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48화 (4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4)

- 이제 모든 것이 되었나?

텅 빈 방은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외에는 없었다. 피터가 앉아 있는 의자를 향해 음산한 기계음이 들리자 피터는 고개를 끄떡였다.

- 본체는 이미 완성해 놓았습니다. 다만 보존 처리를 할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명 공급 장치만 연결해 놓았습니다.

- 잘 했네.

- 그런데 굳이 이런 과정이 필요할까요?

- 자네는 아직 상징의 위대함을 몰라. 상징은 가끔 목숨보다 위대할 수 있지. 특히 우리같은 집단에서는.

- 참 아이러니하군요. 세습도 아니고.

- 세습이라... 자식이 있다면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 예전의 왕조들처럼. 하지만 선천적으로 자식을 갖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얘기지.

-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피터의 무덤덤한 물음에 '그'는 더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 기억은 다운로드받아 놓았지. 샘이 불타 없어진 상황에서 지금까지 연구의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테니.

- 저희 아버지는 제가 묻어주고 싶군요.

- 그래도 아버지란 말인가?

-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걸. 다만 제게는 무서웠지만 나름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 그렇게 하도록 하게.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얘기를 했다.

- 이것이 인류를 위하는 일이겠지요? 저는 그레고리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 내 기억으로는 그런 것일세.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은 없네. 목적은 목적이지. 육식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동물을 죽이지. 우리가 채식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식물을 먹어대지. 마찬가지라네.

- 비약이 심하군요.

- 비약이라기보다 비유라네. 인간은 항상 목적을 먼저 정해 놓고 정당함을 만들어 가지. 전쟁의 위대한 영웅도 알고 보면 학살자일 뿐이네. 어쩌면 인간만 위대하기 때문에 그 실험에서 벗어나 있다는 건 오만이 아닐까 하네만.

- 어쩌면 지금의 인류는 모두 실험의 대상일 뿐이겠군요.

- 자네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 그러한 과정의 일부겠지.

-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피터는 밖으로 나와서 심호흡을 했다. 결과를 위한 과정은 모두 희생이라는 논리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인류는 결과를 위한 징검다리였을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어도 결국은 죽어버렸고, 그는 최종의 결과가 되지 못하지 않았는가.

피터는 복도를 걸어가 마지막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대한 실린더에 배가 많이 부른 여인 하나와 수술 흔적이 남아 있는 여인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극판이 붙어 있는 뇌가 담겨 있는 실린더가 있었다. 그 자극판은 끊임없이 꿈틀댔다. 그리고 아래에는 진공관을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병이 있었고, 그 안에는 미세한 전류가 마치 번개처럼 벽에 붙어 반짝였다. 피터는 눈을 돌려 두 여인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 상징과 실리라. 결국 실리가 이겼군. 재미있어.

피터는 계기판을 보며 말했다.

- 얼마 안 남았군. 새로운 시대가.

피터는 실린더가 있는 곳에 커튼을 쳤다. 그리고는 그 방과 연결된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두개골이 열려 있는 시신이 하나 누워 있었다.

- 아버지. 당신이 졌군요.

피터는 자신이 처음 입양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수천 명의 고아들 사이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신을 선택한 샘은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공부의 양보다 10배는 넘게 시키며 결과를 독촉했다. 피터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모든 것이 풍족한, 그리고 가끔은 피터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두 눈이 그를 만족시켰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쓰러질 정도의 양을 던져주었을 때는 아버지가 아니가 괴물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물론 그것을 다 알기 위해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기에 현재 자신이 이만큼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물 두 살 생일날 아침은 그는 잊지 못했다. 여느 날처럼 과도한 공부에 시달린 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거울로 본 자신의 모습은 충격이 아니라 공포였다. 온통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그리고 퀭한 두 눈. 그 날 아버지는 피터에게 포르쉐를 사주었다. 피터는 그렇게 갖고 싶던 포르쉐였지만 시동을 걸고 담벼락에 들이 받아버렸다.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같은 기종의 포르쉐를 다시 사주었다. 피터는 또다시 담벼락에 들이 받아버렸다.

- 분노는 두 번으로 족하다. 이겨야 한다. 누구든. 너 자신도. 심지어 나도.

아버지는 피터에게 질책도, 실망도, 그렇다고 다그침도 아닌 그저 '훈계'를 했다. 그 날 피터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새겼다. 당신을 이기겠노라고. 그리고 지금은 그를 이기고 그의 시신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피터는 이겼다는 승자의 기쁨보다는 과정 안에서 사라져버린 아버지가 불쌍했다. 물론 그것은 미래의, 아니 어쩌면 내일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과정일지라도 저는 끝까지 가보겠습니다. 부디 평안하십시오.

피터는 그 방에서 나올 때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피터는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피터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 내고는 호출을 했다.

- 홈즈 스미스의 장례를 치를 예정이네. 준비해 주게.

다음날 신문에는 영국의 사업가 홈즈 스미스의 사망 소식에 대서특필되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 갖고 있던 홈즈 스미스의 사망은 전 세계 증시의 동반 하락을 가져왔고, 홈즈 스미스가 운영하던 버밍엄 그룹은 하루 종일 전화를 받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홈즈 스미스의 죽음으로 조명된 그의 기업은 전 세계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버밍엄 정보 통신과 휴먼 바이오사는 전 세계 특허권을 20%나 소유하고 있었고, 세계 굴지의 병원과 연구소, 버밍엄 모터스를 비롯하여 브리티시 버밍엄 뱅크와 버밍엄 호텔, 그리고 버밍엄 오일까지 세계의 모든 경제망에 버밍엄 그룹이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홈즈 스미스의 죽음으로 내부에서 새로운 경영자를 선출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긴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룹을 진두지휘하던 이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였다. 일부는 그의 죽음이 곧 버밍엄 그룹의 죽음으로 생각하고 버밍엄 주식을 파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 우리 시대에 홈즈 스미스의 노력은 우리 인류가 한 걸음 내딛는...

영국 버밍엄 근교에서 치러진 홈즈 스미스의 장례식에는 각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참석했다. 학계, 경제계는 물론 외국 정상들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피터 스미스는 조문객들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그들에게 적어도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재산에 조금도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받은 전 재산을 바탕으로 각지에 북유럽 평화 재단, 동북아 평화 재단, 남아메리카 평화 재단, 아프리카 평화 재단을 설립하고 모든 돈을 기부를 했다. 사람들은 피터가 상속 받은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 모든 재산을 재단을 만들어 기부를 한 피터에게도 찬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권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내비치고 자신은 버밍엄 그룹과 관련이 없음을 선언하였다. 물론 조직에서는 이미 내부적으로 피터의 심복 중 하나를 버밍엄 그룹의 경영자로 내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피터의 일련의 행동들은 연일 기사로 쏟아져 나왔고, 피터는 모든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하며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않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기자들이 피터에게 들은 유일한 말은 하나였다.

- 아버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업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업가가 아닙니다. 저는 일개 의사일 뿐이고, 연구원일 뿐입니다.

피터는 영국에서 장례를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피터가 버밍엄 그룹 회장의 아들임을 몰랐었다. 단지 그는 외국인 연구소 소장으로만 여겼었다. 피터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국무총리를 비롯해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그를 마중했고 피터는 환대는 감사하지만, 부담스럽다고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더욱 호감을 샀다. 피터는 사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은 채 천장을 보았다.

- 이제 새로 시작이군. 휴...

피터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보고서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 이번 날파리는 꽤나 지능적이군.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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