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5)
신문을 보던 임 박사는 홈즈 스미스의 죽음보다 그 앞에 나온 구절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영국의 대표 인물들의 연속된 죽음이 대영제국에 슬픔의 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얼마 전에 완전 소실된 세인트 조지 연구소와 그 안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해 안타깝게 타계한 샘 에드워드 교수에 이어 영국을 대표하는 기업가인 홈즈 스미스의 죽음은...'
- 샘 에드워드 교수가 죽어? 세인트 조지 연구소도...
샘 에드워드의 죽음은 임 박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아니 샘의 죽음이 알려졌다면 학계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기 때문에 임 박사는 조만간 샘 교수를 찾아가리라 맘을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 이게 무슨...
임 박사는 신문을 탁자에 놓으며 어찌된 변화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세인트 조지 연구소는 샘 에드워드 교수가 온 힘을 다해 이룩한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불타 없어지거나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은 임 박사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이었다. 임 박사는 전화기를 들어 박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무슨 일이야?
- 세인트 조지 연구소가 불탔어.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뜬금없는 말에 반문조차 하지 못했다. 임 박사와 세인트 조지 연구소를 방문하기 위해 비자 신청까지 해 놓은 상태였기에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불타다니?
- 말 그대로야. 나도 신문에서 지금 보고 알았어. 샘 에드워드 박사도 죽었고.
- 영국 일이어서 우리나라 신문에 안 실린 건가?
- 아니 그 정도 연구소가 전소(全燒)되고, 샘 에드워드 같은 저명한 학자가 죽은 사건은 학계에서는 아주 중요한 일이지. 우리나라 신문 전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신문에는 실릴 법한 일이야.
- 그런데 자네는 신문 보고 알았다면서?
- 응. 홈즈 스미스가 죽었다는 기사에 잠깐 언급이 되더군.
- 휴...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박 형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하자 임 박사는 의자에 뒷머리를 대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 아무래도 이상해. 내가 가봤던 세인트 조지 연구소는 그렇게 쉽게 불탈 만한 곳이 아니었거든.
- 그럼 누가 불이라도 질렀다는 말인가?
- 아니. 누가 불을 질렀다면 전소된 가능성이 가장 적은 곳 중에 하나지. 분명 내부에서 일어난 불 때문일 거야.
- 그럼 내부에서 불을 질렀다는 건가?
- 아직 그 사실까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아는 영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았더니 그 친구가 아주 흥분해서 말을 하더군. 세인트 조지 연구소 직원이 다 해서 200명이 넘는데, 그 사고로 죽은 사람은 샘 에드워드 박사 한 명 뿐이라고.
- 한 명뿐?
- 그래. 누군가 죽인 건지, 아니면 자살이라도 한 건지... 전혀 모르겠군.
- 아무튼 그것도 이상하군. 하긴 요즘 들어 이상하지 않은 일이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군.
- 저녁 때 오게나. 소주나 한 잔 하지.
- 그래. 그렇게 하지. 나도 여기 일 마무리 되면 가겠네.
박 형사는 전화를 끊고 뭔가 상황이 꼬여가는 기분이 들었다. 박 형사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임 박사 사무실로 오라고 얘기를 했다. 그러나 지훈은 오늘 당직이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말을 했다. 박 형사는 지훈과 전화를 끊고는 오늘 사진을 찍을 골목 안 쪽에 있는 모텔로 차를 꺾었다. 그런데 좁은 골목은 오가는 차가 서로 비켜주지 않으려 서로를 막고 있었다. 둘 다 고급 승용차였다. 하나는 하얀색 아우디였고, 하나는 검은색 볼보였다. 그들은 누구도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차 앞머리끼리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먼저 비켜주면 인생에 있어서 큰 패배인 양 그들은 마주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 뒤에 선 차들이 경적을 울리고 비키라고 소리를 쳐도 두 차는 막무가내로 비켜서지 않았다. 뒷차 운전사가 내려 하얀 아우디 쪽으로 갔다. 체격이 건장했고, 각진 턱이 그를 매우 강인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구릿빛 피부는 그의 얼굴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했다. 뒷차 운전자는 앞으로 다가가 아우디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창문이 내려지지 않았다. 사방이 어둑어둑하고 차에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서 안에 누가 탔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뒷차 운전자는 다시 창문을 두드렸다.
- ....
뒷차 운전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아우디의 창문이 내려왔다. 그러자 뒷차 운전자는 마치 무언가 지시를 받는 듯한 태도로 그 앞에 서 있다가 돌아 나왔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앞 쪽 볼보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다. 뒷차 운전자는 자기 뒷차들로 가서 얘기를 했다.
