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32화 (3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5)

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오는 길에 사온 칠판에 상황판에 있던 내용을 다시 옮겨 적었다. 그리고 놓고 온 자료들을 다시 출력하였다. 프린터로 출력되는 내용들을 읽어보던 지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왜 이 내용을 이제 봤지?

지훈은 핸드폰을 들어 임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각이었기에 조심스러웠지만, 한시가 급한 일이라 생각했던 지훈은 예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저 쪽에서 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이 밤에 누구시오?

-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저 박지훈 형사입니다.

- 아! 작은 박 형사. 그런데 이 밤에 무슨 일 때문에.

- 다른 게 아니고, 임 박사님께서는 현장에서 시신이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었는지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 알다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일인가?

박 형사는 자신이 방금 전에 출력했던 문서를 보며 말했다.

- 저 혹시 죽은 시신들이 모두 어떤 특이한 형상이 아니었나요?

- 특이한 형상?

- 가령 알파벳의 모습이라든가 혹은 숫자의 모습, 아니면 어떤 기호의 모습이 아니었나요?

- 기호?

- 네. 제가 지금 보고 있는 파일이 하나 있는데요. 장기 적출 사건은 아니지만, 시신들이 특이한 형태도 발견된 사건이 있었거든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난번에 박사님께서 시신들이 배경하고 교묘하게 잘 어울린 상태로 죽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시신들에게서 뭔가 특이한 모습이 없었나 하는 거죠.

- 특이한 형태라... 그건 원래 사이코패스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남기는 기록같은 거 아닌가? 아! 잠시만 기다리게나.

전화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임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현장 검증 때 찍은 사진들 가지고 있나?

- 아뇨. 그건 챙겨오지 못했습니다.

- 사무실 아냐?

- 오늘부로 팀이 해체됐습니다.

- 해체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지훈은 저녁 때 있었던 일은 임 박사에게 말을 했다. 임 박사는 끙하는 소리를 내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

- 개뼉다귀 같은 놈들. 이거 냄새가 구려져. 아무튼 그 사진들 보고 내가 연락함세.

- 네. 부탁드립니다.

- 그 동안 시신을 왜 남겼는지 의문이었는데, 자네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어 보여.

전화를 끊고 지훈은 자기가 뽑은 문서를 다시 읽어 보았다.

8. 본 사건과 비슷한 사건 분류 27

1983년 도쿄(東京)에서 일어난 일련의 다섯 건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사건의 피해자들이 모두 기괴한 형상으로 죽어 있었다. 기괴한 형상과는 반대로 그들은 모두 온화한 표정이었다. 마치 행위 예술을 하는 듯한 포즈였고,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처음에는 사이코패스의 연쇄 살인으로 보고 수사를 하던 도쿄 경시청에서는 기괴한 모습을 한 시신들이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형상을 재조합해 보았다. 그 시신들을 배열하다 보니 하나의 단어가 나왔고, 그것은 'ничто'라는 러시아어로 밝혀졌다. 'ничто[nichto ? 니슈토]'는 '없음, 제로'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알아냈을 뿐 범인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수사 중이라고 하고 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유력한 용의자가 잡히긴 했지만, 수사 도중 사망을 하였고, 그와의 마지막 대화는 삭제되었다.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단지 상징적인 어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사이비 종교 단체나 지능적 살인범 집단이 저질렀을 가능성을 높다고 보고 있다.

지훈은 그 동안 죽은 이들의 생물학적인 공통점과 주어진 정보에만 집중한 나머지 어쩌면 시신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를 간과한 것은 아닌가 하고 다시 출력한 문서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 때 임 박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 참나.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 왜 그러시죠?

임 박사의 말에 지훈은 허리를 세웠다.

- 글쎄. 자네 말처럼 무슨 문자 같기도 해. 그런데 이걸 기호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뭐 아무튼 요상해.

- 문자가 아닌가요?

- 나도 확신은 안 서는데, 아무튼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순서대로 배열해 보니까 룸살롱에서 발견된 여자애는... 이게 뭔가 싶기도 하고.

- 아! 그렇습니까?

지훈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아 보였는데, 다시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때 임 박사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 이건.. 나 원참.. 난 자네 말대로 알파벳이나 숫자로 생각하고 봤는데, 이거 완전히 수학하고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기호잖아.

- 수학하고 물리학 기호요?

- 그래.. 긴가민가 했는데 그 룸살롱에서 발견된 여자아이 있지 않나. 그 뭐더라..

지훈은 상황판을 보고 얼른 이름을 말해 주었다.

- 조영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래. 걔. 그 여자애가 다리를 둥글게 말고, 손은 머리 위로 뻗은 채로 죽어 있었지. 처음에는 룸살롱 벽에 있는 그림을 흉내낸 줄 알았지. 그 룸살롱 벽에 그 호리병같이 생긴 그림 있지 않았나.

지훈은 얼른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임 박사의 말을 끊지 않기 위해 아는 척하며 대답했다.

- 네.

- 그런데 지금 가만히 보니까 내가 옛날 수학 시간에 지겹게 보던 문자랑 똑같네 그려.

- 수학 시간이요?

- 응. 델타야. 델타 소문자(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알파, 베타, 감마할 때 그 델타. 그렇게 보니까 처음 발견된 여자애는 뮤(μ)라는 글자랑 닮았군. 그리고 두 번째 여자애는 뮤(μ)인지 에타(η)인지 모르겠네. 아! 에타(η)로군. 시신이 뒤집혀 있어.

임 박사는 사진을 보면서 혼자서 계속 중얼거렸다. 수학과 과학 기호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으로 무얼 알아낼 수 있을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지훈의 마음과는 달리 임 박사는 마치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사진을 보면서 이건가, 저건가 하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 네 번째는 갑자기 대문자가 나오진 않은 테니 시그마(Σ)가 아니라 엡실론(?)일 테고. 마지막은 입실론(υ)인지 뉴(ν)인지 헤깔리네.

임 박사의 중얼거림이 멈추자 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기호들이 무얼 뜻하죠? 전부 수학이나 과학에서 사용되는 기호라면 수학자, 아니면 과학자라는 말인가요?

지훈의 말에 임 박사는 실소를 터트렸다.

- 수학과 과학에서 사용하는 기호는 모두 그리스어에서 가져온 거라네. 그러니까 수학이나 과학에서 사용하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어를 찾아보면 되지. 이제 대충 나왔으니까 내가 사전을 한 번 찾아봄세.

임 박사는 전화를 끊지도 않은 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하면서 사전을 찾았다.

- 메데아(μηδ?υ)는 없군. 그럼 미덴(μηδ?ν)은 가만 보자...

지훈은 임 박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임 박사의 말이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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