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7. 비밀의 시작(2)
지훈은 새벽에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두운 방엔 가습기 분무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상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자 무언가 선에 걸린 것처럼 뒤에서 자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지훈이 돌아보자 자신의 팔에 꽂혀 있던 링거가 침대에 걸려 있었다. 지훈은 링거를 이동대에 걸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지훈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본 간호사 하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머리를 뒤로 묶은 깜찍하게 생긴 간호사였다.
- 조금 더 쉬셔야 해요.
지훈이 간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 아까 낮에 왔던 형사는 아직 중환자실에 있나요?
- 네. 아직 깨어나지 않으셔서요.
- 그렇군요.
- 다시 침대로 가서 누우세요.
지훈은 간호사를 보며 배를 부여잡고 말했다.
- 배가 고파서요.
지훈의 말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간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하루 종일 굶으셨으니까요. 그럼 들어가 계세요. 아래 죽집이 있으니까 시켜 드릴게요.
- 네. 고맙습니다.
지훈이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간호사는 호들갑스럽게 데스크 쪽으로 왔다.
- 아까 수술실에 들어갔던 성미 언니가 그러던데 저 형사님 정말 멋있었대.
그러자 차트를 정리하던 다른 간호사가 말했다.
- 멀리서 봐도 딱 니 이상형이던데. 키 크고, 남자답고.
- 그것도 그런데, 그 말 멋있지 않았어? 내 피 아끼느라 저 녀석 죽으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 완전 남자다워.
- 꿈 깨시고, 아까 뭐라고 얘기하던데.
- 아참. 죽 시켜드리기로 했거든.
- 뭐? 참 나.
간호사는 죽 집에 전화를 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결혼은 했을까?
- 너 그건 못 들었구나? 저 사람 주머니에서 여자 머리핀이 나왔대.
- 여자 머리핀? 그게 뭐?
- 변태이거나 아니면 여자 친구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지.
- 그런가? 저런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위기에 빠져도 목숨을 바쳐서 구하겠지?
- 얘가 점점... 헛소리하지 말고 병실이나 한 번 돌아보고 와.
- 에이. 언니는 산통 다 깨고 있어.
머리를 묶은 간호사가 병실을 다 돌고 왔을 때 죽이 도착했다. 간호사는 간호사실 안으로 들어가서 그릇을 하나 깨끗하게 씻고는 그 안에 죽을 정성스럽게 담았다.
- 열녀 나셨네.
- 환자에게 친절한 거야!
간호사는 죽을 쟁반에 받치고 지훈이 있는 병실로 갔다. 지훈은 불을 켜 놓고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오자 지훈이 일어서려 했다.
- 그냥 계셔도 돼요.
간호사는 식판을 들어올리고는 그 위에 죽을 놓았다.
- 감사합니다. 새벽에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 아니에요.
지훈이 숟가락을 들자 간호사는 그 옆에 서서 지훈이 먹는 걸 지켜보았다. 지훈이 어색하게 기침을 하자 간호사는 깜짝 놀라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더니 황급히 뒤돌아 나가면서 말했다.
- 계속 주무셔서 잠 안 오시면 말씀하세요. 아까 선생님께서 수면제 처방하고 가셨으니까요.
- 네. 감사합니다.
그 순간 지훈은 수면제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 저, 그런데요.
지훈이 나가는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잘못한 일을 들킨 것처럼 놀라서 지훈을 돌아보았다. 아직 빨개진 얼굴이 돌아오지 않아 무척이나 귀엽게 보였다.
- 혹시 수면제의 종류가 졸피뎀인가요?
지훈의 말에 신기하다는 듯이 지훈을 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 아! 형사님이시지. 맞아요. 졸피뎀.
- 그렇군요. 그거 중독성이 강하다던데.
- 자주 투여하면 중독성이 생기는데, 한두 번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 그렇군요. 그거 먹으면 의식없이 막 돌아다니고 그러기도 한다던데요?
지훈의 질문이 계속되자 간호사는 안으로 들어와서 얘기를 시작했다.
- 부작용 사례로 그런 게 있긴 하죠. 그런데 외국에서는 수면제보다 더 많이 쓰이는 데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 더 많이 쓰이는 데요?
지훈의 질문에 간호사는 신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 저도 수업 시간에 들었던 내용인데요, 그게 수면 유도제라서 가수면 상태가 되면 의식하고 무의식 중간에 있게 된다고 그러더라구요. 그 때 얘기를 해 주면 그게 기억에 남는데요. 최면처럼요.
- 최면이요?
- 네. 그래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애들이 너무 졸린데 공부해야 할 때는 목소리 녹음해 놓고 졸피뎀을 먹고 눕는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면 자기 목소리가 계속 들리고 머리에 기억되고...
- 그렇군요. 그러면 몸은 자는데 공부하는 것 같겠네요.
- 그러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의사 처방이 있어야 되는 거니까 그렇게 할 수 없죠.
- 그렇겠군요. 어쩌면 간호사 분들도 정말 멋진 사람을 만나면 사용해 보셔도 되겠네요. 졸피뎀 주사를 하고 옆에서 얘기를 하면. 하하하.
지훈은 농담처럼 얘기했는데, 간호사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 저는 그런 짓 안 해요!
- 네? 저는 농담이었는데요.
- 아! 네. 그러니까 그게...
간호사의 얼굴이 또다시 빨개지자 지훈은 웃으면서 말했다.
- 하하하. 얘기 재미있었습니다. 졸피뎀이...
지훈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피해자들 모두에게서 졸피뎀이 검출되었다.'
지훈은 분위기를 어색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말을 했다.
- 졸피뎀이 최면에도 쓰이는 줄은 몰랐네요.
간호사는 고개를 숙인 채 '네.'하고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쉬세요.
간호사가 나갈 때 지훈이 말했다.
- 죽 고마워요.
간호사가 나가자 지훈은 피해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최면. 졸피뎀의 부작용. 도대체 어떤 연관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지훈은 죽 그릇을 가져다주면서 펜과 종이를 빌렸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신문도 빌려서 가져왔다. 지훈은 신문을 읽으면서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훈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조작이었다. 아니 너무 조악해서 수사에 참여한 누구라도 이 얘기가 맞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문을 던져두고 침대 맡에 앉아서 자신이 생각하는 의심점들을 나열해 보았다. 그리고는 종이를 잘 접어서 베개 아래에 넣었다. 그리고 누워서 아직도 행방을 모르는 혜민을 떠올렸다.
'미안해. 꼭 찾으러 갈게.'
지훈은 마음속으로 얘기를 하고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