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31화 (3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4)

- 뭐 내 집안도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박 자네한테 얘기하는 것도 웃기군.

- 아닙니다.

- 아무튼 자네는 내 말대로 해. 이번 건은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고 저 쪽 애들이 맡은 건 금방 결론이 날 거야. 그 새끼들. 지난번에 증거 조작하다 걸린 놈들인데, 또 그런 짓 안 하리라는 보장이 없거든. 그 새끼들이 맡으면 이건 영원히 미제 사건이 되는 거구.

- 알겠습니다. 형님.

- 작은 박. 앞으로는 저녁 때 우리 집에서 만나는 걸로 하자고. 그리고 핸드폰으로 연락하기로 하고.

- 네.

지훈과 박 형사가 안으로 들어오자 팀원들은 투덜거리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조 반장은 박 형사를 보자 박 형사 옆으로 다가왔다.

- 마음 풀어.

그러더니 형사들을 향해 크게 말했다.

- 오늘은 소주 한 잔 하자고.

그러나 박 형사는 조 반장을 잡으며 말했다.

- 조 반장. 나 오늘 부로 옷 벗을 생각이야.

박 형사의 말에 형사들이 모두 박 형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야 화가 나서 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자신의 거취를 말하는 것으로 보였다.

- 이봐. 박 형사. 내가 아까도...

- 나가서 담배 한 대 피면서 생각해 보니까 쪽팔려서 못 해먹겠더라고.

- 어허. 이 사람아. 쪽팔리긴. 자네가 내려가서 나도 신청서를 써 놨는데. 이제 우리같은 사람들은 내려가서 있는 것도 좋잖아.

- 말은 고마운데, 난 못 내려갈 것 같아. 딸 따라서 미국으로 가든가 다른 일이나 해야지.

- 어허. 박 형사. 그렇게 함부로 결정하지 말라고. 자네 없으면 우리 강력계는 개털이라고.

조 반장의 말이 끝나자 평소 과묵하기로 소문난 이 형사가 한 마디 거들었다.

- 형님이 빠지면 누가 수사를 한단 말이우? 잠깐 쉬시다가 올라오세요.

최 형사와 김 형사 역시 박 형사 옆으로 와서 말했다.

- 형님, 그렇게 단칼에 자르지 말고 좀 더 생각해 보세요.

박 형사는 피식 웃으며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그간 동고동락(同苦同樂)한 형제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살인자들과 대치하며 죽을 고비도 넘기고, 현장에서 같이 밤을 새고 몸을 부대꼈던 친근한 이들이었다. 박 형사 역시 이들과 헤어져 혼자 있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지금 그걸 받아들이고 흑산도로 간다면 지훈과 제수씨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자기 자신의 신념에 대한 배신이 더 컸다.

- 다들 고마운 말인데, 이제 나도 옷 벗을 때가 된 거라고 생각해.

그 때 멀찍이 있던 조 반장이 박 형사에게 다가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박 형사는 물끄러미 조 반장을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받았다.

- 형님! 내가 갈 때까지만이라도 그냥 있으쇼!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박 형사의 귀에 울렸다.

- 아! 자식. 시끄럽게...

박 형사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며 피식 웃었다. 다혈질이고, 막무가내인 고 형사가 핸드폰에 대고 소리를 친 것이었다.

- 내가 죽으러 가냐? 그냥 그만 두는 건데...

- 내가 볼 땐 형님은 형사 그만 두면 뭐 해먹고 사실려고 그려슈. 슈퍼마켓을 해도 형님같이 깡패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손님들도 도망칠 것 아니우.

고 형사는 흥분을 했는지 목소리가 높았고, 박 형사는 고 형사가 말을 할 때마다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냈다. 고 형사의 목소리는 주변에 있던 형사들에게까지 다 들렸고, 그 말에 형사들이 비실비실 웃기 시작했다.

- 아무튼 나 갈 때까지 거기 안 있으면 내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형님 손모가지에 수갑 채울 테니까, 알아서 하쇼! 나 소설 참 잘 쓰니까.

고 형사의 치기어린 말에 박 형사는 문득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잘 살진 않았지만, 적어도 동료들에게는 나름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몸조리나 잘 하고 와. 나오면 소주나 한 잔 하자.

