은 문서는 다 읽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나머지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나?
- 있긴 한데요... 여기서는 조금 힘들고요. 방화벽이나 그런 게 강한 곳에서라면..
- 바티칸 정보국에서는 가능한가?
- 그 정도라면...
- 지금 당장 바티칸 정보국으로 가서 나머지도 다운로드 받게. 내가 바티칸에 전화해서 전용기를 준비할 테니.
석호는 최베드로가 이렇게 서두는 것이라면 무언가 대단히 중요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석호는 군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네. 그럼 자료를 받아서 어떻게 할까요?
- 일단 가지고 있게. 나도 여기 회의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석호가 방문을 나가자 최베드로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엑소더스의 일부를 알아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생체 실험 중입니다.
최베드로는 무언가 얘기를 듣는 듯 침묵을 했다.
- 내일 저녁 쯤 도착해서 자세히 보고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