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34화 (3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7)

성준이 사무실로 가자 지훈은 자신에게 새로 배정된 정보 2과로 갔다. 지훈이 자리에 앉자 과장이 지훈의 옆으로 왔다.

- 어서 오게나.

- 네.

지훈이 자리로 가서 앉자 자리에는 서류철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과장은 지훈에게 서류철을 열어보라고 했다. 앞으로 업무 내용이니 잘 숙지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훈이 서류철을 열자 '대북 지원 세력 현황도 및 안보 위협군 집단'이라는 엉뚱한 내용이 보였다. 지훈은 피식 웃었다. 결국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배치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서류철을 읽어볼 뿐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훈은 컴퓨터 앞에 앉아 83년 도쿄 경시청 자료를 찾아보았다. 지훈이 그 내용을 탐색하고 있을 때 과장이 다시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 첫날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지훈은 모니터에 나온 내용들을 읽다가 과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 도쿄에서 일어난 사건을 검색 중이었습니다.

지훈의 말에 과장은 얼굴색을 바꾸며 말했다.

- 여기는 안보 관련 업무를 하는 곳이네. 서류철에서 읽어보지 않았나? 도쿄는...

과장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지훈이 먼저 말을 잘랐다.

- 지금 사건은 조총련 계열과 연결된 것으로 보여서 찾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 조총련?

- 네. 아까 들어오기 전에 정보과에 있던 조성준 경위가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던 일이라고 그 일을 먼저 맡아달라고 해서요. 제가 오지랖 넓게 먼저 서둘러서 죄송합니다.

지훈의 그렇게 말하자 정보과장은 크게 웃었다.

- 그래? 난 또 강력계 일에서 아직 손을 놓지 않은 줄 알고. 조성준 경위가 아주 좋은 충고를 해 주었구만. 하하하.

지훈은 정보과장의 웃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씁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과장이 자신을 감시하는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정보과장의 웃음에 맞춰 지훈을 향해 웃어주었다.

'적어도 정보과에서 흠 잡힐 일은 하지 말자.'

지훈이 사무실에 들어올 때 마음먹은 것이었다.

-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그냥 업무 파악하고 사람들하고 인사나 하지 그래.

정보과장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 오늘 새로운 사람도 왔으니 회식이나 한번 하자구.

정보과장의 말에 다들 좋다고 한마디씩 했고, 지훈은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다 정보과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 이런 내가 소개를 한다는 게 깜빡 하고...

이후 정보과장은 티타임을 한다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과 상견례를 하였다. 지훈의 눈에는 다들 무언가를 감추며 지훈을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을 눈빛이었지만, 지훈은 어느샌가 그들이 눈빛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반겨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 내부에 흐르는 묘한 배타적 기류와 경찰청 안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적대적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지훈은 그런 걸 느끼고 있다는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호의에 감동한 듯한 행동을 보였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날 저녁 퇴근 후 회식 자리에서도 지훈은 그들과 어울리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들은 지훈에 대한 긴장을 다소 푼 듯 했고, 점점 지훈은 그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보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지훈을 완전히 '병신'으로 보았고, 지훈에 대한 감시도 느슨해졌다. 지난 보름동안 지훈은 내부망에서 정보를 찾아보고자 하는 욕망과 싸우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 하지만 지훈은 참고 견뎠고, 그들은 지훈이 안보 관련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을 계속 보자 그를 완전히 믿게 되었다.

집에서 만난 박 형사는 퇴직한 다른 형사와 심부름센터를 차렸다. 전혀 의외였지만, 박 형사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전에도 느꼈는데,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는 것 같아.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끄떡였다.

- 저도 최근에 그런 낌새를 느꼈습니다.

- 아니 난 이 사건을 처음 맡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지. 그래서 그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심부름센터를 차린 거지.

- 같이 차린 분은 믿을 만한 분인가요?

- 아! 한수. 나랑은 동네 친구지. 그 자식은 참 똑똑한데 헛똑똑이야. 동네 순경으로 끝날 녀석은 아니었는데, 노래방 사장 한 번 봐줬다가 재수없게 걸려서 짤렸지.

- 네? 무슨..

- 말하자면 길어... 근데 그 녀석 의리 하나는 최고인 녀석이지. 내가 흔들릴 때 내 뺨을 때린 녀석이었으니까.

- 뺨을 때리면 최고의 의리인가요?

- 그럼. 그 땐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지. 내 분노를 누구든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 너도 정보과에서 몸 좀 사려야 된다. 당분간은.

-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여기 있는 상황판이랑 자료들은 내일 몽땅 사무실 골방으로 옮길 예정이야. 아무래도 찜찜해서.

- 네.

- 자료를 옮겨놓더라도 당분간 사무실엔 오지 마라.

- 네? 그건 왜...

-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지금은 기다릴 때야. 한 달 정도 우리가 손을 뗀 것처럼 행동하면 감시도 좀 덜 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 네. 그러죠.

그렇게 해서 박 형사와 지훈은 마치 사건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처럼 행동했다. 오히려 조 반장이나 다른 형사들이 박 형사와 지훈에게 좀 더 조사해 봐야 하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감이 이젠 다소 안전해졌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기에 그 얘기를 듣고 그냥 넘겨버렸다. 그런데 그 때 박 형사와 지훈이 행동을 시작할 계기가 생겼다.

- 선배님, 그 팀에서 범인을 파악했답니다. 지금 검거 팀이 출발했어요. 저도 곧 출발해야 합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던 중 지훈은 성준에게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 범인을?

- 강원도 횡성에 사는 녀석이라는데, 저는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 이상하다니?

- 그 녀석 직업이 도축업자라는데, 의대 출신이랍니다.

- 의대 출신의 도축업자라...

- 왠지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 냄새라니? 박 형사님 말투잖아.

- 그게요... 우리가 조사한 내용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 다른 정보를 모았나보지.

- 선배님! 남 얘기하듯이 하지 마세요! 형수님과도...

성준이 버럭 화를 내자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 범인을 잡은 거면 좋은 거잖아. 그런데 왜 니가 열을 내지?

지훈은 냉정하게 성준에게 말을 했다.

- 선배님! 잠시 저랑 저 쪽으로 가서...

- 됐어. 더 할 얘기 없으니까 너도 가서 니 일 봐.

- 선배님!

지훈은 성준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성준은 지훈의 태도가 정보과에 가서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아 괴로웠다. 성준이 사무실로 가자 지훈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접니다.

- 무슨 일이야? 업무 시간에?

- 그 팀에서 범인을 잡았답니다.

- 범인을?

그러자 박 형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잘 됐구만. 이제 숨통이 좀 트이겠네.

- 네. 일단 저는 안에서 대기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 네.

지훈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예의 그 업무를 보았다. 사람들 역시 그런 지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마 후 경찰청 안 내부 방송에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았다는 게 나왔다. 모두들 TV를 켜자 사건 현장이라며 속보가 나왔고, 강원도 횡성에 있는 도축업자의 창고에서 훼손된 장기들이 발견되었다는 내용까지 나왔다. 그러나 정작 지훈을 벌떡 일어서게 한 것은 다른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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