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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50화 (50/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6)

그러나 박 형사 역시 손과 발에 의자에서 나온 족쇄가 채워져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 오호. 의지가 사라졌군. 자네가 죽으면 길동무 삼아주려고 했는데 말야.

- 이 개새끼들. 나만 죽이라고. 쟤네들은 내가 시킨 것만 한 거야!

박 형사의 피맺힌 절규가 울려 퍼졌지만 상대는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조금 후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니가 말한 의지가 어떤 것인지 알았나? 이제 진짜 의지를 보여줄까?

박 형사는 상대의 말에 몸이 떨렸다.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결론은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의지네 뭐네 떠들어도 고작 이런 것에 몸을 떨다니 우습군. 아주 우스워.

- 나는 상관없지만 쟤들은 살려줘. 제발 부탁이야.

박 형사의 말에 상대는 코웃음을 쳤다.

- 누가 죽인다고 했나?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오히려 살릴 뿐이지. 너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볼까? 내 제안을 자네는 100% 수용할 거라고 믿지.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상대의 말에 박 형사는 어둠을 응시했다. 무고한 두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이 한 목숨을 내 놓으리라고.

- 내 제안은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자네한테도 아주 좋은 제안이지.

- 그... 그게 뭐지?

- 지금은 자네 의지인가?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 아니지. 자네의 의지인가 아닌가가 중요해. 의지가 아니라 강요라면 난 이 게임에서 손을 뗄 테니까.

- 의지야. 내 의지라고.

박 형사는 상대가 자신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그렇다면 얘기를 해 주지. 자네한테 내가 100억을 주지. 그리고 저 두 사람도 살려주고. 아니 더 솔깃한 제안을 하나 하지. 지금과 관련된 자네의 기억과 저들의 기억을 지워주지. 물론 자네가 원한다면 죽은 부인도 만들어 주고, 딸과도 같이 살게 해주지.

전혀 엉뚱한 말에 박 형사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간 살아온 형사의 촉으로 본다면 이는 더 큰 요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그게 무슨.. 내게 원하는 게 뭐지?

- 눈치가 빠르군. 내 요구는 간단해. 우리를 추적하는 놈들을 죽일 것.

- 뭐... 뭐라고?

- 어때? 단순하지?

- 미친놈.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 난 미치지 않았다네. 제안을 한 것일 뿐이지.

- 너희를 추적한 것은 나밖에 없어. 그리고 너희들이 기억을 쓰고 지울 수 있다면 나한테도 그렇게 하면 되지,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지?

- 뭐 사실대로 말하면 사람의 기억을 모두 다운받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들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지.

박 형사는 그 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 기억을 다운로드한다고? 미친 것들. 사람의 머릿속을 어떻게 들여다 볼 수 있지?

- 자네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군. 내가 과대평가했던 건가? 기억을 주입할 수 있으면 당연히 기억을 추출할 수도 있지. 단순한 사실 아닌가!

- 그렇다면...

- 자네가 알아낸 게 뭐든 아무 소용없는 짓인 거 알고 있지 않나? 더욱이 내가 아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 그게 뭐지?

- 훗. 내가 왜 그걸 대답해 줘야 하지? 자네가 먼저 대답을 해야 하지. 내가 제안한 내용을 받아들이겠나?

- 나... 나 외에는 없어.

박 형사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보았지만, 박 형사는 어차피 그들의 말을 수용해 봤자 결국 자신과 그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죽을 바에는 저 두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들이 죽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여겼다.

- 안타깝군. 자네 혼자 알 수 없는 내용이야. 자네가 거부하면 어떻게든 찾아내겠지만 굳이 복잡하게 그럴 필요가 있나? 자네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닌가?

박 형사는 눈을 감았다.

- 만약 내가 받아들인다면 내가 묻는 것에 대답을 해 줄 텐가?

- 어차피 지워질 기억인데 알아서 뭘 하겠어? 하지만 원한다면 말해 주지.

- 음...

박 형사는 자신에게 숨겨진 사실을 말해준다면 비록 자신이 죽더라도 그들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일을 전해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바.. 받아들이지.

- 그런가? 그들이 누군가?

- 먼저 진실을 얘기해 준다면, 알려 주지.

- 훗.. 재미있군. 그래. 말해주지. 알고 싶은 게 뭐지?

- 임혜민은 살아 있나?

- 아! 임혜민. 임혜민은 예상 외의 수확이야. 그녀의 언니가 그녀가 죽었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녀의 존재를 몰랐었지. 그녀가 누군가의 폐를 갖고 있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폐는 다른 사람 것을 쓰려고 배양을 했지. 그래서...

- 그럼 살아 있다는 말인가?

- 그럼. 살아 있고말고.

- 아.. 아이는?

- 아이? 아! 임혜민이 임신 중이었군. 그녀가 살아 있다면 아이도 살아있는 게 아닌가?

박 형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박 형사의 표정에 그것이 드러났는지 상대는 웃으면서 말했다.

- 하하하. 자네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나도 깜빡 속을 뻔했으니까.

상대의 말에 박 형사는 표정을 바꿨다.

- 그게 무슨 말이지?

- 자네는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거지. 자! 얘기를 알았으니 그들에게 말해야 될 텐데 어떻게 할까?

