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45화 (45/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8. 삶과 죽음의 경계(1)

8. 삶과 죽음의 경계

지훈은 그 사건 해결 이후로 폭력계의 아이콘처럼 떠올랐다. 경찰서뿐만 아니라 어둠의 세계에서도 지훈은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지훈은 폭력 사건이나 조폭과 관련된 사건이 터지면 항상 먼저 출동을 했고, 그런 지훈을 보고는 구 반장과 동료들도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아니 조직 폭력배들도 지훈이 나타나면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마치 사건의 경과를 보고하듯이, 마치 선생님께 저 녀석이 더 잘못했으니 혼내 주십시오라는 투로 말을 하곤 하였다. 지훈은 그런 그들에게 사건이 경미하면 한바탕 훈계와 뒤통수치기 한 방으로 끝냈고, 사건이 중하면 몽땅 쓸어서 처리했다. 지훈은 폭력계에서는 과거의 박 형사보다 뛰어나다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될 무렵 지훈의 파트너로 성준이 오게 되었다.

- 너 정신 못 차렸구나.

성준을 보자 지훈이 한 마디 했다.

- 형님하고 다니면 칼빵은 안 맞는다는 소리가 자자해서요.

- 그게 아니고, 너 정보과 일은 안 하냐?

성준이 은밀한 말투로 얘기를 했다.

- 사실은 저 정보과 소속이에요. 여기는 파견이죠.

- 파견? 넌 파견을 그렇게 자주 나오냐?

- 삼촌께 부탁을 좀 했죠. 삼촌 역시 형님하고 같이 다닌다니까 걱정없다면서 보내 주시던데요.

- 아.. 조 반장님도 오다가다 인사만 드렸는데, 소주라도 한 잔 해야 하는데...

- 그러게요. 조만간 같이 한 번 뵈요.

- 그래. 그러자.

- 오늘은 어디죠?

- 응? 요즘은 좀 잠잠해... 그냥 관내 순찰이나 한 번 돌려고.

- 같이 가시죠.

밖으로 나올 때 구 반장은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 요새는 잠잠하니까 좀 쉬어. 뭘 그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녀?

- 앉아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서요. 그리고 신참도 왔고.

지훈은 성준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이 관내를 돌 때 성준이 물었다.

- 그 녀석들에 대한 정보는 많이 모으셨어요?

- 박 형사님께서 동분서주하고 계시지. 나보고는 여기서 정보를 모으거나 하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그러시네.

그 말에 성준이 주머니에서 접힌 A4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지훈에게 건네주었다.

- 이게 뭐야?

- 독일하고 영국에서 온 보고서 내용이요. 그리고 제가 조사한 내용도 있구요.

지훈은 그 종이를 받고는 한 쪽 구석으로 차를 세웠다. 종이의 내용을 읽던 지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 안나 성의 등록?

- 네. 독일에서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전산화되어 있었는데요. 독일에 있는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본 내용인데요.

- 한국으로 치료를 하러 떠난 안나 성은 15세?

- 네. 분명 임 박사님 말씀으로는 한 30세는 되어 보였는데.

- 그럼 조각가는?

- 안나 성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데요. 이름이 같은. 그런데 그녀는 벌써 80이 넘었다네요. 지금은 사망 상태구요.

- 그럼 열다섯의 안나 성이라.

- 독일 경찰에도 연락을 해 봤는데, 열다섯으로 등록된 동양계 여자애들이 외관상으로는 30대로 보이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다고 하더라구요.

- 그런데 안나 성만 왜 한국에서?

- 장기를 적출당했죠. 제가 생각해 볼 때는 그녀는 장기를 빼내기 위해 한국으로 옮긴 건 아닌가하고 생각돼요. 아니면 한국에 있었는데 독일에 등록을 했다던가.. 뭐 그런 것 같아요.

- 임 박사님 말하고 연결해 보면 누군가의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이라는 거군. 아! 뇌.

지훈은 무릎을 탁 쳤다.

- 그래, 안나 성은 뇌였어. 그래서 뇌였군.

지훈은 혼잣말을 하다가 전화기를 꺼내 임 박사에 전화를 걸었다.

- 어이. 작은 박. 어쩐 일이야?

- 그동안 잘 지내셨죠?

- 잘 지내긴. 박 형도 안 오고 심심하지.

- 저라도 찾아봬야 하는데...

- 아냐. 자네 활약은 여기서도 잘 듣고 있어. 전설의 홍길동이 되었던데.

- 아닙니다.

- 그래, 무슨 일이야?

-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 그래 뭔가?

- 15살짜리 여자애가 30살로 클 수 있습니까?

- 음.. 글쎄 말단비대증이라면 계속 클 수 있지. 그게 왜?

- 아뇨. 전에 뇌를 적출당한 안나 성이 독일에는 15세로 등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요.

- 뭐.. 뭐라고? 15세?

- 네.

