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8)
- 사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 중 조성준 경위가 범인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병원으로 후송 중이라면서요.
아나운서의 무미건조한 질문이 지훈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네. 현재 강원대학교 병원으로 후송 중인데요. 출혈이 심해 현재 중태에 빠져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인데요. 그런데 수혈이 어렵다면서요? 왜 그렇습니까?
- 조성준 경위는 RH-O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혈액형입니다. 수혈을 해 주실 분은...
지훈은 그 얘기를 듣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정보과장이 지훈을 보고 불렀지만, 지훈은 그 말을 무시하고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탔다.
- 이 자식... 몸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훈은 차를 몰고 빠르게 강원대학교 병원 쪽으로 향해 갔다. 신호나 과속 단속을 무시하고 마구 달리다 보니 춘천까지 30분만에 도착하였다. 지훈은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안내 데스크에 크게 외쳤다.
- 조성준 수술실이 어딥니까?
- 누구세요?
- 조성준 경위와 같은 서에서 근무하는 형사입니다. 수혈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지훈의 말이 끝나자 안내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러자 의사인 듯한 사람이 한 명 부지런히 뛰어 내려왔다.
-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훈은 그 의사를 따라서 검사실로 들어갔다. 지훈의 팔뚝에서 피를 뽑더니 바로 검사를 시작했다.
- RH-O형 맞습니다. 다른 전염병도 없고, 즉시 수혈 가능합니다.
의사가 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지훈에게 말했다.
- 지금 탈의실에 가셔서 속옷까지 다 벗으시구요. 이 수술복으로 갈아입으세요. 긴급 수혈이어서 환자 옆에서 수혈을 진행할 예정이거든요. 지금 다른 분들도 오실 거라고 연락이 왔는데, 워낙 급한 수술이어서..
- 빨리 합시다. 급하다면서.
지훈은 그 자리에서 옷을 몽땅 벗어 던졌다. 그리고 바로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 갑시다.
의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지훈의 표정은 다급했다.
- 얼른 수술실로 갑시다.
지훈이 재촉하자 의사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지훈을 수술실 입구로 안내를 했다. 지훈은 수술실 입구에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의사 두 명이 침대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실 안에는 성준이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심전도기의 파동이 일정해 보였지만, 성준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 긴급 수술이어서...
의사가 주의사항을 말하려고 하자 지훈이 한 마디 했다.
- 동의하니까 빨리 하십시오.
지훈의 말에 의사는 지훈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팔뚝에 바늘을 꽂고 호스에 연결을 하자 지훈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지훈은 피가 더 잘 빠져나가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계속하였다.
- 다른 수혈자가 40분 정도 걸린답니다.
- 40분? 어허.. 수술을 멈출 수도 없고...
그 때 지훈이 한 마디 했다.
- 죽지 않을 만큼 뽑아 써도 되니까 얼른 수술하시죠.
- 그게 피를 많이 뽑게 되면...
젊은 의사 하나가 지훈에게 조용히 말을 했지만, 지훈은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 내 피 아끼느라고 저 자식 죽으면 가만히 안 두겠어.
지훈의 말에 젊은 의사는 주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빛은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할 것이라는 결의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 최대한 빨리 합시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지훈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몸도 무기력해졌고, 잠이 쏟아졌다. 지훈이 의식을 놓으려는 순간 물속에서 들리는 말소리처럼 먹먹한 소리가 들렸다.
- 도착했습니다. 이 분은 회복실로 옮기겠습니다.
지훈은 감기는 눈으로 성준을 쳐다보았고, 성준은 뿌옇게 변해버렸다. 지훈이 깨어난 것은 한참 후였다.
- 괜찮으세요?
지훈이 눈을 떴을 때에는 조 반장과 박 형사가 보였다. 그 옆의 간호사는 지훈이 눈을 뜨자 지훈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 무식한 놈 같으니라구.
조 반장이 다짜고짜 욕을 했다. 지훈은 오랜만에 듣는 조 반장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 1.5리터나 수혈을 하는 놈이 어디 있어! 아무리 니 덩치가 커서 피가 넘쳐도 그렇지.
- 성준이는 괜찮습니까?
조 반장의 말에 지훈은 성준의 상태를 물었다. 그러자 박 형사가 대답을 했다.
- 지금 봉합 수술은 다 끝났어. 아직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중환자실에 있는데, 수술은 잘 됐다는군.
- 다행이네요.
- 다행은 무슨 다행이야! 우라질놈. 그 놈 살리려다 니가.. 니가..
조 반장의 눈에 눈물이 살짝 비쳤다. 조 반장에게 성준은 아들과도 같은 조카였다. 큰 형이 죽고 조 반장을 유독 잘 따르던 성준이 경찰 대학교로 가고 경찰이 된 이유는 순전히 조 반장 때문이었다. 그런 조카이기에 조 반장은 항상 성준에게 관심을 가져왔었다. 이번 출동에서 사고를 당해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지훈의 무리한 수혈이 아니었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는 고마운 한편 미안했다. 그렇게 고마웠지만 표현이 서툴렀던 조 반장은 지훈이 의식을 찾자마자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났던 것이었다.
- 저도 깨어났으니까 괜찮잖아요.
지훈의 말에 조 반장은 뒤돌아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아무튼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지훈은 조 반장의 말을 듣고는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박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훈을 쳐다만 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아버지가 대견한 아들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훈은 그 눈빛의 따뜻함에 몸이 노곤해졌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 의식 찾고 잠든 거니까 괜찮을 거야.
박 형사가 눈을 감은 지훈을 보고 놀란 조 반장에게 말했다. 조 반장은 고개를 끄떡거리고는 이불을 끌어 지훈을 덮어주었다. 조 반장과 박 형사는 물끄러미 지훈을 내려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