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7. 비밀의 시작(3)
박 형사는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지난밤에 들은 얘기도 얘기려니와 이제 자신들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맥컬리 병원을 조사하는 일에 착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사건과의 연관성은 전혀 없을뿐더러 자신은 현재 형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계가 있었다. 박 형사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정보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정보원이라고 해야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수에게 소개받거나 한수의 정보원이었다. 박 형사가 보아온 한수의 조직원들은 대부분 조직 똘마니이거나 아니면 동네 양아치 수준이었다. 한수가 심부름센터를 차린 이유는 하나였다. 뒷조사를 통해 돈을 버는 것. 박 형사는 그런 것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사실 심부름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란 대개 법의 감시망을 벗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들을 이용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바닥에서 뛰는 애들이기 때문에 의외로 얻어걸리는 정보가 꽤 있긴 했지만 그것이 모두 연예 찌라시 수준의 이야기이거나 조잡한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박 형사는 한수에게 소개받은 정보원 하나에게 맥컬리 병원에 대한 정보를 얻어오라고 얘기하고는 지훈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박 형사가 지훈을 만났을 때 임 박사에게 들은 정보를 얘기해야 하나 갈등을 했지만, 현재는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얘기를 하기로 했다.
- 그럼 혜민이가 열성 유전자가 발현된 사람이라는 겁니까?
- 임 박사말로는 그렇다는군.
- 음... 혜민이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건 사실이었죠. 아니 어쩌면 저한테 시집을 오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명한 여자가 되었을 겁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처형이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었죠.
- 그렇군.
- 저는 어제 간호사한테 졸피뎀과 관련된 얘기를 들었습니다.
- 졸피뎀? 아! 그 수면제!
지훈이 하는 얘기를 들은 박 형사는 수첩에 내용을 적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그렇다면 최면으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기억을 심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 행동을 강요한다면...
-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그녀들이 모두 최면에 걸려서 어떤 일을 저질렀다면?
- 어떤 일이라뇨?
- 음...
- 아냐. 너무 비약이 심한 생각이야. 아무튼 그것도 좀 더 확인해 봐야겠군.
그 때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난밤에 죽을 가져다 준 간호사였다.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숨이 찬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박 형사와 같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말을 했다.
- 조성준 씨가 깨어났어요. 깨어나면 말씀해 달라고 하셔서...
- 그래요? 다행이네요. 고맙습니다.
지훈이 대답을 하자 간호사는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 뭘요. 근데 면회는 좀 더 있다가 된다고 하더라구요.
- 네. 감사합니다.
간호사가 나가자 박 형사가 지훈을 보며 말했다.
- 저 간호사가 자네를 좋아하는군.
- 아닙니다. 모든 환자에게 친절한 간호사입니다.
지훈이 조금 당황하며 말을 하자 박 형사는 피식 웃었다.
- 자네나 나나 다른 사람은 잘 보면서 자신의 일은 잘 못 보지.
-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 알고 있네. 잘 알고 있지.
박 형사가 고개를 끄떡였다. 박 형사 역시 아내를 잃고 다른 형사들이 여러 차례 재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지만, 모두 무시해버렸던 것이었다. 하물며 아내가 실종 상태인 지훈에게 그런 감정은 사치라는 걸 박 형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잘 알아두게. 이게 나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좋은 것일 수도 있지.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면 그 호감에 최대한 배려를 해 주게나. 형사라면 어쩔 수 없는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해야 해. 그렇게 하면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기 마련이지.
- 네. 하지만 사람을 이용하는 건...
- 사람을 이용하라는 얘기가 아니야. 다른 이에게 배려를 하면, 그 사람들은 그 이상의 것을 해 준다는 말이야. 그 대상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아이이건, 어른이건 간에 말야.
- 네.
지훈과 박 형사는 대화를 나누다가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밥을 먹고 올라오는 길에 음료수를 사서 간호사실에 들렀다. 지훈은 오후에 퇴원하라는 말을 들었고, 그 간호사는 야간 근무였으니 이제 퇴근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보답을 하려면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훈이 음료수를 사들고 갔을 때는 이미 간호사들이 교대를 마친 후였기 때문에 지훈은 그 간호사에게 음료수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로 돌아왔다. 지훈 역시 가져다 놓은 옷을 갈아입고, 의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병실 문이 열리며 사복으로 갈아입은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 고맙습니다. 음료수 잘 마실게요.
- 별 말씀을요. 저야 말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박 형사는 모른 척 하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 아! 이제 면회 가능하다고 하시더라구요. 그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 퇴근하시는 길일 텐데 번거롭게 오셔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 아니에요.
간호사의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 밖에서 '야! 빨리 나와!'하는 소리가 들렸고, 간호사는 안절부절 못하며 인사를 넙죽 했다.
- 안... 안녕히 가세요.
간호사가 90도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다 닫히지 않았는지 밖에서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번호 받았어? 어?
- 몰라. 언니 때문에... 몰라..
그러면서 구두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멀어져갔다. 박 형사는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 전화번호라도 주지 그랬나.
- 네? 후훗.
- 아무튼 성준이가 깨어났다니 가보세. 물어볼 말도 있고.
- 그러시죠.
두 사람은 성준이 옮겼다는 일반 병실로 갔다. 병실 안에는 조 반장의 누나인 성준의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이 성준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을 때, 성준의 어머니는 지훈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지훈을 손을 덥석 잡았다.
-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성준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지훈에게 고마워했다.
- 아.. 아닙니다. 어머니. 성준이가 저였더라도 같았을 겁니다.
- 고맙습니다.
성준의 어머니가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하나씩 권했다. 지훈은 성준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 괜찮냐?
그러자 성준이 힘겹게 웃으면서 말했다.
- 아직 옆구리가 좀 쑤십니다.
그러자 박 형사가 웃으며 말했다.
- 고 형사는 저승사자랑 하이파이브했다더군.
그러자 성준이 웃으며 말했다.
- 저는 염라대왕과 악수했습니다.
- 농담은.... 다 나은 것 같군.
박 형사와 지훈에게 음료수를 준 성준의 어머니는 아까 조 반장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전화를 한다고 밖으로 나갔다. 성준의 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자 성준이 지훈을 보며 말했다.
- 고맙습니다. 선배님.
- 고맙긴. 몸 조심하라니까.
- 그러게요. 워낙 순식간에 찔리는 바람에 누가 찔렀는지도 못 봤어요.
- 아무튼 자네도 강력계에 와서 기본 코스는 다 밟는군.
박 형사의 말에 성준이 웃으며 말했다.
- 제가 그러면 지훈 선배보다 강력계 윗단계네요. 선배는 한 번도 칼에 안 맞았으니까요. 하하하.
성준의 시덥지 않은 농담에 지훈은 고개를 끄떡였다. 박 형사나 지훈이 무언가를 물어보려할 때 먼저 성준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