박 형사는 허를 찔렸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대는 혀를 차며 말했다.

- 안 됐군. 우리의 협상을 끝이야.

그리고는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안 돼!'하고 소리를 질렀다. 박 형사 앞의 커튼이 쳐지는 순간 박 형사의 너머는 엄청난 소음과 함께 전기에 무언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 안 돼! 이 개새끼들아!

하지만 박 형사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바닥이 열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박 형사는 정신을 잃었다.

박 형사가 눈을 떴을 때 그는 두 손과 발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자신의 몸이 축축하게 젖는 기분이었다. 바닥을 보니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사방이 쇠로 만들어진 방이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박 형사가 주변을 돌아보자 바닥에 고정된 쇠 탁자 위에 휴대 전화가 하나 놓여 있었다. 박 형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핸드폰에는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화나 하게. 난 인도적인 사람이라서.'

박 형사는 그 포스트잇을 떼어 구겨버렸다.

- 개새끼들.

그러나 박 형사는 자신의 발밑에 차오르는 물을 보고는 휴대 전화를 들었다. 머릿속에는 미국에 있는 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임 박사를 떠올렸다. 박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박 형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강렬한 생각은 하나였다. 비록 이것이 그들의 함정일지라도 지훈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을. 박 형사는 자신의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을 보고는 지훈의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 형님 어디십니까?

- 잘 들어. 우리의 생각이 맞았어. 지금 이 전화는 도청 중일 테고, 위치 추적 중일 테니까 어서 피해야 해.

- 거기 어디에요?

-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자네 부인은 살아 있어. 아이도.

- 네? 형님 알겠으니까 거기가 어딘지만 말씀해 주세요.

지훈이 다급하게 말했으나 박 형사는 체념하듯이 말했다.

- 소용없는 짓이야. 나 없어도 잘 해 나가야 해.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아무튼 그 녀석들이야. 맥컬리 병원. 그 녀석들이 나를 잡아 가둔 것 같아.

- 제가 그리로 갈 테니까...

- 시간이 없으니까 말 들어. 지금 당장 거기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 그리고 몸을 숨겨. 알았지?

물은 어느새 차올라 박 형사의 목까지 다다랐다. 박 형사는 몸을 띄웠으나 천장이 낮아서 인지 금방 더 차올랐다.

- 내가 범인 잡아 준다고 했는데... 못 했네.

- 아... 아닙니다.

- 제수씨 만나면... 제수씨한테... 미.. 미안하다고 해줘.

- 형님... 어디세요? 제가 갈게요.

지훈은 거의 울 듯이 말했다. 하지만 박 형사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 아냐. 알아도 올 수 없는 데야. 그리고 딸하고 친구에게도 인사를 대신 해 주게.

- 바.. 박 형사님...

그 순간 지훈의 수화기 너머는 지직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지훈은 자신의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경찰서를 향해 양복을 입은 몇몇의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지훈은 몸을 돌려 경찰서 뒷담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담벼락 사이에 있는 좁은 뒷문으로 밖으로 뛰어 나가 무작정 도망을 갔다. 지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지훈은 한참을 도망을 쳤다. 지훈은 무작정 도망을 치다 공중전화로 가서 아는 정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아이고, 형님. 어쩐 일이십니까?

정보원이 지훈의 전화를 받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마디 하고 넘어갔을 것을 지훈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했다.

- 대포폰 하나만 구해줘라.

그 말에 정보원은 놀라서 물었다.

- 대포폰이라뇨. 저흰 합법적으로다가...

- 닥치고 구할 수 있어, 없어?

지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정보원은 바로 대답을 했다.

- 구할 수 있죠. 네. 암요.

- 얼마나 걸리지?

- 네.. 한 두 시간 쯤요. 나오면 제가 내일...

- 내가 그리로 가지. 한 시간 안에 해줘.

-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차를...

그러나 지훈은 뒷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지훈이 딸기 룸살롱 앞에서 내리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낮이라 그런지 아직 문이 닫혀 있었다.

- 어서오십시오. 형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지훈은 그 인사를 무시하고 룸살롱 옆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지훈의 모습을 다들 대강 알고 있는지 모두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지훈은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는 벌컥 열었다. 안에 있던 조폭 두목이 벌떡 일어나면 지훈에게 인사를 했다.

- 아이고. 형님. 제가 가져다 드리려고 했는데...

- 나왔어?

지훈이 전화를 끊고 여기 오는 데 고작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지훈은 마음이 다급했다. 다짜고짜 묻자 조폭 두목이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 어이. 나왔어? 어. 얼른 가져오라니까.

지훈의 정보원 노릇을 하는 조폭 두목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지훈에게 말했다.

- 10분 정도면 올 겁니다. 그런데 어디다 쓰시려고...

지훈은 여전히 인상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폭 두목은 지훈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다만 지훈이 담배를 입에 물자 옆에 와서 라이터로 불을 붙여준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도착하자 조폭 두목이 핸드폰 케이스를 얼른 열어 지훈에게 건네주었다. 지훈은 전원을 켜고 충전기만 챙긴 채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의 전부인 10만원을 꺼내 조폭 두목에게 주었다.

- 나머지는 나중에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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