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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47화 (4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3)

그날 저녁 지훈에게서 전화를 받은 박 형사는 임 박사에게로 갔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보고 싶기도 했었다.

- 이 사람, 죽은 줄 알았어.

임 박사가 족발과 소주를 내려놓는 박 형사를 보고 농담을 던졌다.

- 내가 죽었으면 부고(訃告)가 갔겠지.

- 예끼. 농담도 그런 말은 말게.

임 박사는 족발과 소주를 풀어 놓으며 말했다.

- 자네가 안 오니까 내가 족발하고 소주를 못 먹지 않나!

- 사다 먹어.

- 이상하게 내가 사다 먹으면 이 맛이 안 나. 자네가 사다줘야 되거든.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는 피식 웃었다. 지훈은 곁에 앉아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빙긋이 웃었다.

- 자네 요즘 슈퍼 히어로더만.

임 박사가 족발을 먹으며 지훈에게 말했다.

- 슈퍼 히어로는요. 박 형사님께 배운 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 내가 선생이라면 이제 하산하라고 할 거야. 아마. 내가 볼 땐 박 형 한창 때보다 더 잘 나가.

- 과찬이십니다.

- 오랜만에 세 사람이 모였군. 왠지 자네들 보면 편해서 좋아.

임 박사는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 좋긴 뭐가 좋아. 일거리만 잔뜩 맡기고 가는데.

- 일 얘기는 좀 있다 하자구. 지금은 족발에 집중할 시간이야.

세 사람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자신들의 일상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 매일 오늘 같으면 원이 없겠구만.

임 박사의 말에 지훈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 자네 때문이 아냐. 이건 내 일이기도 하지. 그리고 박 형 일이기도 하고.

임 박사의 말에 지훈은 고마움을 느꼈다.

- 이 일만 풀리고, 제수씨 찾으면 맨날 이렇게 지내자구.

임 박사가 너스레를 떨며 두 사람에게 말하자 박 형사가 대꾸했다.

- 왜 이 일 끝나면 그만 두게?

- 까짓거 이게 뭐라고. 나도 자네 따라서 시골이나 내려가서 의원이나 하나 차리고 이렇게 살면 좋지 않은가.

임 박사는 마치 그들과 시골로 내려가 살고 있는 것처럼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그건 나중 일이니까 그 때 생각하고, 이것 좀 봐줘.

박 형사가 종이 뭉치들을 내밀자 임 박사는 인상을 썼다.

- 기분 좋았는데. 이 사람이 산통을 다 깨는군.

- 나중에 진짜로 그렇게 살면 되니까 지금부터 헛물켜지 말고.

임 박사는 박 형사가 내민 문서들을 보면서 하나씩 말을 했다.

- 이건 처방전. 이건 수술 후 진료서. 이것도 처방전...

영어로 대충 휘갈긴 내용들은 대부분 처방전이나 진료서였고, 간혹 논문의 일부도 있었다.

- 별거 없구만. 이게 다야? 이건 어디서 구했대? 거의 폐기하는 것들인데.

- 그래?

그러다가 주머니에서 비밀 봉투를 하나 꺼냈다.

- 아까 보니까 세인트 조지 뭐라고 쓰여 있던데. 이건 뭔지 봐줘.

종이 봉투를 건네받은 임 박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 피 묻은 거 아닌가? 이거 진짜 폐기물들만 가...

그러나 내용을 보던 임 박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눈이 점점 커졌다.

- 이거 어디서 구했나?

- 그거? 맥컬리 병원에서.

- 그래? 그럼 이거 사실이로군. 이것들이...

- 무슨 내용인데 그래. 답답하게 굴지 말고.

- 전체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건 어떤 논문이나 보고서 서문같은 거야. 잘려 나간 내용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이식에 대한 내용이야.

- 기억 이식?

- 응. 이제야 대강 윤곽이 잡히는군.

- 자네가 말하는 윤곽이 뭐야?

- 지난번에 자네가 공상과학이라고 했던 내용 있지 않나?

- 알고 있지. 시체들이 뭐 문자를 형상화한다는 그거.

- 그래. 그거. 시신을 남겨 둔 이유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결론을 내렸지.

- 그럼 정리해 보자고.

박 형사는 수첩을 꺼내서 그간의 내용을 정리해서 얘기를 했다.

- 자네 말로는 누군가 높은 사람의 장기를 사람을 배양해서 이식했다가 다시 꺼내서 가져갔고, 그 높은 사람에게 다시 주었는데, 시신들은 누군가를 경고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는 거잖아.

- 그렇지. 아 놀라운데. 정리를 참 잘 해.

- 농담하지 말고. 그럼 누가 죽였지?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말을 했다.

- 지난번에 병원에서 간호사랑 얘기하다가 나온 건데요.

- 아! 그 예쁘장하게 생긴 간호사?

- 네.

- 그런데?

- 제가 수혈을 하고 계속 자고 있다가 새벽에 일어났을 때 의사가 잠이 오지 않으면 더 잘 수 있도록 졸피뎀을 처방했다고 하더라구요.

- 졸피뎀이라...

- 그래서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간호사가 졸피뎀이 최면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미국에선 공부할 때 졸피뎀을 먹고 자리에 누워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그걸 반복해서 듣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 말에 임 박사가 무릎을 탁 쳤다.