- 어이. 형님.. 이봐! 박 형사.. 야!

고 형사의 목소리가 핸드폰에 울렸지만, 박 형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 형사가 전화를 끊자 다른 동료들은 모두 아쉬운 듯이 박 형사만 쳐다보았고, 박 형사는 주변을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 철수들 안 해? 여기 비워줘야 하잖아.

박 형사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일렬로 정리했다. 그 서류들은 모두 파일로 만들어 지훈이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박 형사는 그 서류들을 보면서 말했다.

- 이거 놔둬야 합니까?

박 형사가 조 반장에게 말하자 조 반장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조 반장이 뭐라 더 말하려고 하자 박 형사가 얘기했다.

- 사건의 인계니까 놔두죠. 다들 서류는 놔두고 자기 물건만 챙기면 되겠네.

박 형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랍을 열었다. 경찰 배지와 권총, 그리고 볼펜 한 자루와 수첩 하나. 박 형사는 서랍을 닫았다.

- 난 챙길 게 없구만. 떨렁 수첩 하나네.

다른 형사들도 각자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 때 입구에서 국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국장을 보자 조 반장이 자리에서 슬금슬금 일어났고, 모두들 행동을 멈추고 국장을 쳐다보았다. 국장은 민망한 표정으로 박 형사에게 다가왔다.

- 박 형사. 나 좀 보지.

박 형사는 고개를 들어 국장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고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 오늘까지 비워주면 되는 겁니까?

- 이 사람. 왜 그렇게 딱딱해.

- 딱딱하긴요. 윗분들의 지시 사항인데요.

국장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 자네 맘은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사건이 좀 커져서...

- 커지다뇨?

국장의 말에 형사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국장을 쳐다보았다.

- 지난번에 자네가 올린 보고서를 보고 갑자기 수사를 멈추라더군.

- 수사를 멈추다뇨? 왜죠?

지훈이 앞으로 나서서 국장에게 말했다. 국장은 지훈을 보다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자네들이 조사한 곳 중에서 윗선하고 관련이 있는 곳이 있었나봐.

- 그게 무슨 말이죠? 저희가 조사한 곳이라고는...

그 순간 박 형사와 지훈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보다 확실한 정보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아무튼 이번 건은 언론에도 그렇고, 윗선에서도 그렇고 해서 희생양이 필요했어. 미안하네.

국장은 진심으로 미안한 듯이 박 형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박 형사는 그 일에 대해 초연한 듯이 대답했다.

- 국장님이 미안할 건 없습니다.

- 잠깐 아래 내려가서 있으면 금방 다시 부를게.

-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오늘부로 그만둘 생각입니다.

- 이봐. 박 형사.

- 이건 그냥 제 결정이니까 받아주십시오. 사시미가 설치고, 미친놈들하고 만나고 하는 일도 이젠 지겹네요.

- ...

박 형사의 말에 국장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보아온 형사 중에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떠난다는 말에 국장은 몹시 서운하고 씁쓸하였다.

- 휴... 그래. 나 같아도 다 때려치고 싶을 거야. 오늘은 다들 나랑 한 잔 하자구.

국장은 조 반장을 비롯해 형사들에게 말을 하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조 반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박 형사한테 말했다.

- 사직서는 아직 갖고 있으니까 잘 생각해 봐. 같이 나가자구.

박 형사는 수첩을 품에 품었다. 다른 형사들 역시 주섬주섬 책상 정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 반장 뒤를 따랐다. 지훈은 무언가에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 박 형사는 그런 지훈을 보고 옆으로 다가가 조그맣게 얘기했다.

- 더 명확해졌어. 내가 그 곳을 더 조사해 볼 테니까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아.

지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눈을 한 번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 아뇨. 그 곳은 제가 조사하겠습니다. 박 형사님은 맥컬리 병원을 조사해 주십시오.

- 아니 냉정하게...

박 형사의 말을 끊고 지훈이 말했다.

- 냉정하게 생각해 본 결과입니다. 가서 사고 치지 않을 테니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오늘은 먼저 집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지훈의 단호한 말에 박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다. 나도 금방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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