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7. 비밀의 시작(7)
박 형사는 한수가 준 통화 내역서를 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일개 병원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거 맞는 거야?
- 그래. 발신 전화는 꽤 되는데, 수신 전화는 몇 개 안 되더만. 수신 전화는 거기 보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되니까.
- 김환영... 최병헌 국회의원 보좌관이라...
- 더 웃긴 건 화영 다방이야. 발신하고 수신이 뭐 그리 많은지. 커피만 시켜 쳐먹나.
한수가 전화 번호 명단을 보면서 혀를 찼다.
- 김환영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나?
- 알 수야 있지. 근데 그 녀석이 왜?
- 이 자식 전화가 사건 해결 전날하고 그 전날 왔었거든.
- 그렇긴 한데. 보좌관을 터는 건. 하긴 뭐 어렵진 않겠지만, 돈이 드니까 문제지.
- 그래도 알아봐줘. 중요한 거니까.
박 형사가 얘기를 하자 한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이봐. 여긴 우리가 심부름을 해주는 데야. 자네는 심부름을 해 주는 사람이고.
- 알았으니까. 일단 이거나 알아봐줘. 오늘 일은 다 마치고 올 테니까.
- 알았어. 자식. 정색하긴.
박 형사가 사진기를 들고 나가자 한수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 김환영이라고 있는데, 한 번 털어봐. 국회의원 비서관이야.
상대가 뭐라고 하자 한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그 자식이 다른 구멍에 넣고 다니니까 털라는 거지. 내가 무슨 정치인이냐? 새끼.
한수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박 형사가 하는 일이라는 게 작은 일 같아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 그저 나처럼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게 맘 편하지. 에이..
박 형사가 밖으로 나와 미라클 모텔 쪽으로 가는 길에 재철로부터 전화가 왔다.
- 접니다. 형님.
- 그래, 뭐 알아낸 거 있어?
그러자 재철은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일 수도 있구요.
- 뭔데?
- 다른 게 아니라 친구 녀석한테 주신 사진 있지 않습니까. 그걸 보여주니까 그 녀석이 깜짝 놀라더라구요. 니가 왜 여의사 사진을 갖고 있냐면서요.
- 여의사 사진?
- 네. 그 녀석이 전에 예쁜 여의사가 있다면서 기회만 되면 꼬셔본다고 했었거든요. 근데 그 녀석이 하는 일이 병원에서 잡일하는 거라 내가 꿈깨라고 몇 번 면박을 줬는데요. 그 녀석이 사진을 보자마자 놀라면서 그 여의사랑 아냐고 묻더라구요.
- 혹시 지금도 근무한대?
- 그 녀석 말로는 아까도 봤다던데요.
- 그래? 알았어. 또 다른 건 없어?
- 그리고 이건...
- 감추지 말고 말해.
- 그게 아니구요. 친구 녀석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병원에서 잡일 하는 녀석인데, 병실 돌아다니면서 수술한 도구나 뭐 이런 거 수거하든요.
- 결론만 말해.
- 네? 아.. 그게 그 녀석이 얼마 전에 뇌사 상태로 병원에 들어와서 폐 이식한 여자가 있는 그 여자도 의사랑 비슷하게 생겼었다고 그러더라구요.
- 뇌사 상태?
- 네. 그 녀석 말로는 앰뷸런스에서 내리는 그 여자를 봤는데 그 때도 여의사랑 똑같이 생겨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더라구요.
재철의 말에 박 형사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박 형사는 입 안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 혹시 임신한 상태였다고 그러던가?
- 네? 그건 모르겠는데요. 형사님도 여자 볼 때 얼굴이나 가슴을 보지 누가 배 나왔나 먼저 보나요?
- 중요한 일이니까 머리를 쥐어 짜내서라도 알아내. 임신했었는지 아닌지.
- 그게 제가 본 것도 아니고...
- 그럼 내가 가서 물어볼까?
- 아.. 아닙니다. 제가 물어봐야죠. 그 녀석의 머리를 뒤집어서라도. 그럼요.
박 형사는 전화를 끊고 한쪽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지금 들은 내용을 메모했다. 납치한 여자를 데려다 병원에서 폐 이식 수술을 할 만큼 대범한 놈들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건 일단 둘째 문제이고, 병원에 지훈의 와이프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단순히 닮은 것인지 아니면 그녀도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박 형사는 일단 한수가 얘기한 현장에 가서 불륜 커플 사진을 찍고 나왔다. 한수의 일도 중요하지만, 일단 자신이 그 쪽과 관계없이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박 형사는 돌아오는 길에 재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철은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 알아 봤어?
- 그게요. 그 녀석이 끝나면 만나려고요. 일하는 중에 가서 꼬치꼬치 묻기가 그래서요.
재철은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 형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했다.
- 어디야?
- 저요? 전 맥컬리 병원 앞에 있는 햄버거 가게에 있는데요.
- 알았어. 내가 금방 그리로 갈 테니까 기다려.
- 아.. 아니요. 제가 지금 당장 가서...
-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짜식. 쫄기는.