- 맞아! 우리 과에도 그런 녀석들이 몇몇 있었지. 물론 깨어서 공부한 녀석들보다는 성적이 낮았는데... 아! 그럼...

임 박사가 또다시 부지런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 이것 역시 가정이야. 하지만 확률 높은 가정이지. 졸피뎀은 최면 효과가 있어. 뇌의 일부는 잠이 들지. 특히 기억력이나 판단력같은 건 잠드는 걸로 보고되었지. 그런데 만약 이 문서처럼 그녀들에게 기억이 주입되었다면, 그리고 최면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반복적으로 실험을 하고 행동하게 했다면, 어떤 상황에서 특정 행동을 하지 않을까?

- 어떤 상황에서 특정 행동이라니, 그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야?

- 마지막에 발견된 시신이 작은 박 처형이야.

처형 얘기가 나오자 지훈은 표정이 약간 굳었다.

- 그런데 그 마지막 시신이 가장 이상했어. 다른 시신들은 피가 모두 빠져나가 있었지.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어. 그런데 마지막 시신은 그렇지 않았지. 그냥 죽음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주 큰 차이점인 것 같군.

- 피?

- 마지막 시신은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을 선택한 거라면?

박 형사는 머릿속의 의문이 풀렸는지 탁자를 탁 쳤다.

- 그래. 마지막에 풀리지 않은 게 바로 그거였어.

박 형사는 지훈을 보며 말했다.

- 지난 번에 병원에서 내가 얘기했던 거 기억나나? 최면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 만약 그게 살인이었다면. 그런데 마지막 열쇠가 풀리지 않았지. 그녀를 그러면 누군가가 죽여야 하는데...

- 결국 자살인 거지.

- 그렇다면 결국 이건 연쇄 살인 사건이지만,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군.

박 형사의 말에 임 박사가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했다.

- 추정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자네 말처럼 의학 지식을 주입받고,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최면을 당하고,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통해 각성을 해서 한 사람을 죽이고, 다음 사람이 또다시 각성을 해서 앞 사람을 죽이고... 결국 마지막 사람은 자살을 하고.

- 이건 뭐 공상과학 소설보다 더 하군.

- 아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야. 이 종이 조각이 그걸 뒷받침하는 내용이지.

- 그럼 범인은 다 죽은 건가?

박 형사가 푸념하듯 하는 말에 임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 다들 죽어버렸다면 장기는 누가 운반했겠나? 그 놈이 아니면 운반하도록 지시한 놈이 범인이겠지. 아니 어쩌면 그녀들에게 그런 실험을 한 놈들이 진짜 범인인 거지.

- 무섭군.

박 형사는 진심으로 그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무서웠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그들은 인간 같지 않았다. 인간을 이용하고, 마음대로 없애는 그들은 자신이 볼 때는 악마보다 더 악마 같았다.

- 아 그리고 얼마 전에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에서 뇌사 환자 한 명이 맥컬리 병원으로 옮겨 왔다고 하더라구. 그런데 그녀가...

박 형사는 지훈을 한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 제수씨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던데, 제수씨는 아닌 것 같더라구. 임신한 상태가 아니라고 그러더군. 그리고 맥컬리 병원에서 제수씨랑 비슷하게 생긴 여의사도 있더라구. 그 여자는 내가 직접 봤지. 자세히 보면 많이 다른데 전체적으로 비슷하더군. 자매처럼.

- 어쩌면 그녀들도...

- 아직 정보를 더 모으고 있는 중이니까 확인해 보면 되겠지. 그리고..

박 형사는 조금은 화가 난 듯이 말을 꺼냈다.

- 그 제보자가 김환영이라는 놈이더군. 특수본에 직접 전화를 했더라구.

- 김환영이요?

- 그 녀석 최병헌 국회의원 보좌관이라는데, 김환영은 그 국회의원 사위이고, 최병헌이 딸은 맥컬리 병원 의사라더군.

박 형사의 말에 임 박사가 말을 받았다.

- 모든 게 맥컬리 병원으로 이어지는군.

- 그런데 맥컬리 병원만 드러나는 게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볼 땐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아.

임 박사는 그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맥컬리 병원이야 병원이니까 많이 드러나는 거지. 아마 거기서 하는 일은 모두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하고 연결되어 있을걸.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 지금은 머리 아프니까 맥컬리 병원만 조져야지. 미래 뭐시냐 하는 연구소는 그 다음이야.

지훈은 이 일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오히려 박 형사와 임 박사가 자기보다 이 일에 더 적극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지훈의 마음을 알았는지 박 형사가 말을 했다.

- 너는 드러나 있으니까 지금처럼 있으면 돼. 결정적일 때 같이 하면 되고. 정보 모으는 건 잡일이니까 나나 여기 임 박이 하면 되는 거고.

- 네. 알겠습니다.

임 박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한 가지만 생각하게나. 제수씨를 구하는 일만. 어쩌면 우리가 모든 것을 밝혀내도 그냥 묻힐 수도 있는 사건이야.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 너무 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박 형사와 지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박 형사나 지훈이 느끼기에도 이 일은 자신들의 능력 외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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