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9)
TV에서는 연신 연쇄 살인범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병원 로비에 앉아서 TV를 보던 조 반장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 저 새끼들 우리가 준 건 하나도 보지 않았다더라구.
상황 브리핑을 하는 특수본 팀장과 반장의 모습을 본 조 반장이 말을 하자 박 형사가 조용히 말했다.
- 자기네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 저 자식, 기고만장하겠군.
- 그것보다 작은 박 와이프 사건이 묻힐 것 같은데.
- 저 새끼들 도매금으로 다 넘길 것 같은데.
그 때 박 형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박 형사는 조 반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 반장은 TV를 보며 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박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도 혼자서 욕을 내뱉고 있었다.
- 어. 무슨 일이야?
- 이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 이상한 일이라니?
- 그 새로운 팀 있잖나. 그 양아치같은 놈들.
- 응. 그런데.
- 사건 현장에 감식하러 나갔는데 거기서 몇몇 장기들이 발견됐어. 그런데...
임 박사가 말을 끄는 것은 난감한 일이거나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박 형사는 재촉하지 않았다.
- 그게 피해자들 DNA하고 99.9999% 일치해.
- 뭐라고?
- 흥분하지 말고 들어. 거기서 발견된 장기가 3개 있는데 그게 세 명의 피해자의 DNA랑 일치했어.
- 나머지는?
- 나머지는 없었지. 특히 그 작은 박 와이프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 그럼 그 녀석이 범인인 거야?
- 근데 잡혀갈 때 내가 현장에서 봤는데, 자기는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발뺌하더라구.
- 범인은 원래..
- 아니 그게 아니고. 다른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건 자기가 한 일이 맞다고 자백했는데, 창고에서 발견된 장기는 자기랑 관련이 없다고 그러더라고.
- 일부는 자백하고, 일부는 발뺌을 하고?
- 더 웃긴 건 자기는 완벽한 살인을 하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나. 그렇게 떠들어대더라구.
- 음..
- 그 녀석들 다른 사건하고 같이 엮어서 넘기려고 하는 것 같아.
- 그럼 장기는 어떻게 된 일일까?
- 그러니까 사라진 장기가 어떻게 거기서 나타났는지 도저히 갈피가 안 잡히더군.
- 결국은 그 녀석이 범인으로 결론 내려지겠군.
- 그럴 것 같아. 국과수에서도 그렇게 보고서를 쓰라고 하더군.
- 그래. 아무튼 고마워.
- 고맙긴. 이거 뭔가 요상해. 자네랑 작은 박이 찾은 정보랑 이놈은 완전히 다른 놈이잖아.
- 뭐가 뭔지. 이거야 원.
- 아무튼 다른 정보가 더 있는데 지금 말할까 아니면 사무실로 올래?
- 또 무슨 정보?
- 작은 박 와이프랑 관련된 정보.
- 뭐라고? 그게 뭔대?
- 음.. 일단 작은 박 와이프 혈액 샘플을 조사해봤는데, 작은 박 처형 혈액과 99% 이상 일치했었지.
- 그건 말하지 않았었나?
- 그런데 말야. 융모생식샘 호르몬인 β-HCG 수치가 지나치게 낮아. 분명 4개월이라고 들었는데 말야. 임신한 여성의 것은 맞는 것 같은데.
- 무슨 말이야?
- 혈액의 DNA는 일치하는데 호르몬 수치가 낮다라... 이거 너무 어렵군.
그 때 간호사가 박 형사에게 다가와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 형사는 간호사를 보고는 임 박사에게 말했다.
- 내가 조금 있다 전화할게.
- 그래. 더 할 말이 있으니까 전화 꼭 하게.
박 형사는 전화를 끊자 간호사가 말했다.
- 박지훈 씨 보호자시죠?
- 네. 그렇습니다만.
- 아까 사무실에서 벗어놓으신 옷가지 가져왔어요.
- 아! 감사합니다.
- 그리고 이거.
간호사는 웃으면서 머리핀을 하나 건넸다.
- 이게 뭐죠?
- 아까 수혈자 분 옷 정리하는데 떨어졌어요.
- 네. 감사합니다.
박 형사가 머리핀을 받자 대번에 작은 박 와이프의 것임을 알았다. 지훈이 생일이라고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산 거라면서 말했을 때 다른 동료들이 놀렸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머리핀을 보니 머리핀 사이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였다. 급하게 머리핀을 뽑았는지 머리카락이 머리핀에 감겨 있었다. 박 형사는 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DNA 검사를 할 수 있다는 임 박사의 말을 떠올렸다. 박 형사는 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 나야. 자네가 저번에 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DNA 검사가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
- 모근이 살아있다면 가능하지. 왜?
- 그게 뭔지 모르니까 아무튼 내가 머리카락 가져갈 테니까 검사 좀 해줘.
- 뜬금없이 머리카락 검사는..
- 작은 박 와이프 머리카락같아.
- 뭐라고?
- 자세한 얘기는 가서 할 테니까 기다리라고.
박 형사는 조 반장에게 가서 먼저 올라가겠노라고 말하고는 급하게 차에 올라탔다. 차에 있는 비닐 봉투에 머리핀을 잘 넣어 놓았다. 국과수에 도착한 것은 밤이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임 박사는 박 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자 이거네.
박 형사가 머리핀이 담긴 봉투를 건네주자 임 박사는 조심스럽게 머리핀을 꺼냈다.
- 용케도 여기 모근이 있는 머리카락이 있군.
