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7. 비밀의 시작(1)
7. 비밀의 시작
샘은 홈즈의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홈즈는 자신의 아들인 피터가 조직의 신념에 위배되는 일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지낸 지 벌써 50년이다. 그의 눈빛, 손짓 하나에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나 의도를 알아챌 수 있는 사이였다. 홈즈의 전화는 샘에게 자신의 행동이 그르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 계기인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정보를 넘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조수들과 함께 한다면 일은 더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같이 침몰하는 배에 오르는 일이거나 혹은 일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에게 알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샘은 어렵지만 그 모든 일을 혼자 준비했다. 그 간의 데이터는 이미 서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암호화시켜 메일만 보내면 된다.
샘은 슈뢰딩거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사실을 알렸다. 슈뢰딩거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샘은 슈뢰딩거에게 당부를 했다.
- 섣불리 나서지 말게. 지금처럼 숨어 지내야 하네. 자네가 유일한 희망이야.
-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들 설마...
- 자네만 믿네. 자네밖에 없어.
- 아...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
- 정보는 모두 모아두었네. 자네에게 하나, 최베드로에게 하나.
- 최베드로?
-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알다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조직을...
- 지금 상황은 더한 위기야. 진짜 정보는 자네에게 모두 보내고, 최베드로에겐 일부만 보낼 예정이야.
슈뢰딩거는 전화를 하면서 자신과 의견 대립이 있었던 최베드로 신부를 떠올렸다. 옥스퍼드 대학교 분자 생물학과에서 최베드로는 명물이었다. 수업 시간에 항상 사제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이 흔하지 않을뿐더러 하느님의 창조론을 공부하는 사제가 분자 생물학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남들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공부에 임했다. 그를 시기하는 학생들이 '여자 친구 없이 혼자 사는 나이든 남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다고 놀려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고, 주위에서는 동양에서 온 신부를 남몰래 흠모하는 여학생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유명해진 것은 최베드로가 당시 분자 생물학의 권위자였던, 물론 여전히 그 분야에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최고라고 손꼽히는 구스타프 슈뢰딩거와 수업 시간에 벌인 지적 논쟁 때문이었다. 인간의 우수성과 신의 권능에 대한 열띤 토론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넋을 빠지게 할 만 하였고, 수업 시간이 종료되었음에도 두 사람의 논쟁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학생들 역시 그들의 수준 높은 토론에 매료되어 자리를 뜰 줄 몰랐고, 옆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던 교수들과 학장까지 참여하여 말 그대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학생과 교수 사이의 토론이 아니라 다방면에 박식한 신의 대리인과 한 분야에 조예가 깊은 우수한 인간의 열띤 토론은 교수들조차 그들의 지식을 풀어 토론의 한 축에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고, 밤이 깊어 어쩔 수 없이 토론을 멈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의 토론은 다음 날 학교 전체에 퍼졌고, 그 수업에서 또다시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자 생물학 강의 때에는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과 토론에 흥미를 느낀 많은 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찼다. 그러나 둘 사이의 토론은 없었다. 최베드로는 여전히 그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이었고, 구스타프 슈뢰딩거는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교수였다. 사소한 논쟁, 아니 질문과 대답조차 없는 수업에 맥이 빠진 교수들과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수업은 여느 때처럼 계속되었다.
- 자네의 놀라운 이야기는 단순히 교회나 성직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더군.
수업이 끝났을 때 슈뢰딩거는 최베드로에게 진심으로 감탄하는 말을 건넸다. 최베드로 역시 슈뢰딩거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 교수님의 해박한 지식에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 자네가 사제가 아니라면 내 자네와 당장 연구를 시작하고 싶은 게 있네만.. 워낙 데이터가 방대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안타깝네.
- 저 역시 교수님과 함께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 공부를 위해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유감입니다.
- 내 연구를 하다 자문을 구할 것이 있으면 자네에게 연락하겠네.
- 저같은 사제에게 자문을 구할 일이 있으실까요?
최베드로는 진심으로 슈뢰딩거에게 말을 했다.
- 아닐세. 나같은 과학자들은 어느 순간 난관에 봉착하기 마련이라네. 그간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의 행동과 유전 구조 따위로 모든 인간의 행동을 재단해왔지.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한계가 옥죄어와. 여기까지가 한계다. 그걸 이기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도 또다시 한계에 절감하지. 신탁을 듣고자 하는 의도는 없네. 다만 자네와 같은 사제라면 나같은 이의 얘기를 듣고 공감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네.
- 그러시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셔도 됩니다. 저 역시 교수님 수업에 감명을 받아 어느 순간 신에 근접한 인간을 믿게 되었으니까요.
- 하하하. 내가 훌륭한 사제를 타락시킨 건가?
- 그런가요? 어쩌면 타락이 아니라 교수님의 말씀처럼 알면 알수록 놀라운 창조주의 능력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역시 무척이나 어려운 일 같습니다.
- 자네라면 신의 권능이냐 인간의 능력이냐가 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과 본질을 깨우쳐 줄 수 있으리라 믿네.
- 과찬이십니다.
- 아냐. 내가 보기엔 자네는 종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를 만하네.
- 아닙니다. 저는 아직 공부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합니다.
- 글쎄. 자네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성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건대 자네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네.
- 고맙습니다.
- 앞으로 많은 도움 바라네.
최베드로는 두 학기를 더 다니고 옥스퍼드를 졸업하였다. 5학기 만에 대학을 졸업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람이었다. 다들 그가 사제인 것을 안타까워했지만, 그는 사제의 삶을 진심으로 바랐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선인 것처럼 생각했다. 슈뢰딩거는 최베드로가 졸업한 이후로도 그에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는 등 나름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둘 사이의 연락은 끊기게 되었다. 최베드로 쪽에서 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슈뢰딩거 쪽에서 연락을 멀리 했다.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어쩌면 최베드로의 믿음과는 거리가 먼, 아니 어쩌면 둘 사이에는 화합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게나.
슈뢰딩거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앞으로 고생하시게. 그레고리님을 위해 영광을.
샘의 마지막 말에 슈뢰딩거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50년 지기 친구의 마지막 인사가 허무하고 허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그레고리님을 위해 영광을.
샘은 전화를 끊고 메일 발송을 눌렀다.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이미 홈즈와는 얘기가 된 것이었다. 자신이 평생을 믿고 살았던 것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샘은 자신의 행동이 결코 인간을 위해, 인류를 위해 나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샘은 메일 발송 완료 화면을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 그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홈즈의 마지막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샘은 그들의 손에 잡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샘은 주변에 연구소에 연결되어 있는 가스밸브를 열었다. LPG 가스가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흘러 나왔다. 샘은 자리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었다. 길고도 긴, 어쩌면 아름답고도 슬픈 세월이었다. 홈즈를 만났을 때, 그 분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리고 '그'에게 기억을 이식했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 한평생 후회는 없네.
샘은 맞은편에 있는 거울로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서랍에 있는 성냥을 하나 꺼냈다. 자신이 50년 간 있었던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성냥불을 켰다.
'펑~!'
굉음과 함께 사무실 안에는 불이 붙었고, 그 불길은 더욱 강한 힘으로 사무실 벽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미소 지으며 샘 에드워드는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