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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41화 (4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7. 비밀의 시작(5)

박 형사가 전화를 끊자 재철은 차렷 자세로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박 형사는 재철을 보고 말했다.

- 차 탈래?

- 네. 그럼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재철은 부리나케 달려가 차 뒷문을 열었다. 박 형사는 앞문을 열고 타면서 말했다.

- 옆에 타.

차 문을 열고 있던 재철은 얼른 뒷문을 닫고 박 형사 옆 조수석에 앉았다. 박 형사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했다. 재철은 안절부절 못했다. 며칠 전에 신아 맥컬리 병원에 대해 조사해 보라는 전화를 받았지만, 그냥 거기서 일하는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해 본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예쁘다니, 여의사 중 하나가 정말 죽이는데 꼬셔볼려고 한다느니 하는 시답지 않은 얘기만 잔뜩 나눴기 때문이다.

- 저....

재철이 먼저 입을 열자 박 형사가 말했다.

- 응. 얘기해.

박 형사가 조용히 얘기하자 재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까 자신을 밟고, 큰 형님에게 전화했을 때도 분명히 조용한 말투였다.

- 제가 알아보려고 했는데요. 그게 친구 녀석이 거기서 일을 해서요. 그런데 그 녀석이 자꾸 딴 말만 해서요. 그게...

박 형사가 고개를 돌려 재철을 한 번 쳐다보았다.

- 누가 뭐랬나?

- 네? 아... 아뇨.

두 사람은 다시 침묵했다. 재철은 이 침묵이 자신을 질식시킬 것 같았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고 혼을 냈다면 오히려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한강대교를 넘고 있었다.

- 제가 내일은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겠습니다.

박 형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겁나냐?

- 오줌 쌀 것 같습니다.

- 여기다 싸면 죽는다.

- 네? 네...

재철은 사타구니를 꾹 쥐었다. 박 형사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피식 웃었다. 한강대교를 건너 얼마를 더 가자 심부름센터 사무실이 보였다. 대강 주차를 해 놓고 사무실로 올라가자 한수가 책상 앞에서 졸고 있었다. 박 형사는 책상을 한 번 걷어찼다. 그러자 한수가 펄쩍 놀라 일어나다 의자 옆으로 넘어졌다.

- 일어나.

- 아! 깜짝이야. 새끼. 어? 넌 왜 여기에?

한수가 재철을 보고 놀라 물었다. 재철은 입을 오므리고 눈짓으로 박 형사에 대해 뭐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얼굴을 폈다 접었다 했다.

- 너 미쳤냐? 왜 얼굴 가지고 지랄이야?

재철은 한수에게 말을 하려는 것을 포기하고는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박 형사는 손가락으로 그를 불러 소파에 앉혔다.

-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중요한 거니까 잘 들어. 알았지?

박 형사가 조용히 얘기하자 재철은 잔뜩 겁을 먹은 채 고개를 끄떡였다. 한수는 그런 재철이 신기했는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으며 말했다.

- 너 왜 그래? 불알이 확 쪼그라들었나 보네.

그러자 재철은 한수를 보며 잠깐 인상을 썼다가 박 형사를 보고 다시 얼굴을 풀었다.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아주 중요한 거니까 잘 들어.

- 네. 알겠습니다.

재철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채로 대답했다.

- 오호.. 이 녀석 봐라. 나한테는 개기는 녀석이..

한수가 옆에서 끼어들자 박 형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 한수야, 시장가서 통닭 한 마리랑 소주랑 맥주 몇 병 사와.

한수는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 뭘 사와. 시켜 먹으면...

- 지금 당장!

박 형사가 한수에게 강하게 말하자 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어.. 새끼... 졸라 무섭게 말하네.. 알았어. 갔다오면 되잖아.

한수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박 형사는 다시 재철을 보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냈다.

- 잘 간수해. 없어지면 너도 세상에서 없어질 테니까.

- 네? 네. 그런데 이건...

- 맥컬리 병원에 가서 환자 한 명 한 명 확인해 보는 거야. 이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친구한테 물어봐도 되고. 단 이 사진 속 인물에 대한 정보는 나한테만 알리는 거야. 너나 친구 녀석이 이 정보를 떠벌리고 다니면...

박 형사는 낮고 조용한 말투였다. 그런 말투 때문인지 재철은 더 겁을 먹었다.

- 네. 두... 둘 다 세상에서 없어지죠.

- 맞았어. 잘 알아듣는군.

- 네.. 제가 원래 동네에서 똑똑하다고...

- 닥치고. 그리고 또 하나 더.

- 네. 또 하나 더.

- 거기 이식 수술을 많이 하거든.

- 이식 수술이요? 간이나 콩팥 이런거요?

- 그래. 그 수술 장부를 적어오거나 아니면 가져오거나.

- 훔.. 훔치면 되는 겁니까?

박 형사는 주먹을 들어 재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 훔치란 얘기는 안 했어. 가져오라고 했지.

- 네. 그.. 그렇죠. 가져오라고 하셨죠.

- 그래. 알겠지?

두 사람이 대화를 하던 중에 한수가 닭 봉투와 술을 탁자 위에 놓았다.

- 이건 왜?

- 왜긴, 마시려고 그러지. 오늘 얘가 나한테 험한 꼴을 당했거든.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러자 재철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닙니다. 절대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 아냐. 어차피 내 일 도와주는 데 고마워서 그래. 자 한 잔 받아.

박 형사는 글라스 세 개에 맥주와 소주를 섞었다. 그리고 한 잔씩 돌렸다.

- 오늘은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괜찮지?

박 형사가 재철에게 말하자 재철은 고개를 끄떡였다.

- 니가 웬일이래? 여기서 술을 다 하고.

- 나는 마시면 안 되냐?

박 형사와 한수, 그리고 재철은 맥주와 소주를 섞어 폭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박 형사는 고맙다면서 재철에게 술을 자주 권했고, 술이 떨어지자 한수가 가서 술을 더 사왔다. 어느 정도 술을 마시자 세 사람은 같이 화장실을 갔다. 거기서 술에 취한 재철이 오줌을 누면서 박 형사에게 말했다.

- 끄윽.. 아까 그 사진 말입니다. 기가 막히게...

그 순간 박 형사가 재철을 걷어찼다. 재철은 오줌을 누다가 그대로 구석에 처박혔다. 같이 오줌을 누던 한수는 놀라서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야! 왜 그래?

박 형사는 옆으로 쓰러져서 여전히 오줌을 지리고 있는 재철에게 다가갔다.

- 내가 아까 뭐랬지?

재철은 술이 확 깨는지 말을 더듬으며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아... 아무한테도...

- 그래. 기억하고 있군.

- 저는 하.. 한수 형하고..

- 잘 기억해. 오직 나한테만. 오케이?

- 네.. 아.. 알겠습니다.

박 형사는 재철을 일으켜 세우면서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 앞으로 술 마시지 마. 술 마시다 걸려도 없어진다.

- 네? 네..

그 말을 들은 재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수는 술에 취했는지 두 사람에게 '미친 것들 껴안고 지랄이야.'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박 형사는 화장실 밖으로 나와서는 한수에게 소리쳤다.

- 나 간다.

그러나 한수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재철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나오다가 박 형사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 저... 저 새끼 악마잖아. 씨발... 악마한테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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