임 박사는 머리카락을 핀셋으로 꺼냈다. 그리고는 혼자서 무언가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프린터로 결과를 출력하면서 인상을 썼다.
- 왜? 무슨 일이야?
초조하게 임 박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쳐다보고 있던 박 형사는 임 박사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 이거 뭐지?
- 뭔데 그래?
- 이거 분명히 작은 박 와이프 것 맞아?
- 맞을 걸. 왜?
- 작은 박 와이프 유전자는 아주 특이해. 언니와 일치 여부가 아니라 전에 내가 말했던 것 있지 않나. 잠재 유전자의 발현이라고.
- 열성 유전자 그거 말하는 건가?
- 그래. 작은 박 와이프는 열성 유전자, 잠재 유전자가 발현된 것이 다수 보여. 분명 우성과 결합되었는데...
- 그게 무슨 말이야?
- 짐작건대, 다른 희생자들은 그냥 유전자 결합으로 만들어졌다면, 작은 박 와이프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
- 그 때 봤던 안나 성은 외모는 30대였는데, 다른 장기들이나 피부 세포 검사를 해보니까 놀랍게도 10대의 것이더군.
- 10대?
- 이거 그냥 도축업자의 짓이라고 보기엔 너무 커. 사람을 만들고, 유전자를 조작하고, 사람을 배양하고...
임 박사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떨리는 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놀랍고도 무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공 수정으로 성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공 수정을 하면서 유전자 조작을 함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아직 명확한 증거가 없지 않나!
박 형사는 냉정을 되찾고 얘기를 했지만, 임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 이건 확신할 수 있네. 작은 박 와이프같은 사람은 인류 중에 한 명도 없어. 돌연변이로 열성 유전자가 한두 가지쯤은 나타날 수 있지만, 저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날 수는 없어. 이건 위대한 발견이 아니야. 신에게 대항하는 추악한 저주라고.
임 박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 자네 왜 그러나?
- 내.. 내가 그 때 그 사이언스지만 안 읽었어도.
- 그게 무슨 말이야?
임 박사는 고개를 들더니 뚜벅뚜벅 걸어 찬장과도 같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술을 꺼내왔다. 임 박사는 술을 따르고는 한 잔 벌컥 마시고는 말을 꺼냈다.
- 내 젊은 시절 얘기지. 자네한테도 말했지만, 그 사이언스지를 보고 무작정 옥스퍼드에 있는 샘 에드워드 교수에게 전화를 했지. 그 연구에 참여하고 싶다고. 물론 샘 교수는 하버드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있는 애송이 대학원생 전화를 무시했지. 그래서 연구의 방법론과 세포 연구에 대한 논문을 다시 샘 에드워드 교수에게 보냈지. 일주일 쯤 지난 후에 전화가 왔었어. 포드 해밍턴 교수를 찾아가 보라고. 그 포드 해밍턴 교수가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나보다 대단한 전문가지. 나는 포드 해밍턴 교수와 의기투합해서 샘 에드워드 교수 연구를 도왔지. 난 그 때는 우성으로 발현되는 희귀병이나 유전병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래서 그 연구에 10년을 보냈지. 내 젊은 10년을 투자해서 열성 유전자가 발현되는 방법에 도움을 준 거였어.
- 그런데 왜 그만 두었나?
- 포드 해밍턴 교수가 어느 날 그만 둔다고 하더군. 샘 에드워드 교수가 우리를 이용한 거라면서. 난 그럴 수 없다고 반박했지만, 나는 포드 해밍턴 교수에 메인 연구원일 뿐이었지.
- 10년이면 논문도 나왔을 테고, 실험 결과도 알지 않나?
- 동물 실험은 각각 나눠서 실험을 진행하고 결과를 공유하는 방식이었지. 나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실험이 이렇게 쓰일 줄은, 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목적에 맞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쓰일 줄은 몰랐네. 그리고 생각해보니 포드 해밍턴 교수가 그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고 얼마 안 있어서 죽었다네. 급성 백혈병으로. 그 때는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어쩌면 포드 해밍턴 교수도...
- 그렇다면? 만약 자네 말이 맞다면 자네도 위험했을 것 아닌가?
- 아니지. 논문이나 연구에는 내 이름은 오르지 않았어. 전부가 포드 해밍턴 교수의 이름이 실렸지.
- 서운했겠구만.
- 그 당시에는 햇병아리였으니까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네. 어쩌면 이름이 실리지 않은 게 날 살린 것인지도 모르지.
- 음...
- 그 때 알았어야 했어...
- 음.. 그건 자네 잘못이 아냐.
- 아냐. 그것까지 생각했어야 했어. 이렇게 이용할 것까지.
임 박사는 다시 술을 한 잔 마셨다.
- 당장 샘 에드워드 교수한테 찾아가 봐야겠어. 아직 옥스퍼드에 있을 거야. 생체 실험이라니. 유전자 조작이라니.
- 임 박사. 지금은 상황이 안 좋아. 조금만 기다려. 나도 어차피 영국에 한 번 가봐야 되니까.
- 자네는 왜?
- 세인트 조지 연구소.
- 그래. 같이 가세나. 샘 에드워드 교수는 세인트 조지 연구소장이니. 같이 가서 영국을 뒤집어 놓고 오세.
- 아니 영국을 뒤집는 게 아니라 그 미치광이들을 부숴놓고 와야지.
박 형사는 임 박사가 마시던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이 엄청난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끝까지 가보자고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