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6)
- 미덴(μηδ?ν)은 그리스어로 '제로나 무(無)'를 뜻하는데.
지훈은 손에 들고 있는 미제 사건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러시아어로 '제로나 없음', 그리스어로 '제로나 무(無)'.
- 임 박사님. 제가 보고 있는 자료에는 일본에서는 연쇄 살인 피해자들이 러시아어로 '니슈토'라는 글자가 나왔답니다.
- 니슈토? 그것도 제로나 무(無)의 의미 아닌가? 그게 몇 년 전 일이지?
- 기록으로는 83년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 83년이라... 20년 전 일이군.
- 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범인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구요.
- 결국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이로군. 20년 후에 일어난 일은 장기가 사라진 것만 다를 뿐이고... 그렇다면 시신으로 무언가를 남기려는 의도였나?
- 무얼 남기죠? 여러 사람에게 알리려면 신문이나 방송을 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 꼭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알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아까 자네 말처럼 윗선에 누군가가 수사를 멈추게 했다면 그에게 알리는 것도 있고, 아니면 우리의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일 수도 있고.
지훈은 임 박사의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 어쩌면 말일세...
임 박사는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일 수도 있지.
- 경고의 메시지요?
- 그렇지 않고는 죽은 시신을 갖고 하지는 않겠지. 그냥 일반 메시지의 전달이라면 굳이 사람을 죽여서 보여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 그렇겠군요.
- 그리고 그 무(無)라는 말이 일종의 암호처럼 누군가에게는 협박이나 경고가 될 수 있겠지.
지훈은 그 말에 침묵을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내는 왜 데려갔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미 완성되어 있지 않은가?
- 그렇다면 제 아내는 왜 납치가 되었을까요?
- 음. 내가 볼 땐 말야. 자네 아내는 살아 있어. 왜냐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메시지를 만들었지만, 자네 아내는 말 그대로 납치가 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쓸모없어졌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죽을 만한 어떤 행동을 했겠지. 하지만 자네의 아내는 그들에게 쓸모가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네만, 아무튼 그러니까 납치를 한 게 아닌가 싶어.
- 네....
지훈은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 아무튼 자네가 또 한 고리를 발견했어. 대충 그들의 목적이 보이는군.
- 박사님 말씀대로 아직까지는 가설이죠.
- 그렇긴 하지만 상황이 딱 그렇게 맞아 떨어지지 않나! 아무래도 세인트 조지 연구소가 수상해.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지금은 한국에 있는 병원들을 먼저 조사해야겠지요.
- 조심하게나. 내가 볼 땐 그 놈들 단순히 연구하는 과학자나 의사들이 아닌 것 같아.
- 네. 박사님도요.
지훈은 전화를 끊고 상황판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여 적었다. 이제 무언가 연결고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박 형사가 들어와서는 자신의 집이 상황실로 바뀐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 그대로 옮겨놨군.
- 네. 그런데 아까 놀라운 사실을 하나 찾았습니다.
지훈은 박 형사에게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말해 주었다. 박 형사는 놀란 표정으로 그 얘기를 듣다가 지훈을 칭찬했다.
- 역시. 자네가 뭔가 찾아낼 줄 알았어.
- 형님 말씀대로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이제 그 말을 알겠더군요.
- 아냐. 나라면 못 찾았을 거야. 아무튼 내일부터 나는 맥컬리 병원 쪽을 알아볼 테니까 자네는 좀 더 파헤쳐봐.
- 네.
두 사람은 온갖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에서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경찰서로 출근한 지훈은 습관적으로 특수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특수본 안에는 낯선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제야 지훈은 자기 팀이 해체된 걸 알았다. 지훈은 멋쩍게 인사를 하고 돌아 나왔다. 그때 지훈의 뒤통수에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사건 부풀리고 상 받은 놈 아녜요?
- 그러니까. 씨발 쪽팔린 줄 알아야지. 박 형사 그 새끼도 설치다가 한 방에 갈 줄 알았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지훈은 순간 울컥 했지만 참고 걸어가려 할 때 안에서 성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사건을 부풀리다뇨! 설치다뇨! 사건보고는 다 했고, 다른 사건 수사 중이었습니다.
지훈은 성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피식 웃었다.
- 자식, 의리있네.
그런데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 야 이 새꺄! 너 누구 팀이야? 저쪽 팀 지원이었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어. 어디서 짬도 좆도 없는 게 지랄이야.
- 짬은 없지만 어떤 수사 팀이 유능한지는 알 것 같습니다.
- 뭐야 새꺄? 이 새끼가..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자 지훈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덩치가 큰 형사 하나가 성준의 멱살을 잡고 을러대고 있었다.
- 우리가 어떻게 수사하는지 니가 알아? 지원 나왔으면 알아서 기어야지..
- 그 손 놓으십시오!
지훈이 소리를 지르자 모든 형사들이 지훈 쪽을 쳐다보았다.
- 뭐라고? 저 병신 새끼가 뭐래냐?
- 그 손 놓으라고 했습니다.
-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지랄이야!
- 짬을 쳐먹었으면 먹은 대로 행동하십시오.
- 뭐... 뭐라고?
- 당신들이 얼마나 잘 하는지 지켜보죠. 짬을 제대로 쳐드셨는지, 아니면 똥꾸녕으로 쳐먹었는지.
그리고는 성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 나 간다!
지훈이 몸을 돌려 나가자 안에서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 야이 개새꺄! 어딜 가! 저 좆만한 새끼가.. 야!
멱살을 푼 성준이 욕을 하는 형사를 쳐다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성준은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 야! 넌 어딜 가?
- 똥 싸러 갑니다. 아까 짬을 많이 쳐먹어서요.
성준이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오자 안에서는 다시 욕설이 터져 나왔다.
- 저 개새끼. 정보과 지원만 아니었어도 반쯤 죽여 놨을 텐데.
- 참아. 기회가 있겠지.
- 씨발. 아침부터 기분 좆같네.
성준은 밖으로 나와 지훈이 있는 곳으로 뛰어 왔다.
- 선배님.
- 너도 갑갑하겠다.
- 아침에 왔는데, 그 동안 모은 자료를 다 폐기하고 있더라구요. 상황 보고고 뭐고 간에 처음부터 다시 한다나요.
- 저 팀이 어떤지는 조 반장님께 얘기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었지.
- 그것보다 더 개판이에요.
- 아무튼 거기서 우리 욕하더라도 오늘처럼 나서지 마라. 너만 다쳐.
- 그래도 선배님, 멋있던데요?
- 멋은 무슨. 아무튼 그 쪽 상황 잘 보고 중요한 거 있으면 좀 알려줘라.
- 네. 그런데 알려 드릴 게 있을지나 모르겠네요. 완전 70년대 수사 방식으로 나와서. 범인은 잡아서 족치면 분다나. 참 나.
- 어쩌면 그게 효율적일 수도 있지.
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성준을 보며 말했다.
- 그 안에서 몸 사리고 있어. 간다. 수고해라.
- 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