- 무슨 일이에요?
뒷차 운전사가 자기 뒤에 선 빨간색 스포츠카에 다가가자 창문이 열리며 웬 여자가 그에게 물었다. 여인은 한눈에도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듯 사무적인 말투로 얘기를 했다.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며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 앞 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뒤로 돌아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남자의 말을 들은 여인은 애교스럽게 투덜거렸다.
- 여기 빠져나가기 힘든데...
- 제가 뒤에서 봐드릴게요.
여인이 차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할 동안 남자는 무던하게 여인이 차 빼는 걸 도와주었다. 여인이 차를 빼고 뒤로 나가면서 창문을 내리고 남자에게 말했다.
- 도와주셔 고마워요.
여자는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미소를 보고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 별 말씀을요.
여자는 남자와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듯 차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는 자신의 차 쪽으로 돌아갔다. 여자는 룸미러로 자신의 앞에 서 있던 남자 차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탄 차는 여전히 그 차 뒤에 서서 막힌 골목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건너편에서 마찬가지였다. 룸미러로 뒷 상황을 보던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골목을 막고 있던 차들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다른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인은 놀란 눈으로 차를 멈추고 룸미러를 지켜보았다. 멀리서 차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남자가 아까 보았던 건장한 남자와 다른 남자들에게 끌려 흰 색 아우디 승용차에 태우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언제 길을 막았냐는 듯이 일사분란하게 차가 빠졌다. 여인은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가 골치 아플 것 같아 골목 밖으로 빠져 나왔다.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여인은 그냥 모른 척 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앞으로 내달렸다.
박 형사는 불시에 자신을 공격한 이들의 정체가 누군지 몰랐다. 다만 어렴풋하게 자신이 조사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밀실인지 지하인지 소리가 크게 울렸다.
- 자네였나?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은 아니군.
- 넌 누구냐?
-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군. 나라면 왜 잡아두었는가를 물었겠지.
박 형사는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추적하던 불륜 커플이라면 이렇게 조직적으로 자신을 붙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정도의 일을 꾸밀 수 있는 이들이라면 지훈의 와이프를 납치한 이들이라고 생각을 했다.
- 너희들이로군. 나 역시 대단한 사람인가 보군.
- 대단한 사람? 글쎄 날파리라고 하는 게 맞겠지.
- 날파리? 농담도 잘 하는군.
- 농담이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파고 들어왔나 보군. 나를 이렇게 잡아 놓은 걸 보니.
- 빙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신경 쓰이는 방향이지. 올바른 방향이었다면 나도 자네가 찾아오는 걸 반겼겠지. 그런데 너무 구차해.
상대는 마치 경멸하듯 차갑게 말을 했다. 그러나 박 형사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얘기를 했다.
- 원래 이 바닥이 구차하고 더럽지.
- 그런가? 아주 재미있는 말이군.
- 하긴 니 놈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재미로 사람을 죽이니 모든 게 재미있겠지.
-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라... 글쎄 난 사람을 살린 적은 있어도 죽인 적은 없어서.
- 거짓말 마! 이 살인자야!
박 형사는 몹시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냉정을 잃지 않은 목소리였다.
- 흥분했군. 난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네. 아직 몰랐었나?
- 사람을 만들어놓고 서로를 죽이게 한다고 해서 죽이지 않은 건 아냐! 오히려 더 나쁜놈이지.
- 그래. 맞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얘기가 되지. 그래 얼마나 더 알았지?
-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하지?
박 형사가 냉정을 되찾자 상대는 크게 웃었다.
- 하하하. 자네는 심리학 교본이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 그럴까? 내가 이제 어떻게 행동을 할까?
- 질문인가? 너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 웃기는군. 마치 난 아무런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 의지라... 네게 남은 의지가 뭐지?
- 지금은 선택지가 몇 개 없는 것 같군. 하지만 적어도 죽을 수 있는 의지는 있지.
- 죽을 수 있는 의지? 그건 의지가 아니지. 그것도 자네 의지가 될 수 없어. 장담하지.
그 말에 박 형사가 혀를 내밀고 물려하였다. 하지만 이내 그 시도는 무의미하게 끝나버렸다. 자신의 앞을 막고 있던 커튼이 열리자 재철과 상구가 보였다. 두 사람은 눈을 가린 채 의자에 앉아 포박을 당하고 있었다.
- 사.. 살려 주세요.
두 사람은 겁을 먹었는지 몸을 떨며 누군가에게 외치듯 소리를 질렀다. 박 형사는 그들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 저 녀석들은 관계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