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3)
상황실에 모인 형사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조 반장은 앞에 놓인 공문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최 형사에게 물었다.
- 박 형사하고 막내는 아직 연락 안 돼?
조 반장의 물음에는 짜증보다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최 형사 역시 다소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한 시간 전에 들어온다는 연락은 받았는데 방금 전화해 보니까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구요.
- 음.. 그나저나 이 일을 어쩐다. 박 형사도 박 형사지만 작은 박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 그러게 말입니다. 아니 상황 보고야 일단 종료되면 하는 건데... 높은 분들 생각은 다른 것 같네요.
평소 별로 말이 없던 김 형사가 넋두리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다혈질인 조 반장은 욕을 해가며 그 말을 받았다.
- 윗대가리들은 의자에 앉아서 입으로만 조지면 범인이 알아서 기어들어 오는 줄 알지. 현장은 좆도 모르면서 펜대로 모가지나 날리고. 개새끼들.
조 반장의 말에 형사들은 한숨을 쉬었다. 조 반장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금 전 국장이 던지고 간 공문을 다시 읽었다.
'실제 범인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범죄 사실 이외의 것을 적시(摘示)하지 않고 대국민 발표를 했으며, 상급자를 기망(欺罔)하여 경찰 공무원의 품위를 떨어뜨린...'
범인을 잡았다고 했는데 새로운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이미 내부적으로 보고가 됐던 사건이었다. 보고 라인을 통해 새로운 사건이 아닌 기존에 일어났던 또 다른 축임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문을 받자 조 반장은 울화통이 터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공문은 내려왔고 상황을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 경찰서로 들어온 박 형사와 지훈은 그 얘기를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
- 뭐? 이제 겨우 실마리를 잡아가는데 이제 와서 넘기라고?
- 나도 국장한테 가서...
- 실적을 넘겨서가 아니라 새로 오는 새끼들이 못 미더워서야.
- 휴.. 그런데 어쩌냐. 이미 그 쪽에서도 특수본을 꾸렸을 텐데.
- 개새끼들.
박 형사는 그답지 않게 냉정을 잃었다. 지훈 역시 갑작스런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 그래서 우리 보고 손 놓으라는 거야?
- 에휴.
박 형사의 말에 조 반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박 형사가 당장이라도 국장 방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였기 때문에 다음 말을 하지 못한 채 조 반장은 전전긍긍했다.
- 그럼 이제 저희는 뭘 하죠?
지훈이 날카로운 눈으로 조 반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 그게...
조 반장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박 형사 역시 조 반장을 보며 물었다.
- 공문대로라면 우린 천하에 죽일 놈들인데 우릴 어떻게 한대?
조 반장은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어 입을 열었다.
- 박 형사는 흑산도로 발령 났어. 작은 박 너는 정보과로 옮기면 되고. 나머지는 그냥 특수본 해체하고 원래 서로 복귀하면 되고.
조 반장의 말에 박 형사가 갑자기 큭큭거라며 웃기 시작했다.
- 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참을 웃다가 멈추고는 조 반장에게 말했다.
- 흑산도에서 홍어라도 잡으래? 미친 새끼들.
-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잠깐 머리 좀 식힌다고...
- 머리를 식히긴. 이거 냄새가 나.
박 형사의 말에 조 반장은 무안해 하면서도 좋게 얘기하려고 했다.
- 내가 자주 갈 테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마.
- 무슨 소리야? 내가 흑산도를 왜 가? 때려 치면 때려치우지 거긴 안 가.
- 이 사람아. 굽힐 때는 잠깐 굽히는 게 좋아.
- 조 반장! 너 이 새꺄. 지금 작은 박 제수씨도 실종이야! 굽힐 게 따로 있지.
조 반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훈을 보았다. 지훈 역시 표정이 일그러진 채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조 반장! 나 오늘부로 형사 때려치울 테니까 사표는 니가 대신 내라.
그러더니 박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박 형사. 왜 이래!
조 반장이 일어나 말리려고 했지만 박 형사의 걸음이 더 빨랐다. 조 반장은 계속 박 형사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지훈은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형사를 때려치우고 혜민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지훈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조 반장이 지훈을 보며 말했다.
- 일단 성준이가 그 쪽으로 가서 같이 일을 할 테니까 그 쪽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잖아.
조 반장은 최대한 지훈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얘기했다. 하지만 지훈이 오히려 더 냉정하게 말했다.
- 저는 아직 그만둘 생각 없습니다. 경찰에 있는 만큼 더 정보를 많이 얻을 테니까요. 그 때 가서 그만 둬도 됩니다.
지훈은 그렇게 말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휴게실 벤치에 앉아 있는 박 형사가 보였다. 지훈은 박 형사에게로 다가갔다. 박 형사는 지훈의 모습을 보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 내가 잡아 줄 거야. 걱정 마.
- 걱정 안 합니다. 다만 제가 흔들릴까봐 걱정입니다. 그런데 형님께서 버럭 화를 내고 나가시니까 오히려 제가 냉정해지던데요.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자식. 눈치가 늘었는데. 그런데 어쩌지. 너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열 받은 거야. 개새끼들.
- ....
- 작은 박. 잘 들어. 어차피 나는 흑산도로 발령났다는 건 옷 벗으란 얘기야. 그러니까 난 그만 두고 개인적으로 일을 추진할 테니까 너는 안에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만큼 모아.
박 형사는 고개를 숙인 채 은밀하게 지훈에게 말을 했다. 지훈은 조금 당황하여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박 형사님. 그래도 그렇게...
- 어차피 미련도 없었어. 이 일 마치면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려고 했거든. 딸도 걱정을 하고 있고.
- 네.
- 자네도 힘을 내고. 그나저나 형님께는 말씀드렸어?
- 뭐 그렇죠.
박 형사는 지훈의 가정사를 대충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테니 가족에게 말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얘기를 했다.
-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야.
- 뭐 그 집안에서 저는 원래 쭉정이 취급이었는데요.
- 그래도 아버지는 찾아가 보고.
- 지난번에 갔었는데,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더라구요. 제가 가는 것도 큰어머니께 죄송스럽구요.
지훈은 중견 업체를 갖고 있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의 자식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같은 사랑 얘기는 이미 잡지에서 넌더리나게 보아 와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지훈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지훈 역시 그 집안과 내왕을 거의 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버지가 쓰러지고 난 후에는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아버지와 쏙 빼닮은 지훈을 아버지는 본처 자식보다 더욱 귀여워하였다. 나중에 가업까지 그에게 물려 줄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는지 지훈은 집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고, 지훈이 경찰 대학교에 입학하자 아예 짐을 싸서 밖으로 내보냈다. 지훈의 입장에서는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안에서 멸시를 받는 것이 지겨워 밖으로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쓰러지자마자 돌변한 그들의 태도가 역겨웠다. 아무도 없을 때 한 번씩 아버지를 찾아가곤 하지만, 아버지는 벌써 2년째 의식이 없이 누워만 있었다. 다들 죽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지훈의 이복 큰 형은 얼른 자신이 그 업체의 대표 이사 자리를 꿰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쓰러지기 전에 지훈의 앞으로 얼마간의 돈을 마련해 주었고, 지훈은 그 돈으로 혜민과 결혼을 하여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나마 한 칸 가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