- 네. 알겠습니다.
박 형사는 사무실에 들러 한수에게 카메라를 던져주었다.
- 이거 뭐야?
- 오늘 찍어 오라며? 그 신문 기잔가 뭔가.
- 아! 벌써 찍었어? 역시 빨라.
- 아무튼 나 나갈 테니까 문 잠그고 가.
- 박 형. 소주 한 잔?
한수가 손을 꺾으며 말했지만, 박 형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오늘 바빠. 나중에.
박 형사가 나가자 한수는 카메라를 캐비닛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 자식. 더럽게 힘들 게 사네.
박 형사가 밖으로 나와 맥컬리 병원 앞에 있는 햄버거 가게로 갔다. 거기에는 콜라 하나만 시킨 채 앉아 있는 재철이 보였다. 박 형사는 재철 근처로 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철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 어떤 새끼... 아!
박 형사가 뒤에서 웃고 있자 재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오셨어요.
- 아직 친구는 안 끝났나 보지?
- 네. 근데 조금 있다가 나온다고 방금 전화 왔어요.
- 그래? 오늘 수고도 했는데 고기나 먹으러 가야지.
- 수.. 수고는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그리고 그 정보는 모두 친구한테 얻은 건데요. 뭐.
- 그러니까 너랑 친구랑 같이.
- 네?
- 싫어?
- 아.. 아뇨. 싫긴요.
재철은 고개를 돌리며 입으로 구시렁거렸다. 그 모습이 거울에 비쳐 알고 있었지만 박 형사는 모른 척 했다. 그러며 툭 한 마디 던졌다.
- 직접 해. 거울로 다 보이니까.
그러자 재철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걸 보고는 사색이 되어 얼굴이 굳었다.
- 걱정마 임마. 오늘은 고생했다고 고기 사주는 거니까.
조금 있으니 재철의 친구가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재철 근처로 다가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옆에 있는 박 형사는 보이지 않는지 급하게 말했다.
- 저기.. 저기 저 여의사. 봐.. 똑같지 않냐?
재철 친구의 말에 박 형사도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지훈의 와이프와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 진짜네? 똑같은데? 상구야! 저 여자가 그 의사야?
그러다가 박 형사를 돌아보고는 입을 막았다.
- 그.. 그게...
- 너 왜 이래. 푸하하하.. 너 표정 병신같아.
상구가 재철을 보며 웃자 상구의 옷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상구는 아무 것도 모른 체 재철을 보고는 계속 웃었다.
- 너 옛날에 병구한테 맞을 때 모습이야. 하하하하.
박 형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재철을 보았다. 괜찮다고 고개를 끄떡였다. 재철은 표정을 풀고 창밖을 보며 말했다.
- 근데 사진하고는 조금 다른데?
- 달라? 난 같은 사람같은데?
여의사는 햄버거 가게 윈도우를 지나 햄버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했다. 두 사람이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어서인지 그녀 역시 그들 쪽을 쳐다보았다. 여의사와 눈이 마주친 상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 씨바. 봤어. 아까도 눈 마주쳤는데..
재철 역시 고개를 돌렸다.
- 나.. 난 못 봤을 거야.
박 형사는 이 놈들에게 정보를 알아오라고 맡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박 형사는 마치 두 사람의 선생인양 두 사람의 귀를 잡고 밖으로 나왔다.
- 아....
두 사람이 동시에 비명같은 소리를 지르며 나가자 여의사는 풋하고 웃었다.
- 당신 뭐야! 왜 남의 귀를...
상구가 박 형사에게 그렇게 따지듯 물을 때 재철이 먼저 나서서 친구의 뒤통수를 갈겼다.
- 이 자식이. 형사님한테... 미쳤나..
재철이 화를 내자 상구가 어리둥절하여 재철을 쳐다보았다.
- 너 이 새끼, 왜 그래?
- 내.. 내가 말한 그 혀.. 형사님..
그러자 상구도 놀라서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자네 말이 맞는 거 같군. 그런데 비슷하게 생겼는데, 많이 달라. 일단 여의사 키가 더 크고, 가슴도 더 크지. 그리고 사진 속 얼굴은 점이 없는데, 저 여자는 눈 아래 점이 있지. 그리고 코도 사진 속 여자보다 길어. 또 턱도 저 여자는 아래쪽이 각이 조금 져 있는데, 사진 속 여자는 완전한 계란형이지.
박 형사의 말에 상구가 놀라서 물었다.
- 그.. 그걸 어떻게 순식간에..
- 니들처럼 얼굴하고 가슴만 보면 안 보이지. 고기 먹으러 가자.
박 형사가 그렇게 말을 하자 상구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진짜 탐정 같아요. 와... 졸라 멋있다.
박 형사의 모습을 본 재철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 싸움만 잘 하시는 줄 알았는데, 대단하시네요.
박 형사가 피식 웃으며 그 둘을 차에 태웠다. 가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마치 형사 놀이라도 하듯이 여자의 과거와 현재를 맘대로 추론하기 시작했다. 박 형사가 시끄러우니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