- 음... 아직 검증은 안 된 거지만, 인간도 배양할 수 있지. 성장 호르몬을 맞으며 빨리 자라게 할 수는 있어. 이론적으로는. 다른 동물들처럼.

- 그럼 배양한다면 가능한 건가요?

- 음.. 맞네. 아니 이론적인 게 아니라 이미 실행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안나 성이라면 그 무균 상태나 다름없는 여자였지. 그렇게 무균 상태라면 배양되었다고 보는 게 맞지. 그럼 뇌도 백지 상태인데, 왜... 아니 그게 아니군... 안나 성은 몸은 안나 성인데, 뇌는 다른 사람의 뇌겠군. 이런...

임 박사는 목소리가 떨렸다. 마지막에는 거의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 박사님, 왜 그러십니까?

- 이 일을 저지른 놈들은 아주 나쁜 놈들이구만. 고얀 것들. 사람을 도구로 만들다니....

임 박사의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지훈은 침묵을 했다.

- 조만간 박 형하고 같이 한 번 오게나. 이제 어느 정도 알겠네.

- 네? 내용을 아시겠다구요?

- 음.. 나도 좀 더 알아보면 더 확실해지겠지.

- 네. 알겠습니다.

지훈은 전화를 끊고 성준이 준 정보의 나머지를 읽었다. 나머지는 거의 사실 확인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딱히 특별한 정보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을 잊지 않고 정보를 찾고 확인해 준 성준이 고마웠다.

- 고맙다.

- 고맙긴요. 제가 형사가 된 건 삼촌 때문인데 계속 형사를 하겠다고 맘먹은 건 박 형사님하고 형님 때문이에요.

지훈은 성준의 말에 겸연쩍게 웃었다. 지훈은 성준과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웠다. 성준이 폭력계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중 지훈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 잠깐.

- 왜 그러세요?

- 저기 저 녀석 보여?

- 누구요? 빨간 점퍼요?

- 아니 그 옆에 검은 잠바.

- 네. 왜 그러시죠?

- 저 자식 이상해. 아까 내가 차 세울 때도 저기 서성대고 있었거든. 그런데 지금 벌써 20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여전히 저기서 서성대고 있어.

- 그게 보이세요? 친구 기다리는 거겠죠.

- 아냐. 저 녀석 허리를 숙이고 가슴에 뭔가 묻고 있는 것 같아. 잠깐만.

지훈은 성준을 뒤에 두고 그 검은 점퍼를 입은 사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 때 그가 서성거리던 골목 안에서 웬 여자와 남자가 팔짱을 끼고 나왔다. 지훈은 순간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빨리 몸을 날려 검은 점퍼의 사내를 덮쳤다. 검은 점퍼의 사내는 가슴 안에서 칼을 꺼내 나오는 두 사람에게 휘두르려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덮치는 걸 느끼고는 그대로 그를 안고 쓰러졌다. 한 손은 칼을 든 채 바닥으로 넘어지자 지훈은 팔목을 발로 밟고 다른 무릎으로 어깨를 눌렀다.

- 이 새끼. 어디서 칼질이야!

그 남자는 뜻밖에도 아무 힘이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호리호리한 몸에 싸움같은 건 모르는 남자처럼 보였다.

- 아.. 악. 여.. 여보.

여자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터져 나왔다. 지훈은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얼어붙은 채 꼼짝도 못했고, 그 옆에 서 있던 남자는 놀라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뒤에는 성준이 서서 그를 붙잡았다.

- 이.. 이거 왜 이러세요?

- 저 여자랑 같이 계시던 분 아닌가요? 그럼 참고인이니 자리를 뜨면 안 됩니다.

지훈에게 눌려 있던 남자는 누운 채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

- 이년아. 너 죽고 나 죽자. 남자한테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남자의 고함 소리에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준이 뒷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 여긴 위험하니까 비키십시오.

그러면서 전화기를 꺼내 상황실로 연락을 했다. 지훈은 제압했던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는 지훈이 풀어주자 여자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지훈이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 이 개같은 년아! 애들이 굶는지 아픈지도 모르고 남자 새끼한테 미쳐서...

남자는 절규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그 소리에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경찰차가 도착해서 경찰들에게 세 사람을 인계하고 지훈과 성준이 자리를 떴다.

- 형님 어떻게 아셨어요?

- 어떻게 알다니. 보니까 보이더만.

- 저는 눈이 병신인가요? 안 보이던데.

- 자세히 보면 보여. 너도 짬을 더 먹으면 알 거야.

지훈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웠던지 혼자 피시시 웃었다. 성준은 그런 지훈을 보며 놀랐다. 폭력계에 있는 박지훈 형사는 싸움으로만 사람을 잡는 게 아니라 추리로도 잡는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성준은 지훈에 대한 소문이 하도 요란해서 반신반의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으로 보니 소문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어쩌면 지훈은 자신이 전에 알던 선배가 아니라 최고의 형사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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