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8화 (2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6. 빼앗긴 사건(1)

6. 빼앗긴 사건

-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은밀하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오시다니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피터의 빈정거림에도 노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 마지막 부탁이다. 그 분을 원래대로 복원해드리게.

피터는 노인의 눈을 보았다. 지난 40년간 저 눈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새삼 느꼈다. 그러나 지금 그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앞에서 무기력하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재미있군요. 아버지.

피터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노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 아버지의 목적이 무엇이지요? 그 분을 통한 종교입니까?

피터의 나직한 말에 노인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냈다.

- 종교라니. 그 분을 내가 종교로 모시는 것처럼 보이나? 그 분은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레고리님의 혈육이야.

- 네. 그레고리님의 혈육이시죠.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 이 놈! 그레고리님의 혈육이라는 말은 우리의 근원이라는 말이다. 네가 그 분을 모욕하는 게냐!

- 모욕이라뇨. 저는 그레고리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 말씀이라니.

- 아시지 않습니까? 더 나은 인류, 더 나은 미래. 아무리 위대한 분이었다고 해도 이미 200년 전 일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은 상징이 아니라 실질이 필요한 때라고.

- 그레고리님보다 위대한 분은 없으셨어!

- 그렇겠죠. 하지만 현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 그런 하찮은 가능성에 의존해서 그레고리님의 의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 훼손이 아닙니다.

피터는 책상을 내려치며 일어섰다. 노인은 그런 피터에게 눈을 부라렸다. 피터 역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피터는 자신의 신념으로 그것을 억눌렀다. 노인은 여전히 노한 눈으로 피터를 쳐다보았다.

- 네 말이 맞다손 치더라도 그 분의 본체는 돌려놓아야 한다.

피터는 그 말이 억지임을 알고 있었다. 가능성의 여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최후통첩이리라.

- 본체를 돌리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노인은 단호했다.

- 4년이나 기다렸다. 이제는 그 분을...

뜻밖에도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피터는 지난 40년 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라는 것이 이미 말라버려 광기어린 눈빛만이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 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 안 돼. 이젠 그럴 수가 없어.

꼬장꼬장하게 서 있던 노인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터는 그런 노인을 쳐다보았다.

- 왜죠? 혹시 아버지 몸에 퍼진 암세포 때문입니까?

노인은 놀란 눈으로 피터를 쳐다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자기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무... 무슨 소리냐?

-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 저는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 영국에서 새벽에 떠난 사실조차도 저에게 보고되었으니까요.

- 네가 어떻게...

- 단순한 사실이지요. 상징보다 실리. 그것뿐입니다.

- 그가 허락하셨나?

- 네. 지난 번 전화 통화 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혹시 그렇다면...

- 아버지께는 안타깝지만 폐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다만 그레고리님의 직계 혈육이기 때문에 시신은 영구 보존할 예정입니다.

- 안 된다! 이 놈. 그 분은...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피터를 노려보았다.

- 내가 살아 있는 한 그건 안 된다.

- '그 분'의 의지입니다.

- 아니야. 내가 직접 확인해 보지. 내가 그를 직접 만나 볼 거야.

노인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다가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그러나 피터는 물끄러미 노인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 아버지께서도 이제는 물러나서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기침이 끝났는지 허리를 펴며 피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 그의 의지라고 확인되어도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노인은 그렇게 소리를 치고 문 밖으로 나갔다. 피터는 잠시 슬픈 눈으로 노인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피터는 수화기를 들고 잠시 멈추었다가 번호를 눌렀다.

- 준비하게.

짧게 통화를 끝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은 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 샘. 어제 말한 대로 하게나.

- 위험하지 않겠나?

- 위험이라...

노인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강한 어조로 말을 했다.

- 언제나 위험의 연속이었지. 하지만 이번엔 나도 준비를 하고 있다네.

- 자네가 그렇다면야.

-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았네.

노인의 말에 건너편에서는 낮은 흐느낌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다가 결의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레고리님을 위해 영광을.

노인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인지 그 말에 감동에 찬 얼굴이 되었다. 노인은 전화를 끊고 담담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복도 뒤에서는 몇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이미 그들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나가며 조그맣게 말했다.

- 그레고리님을 위해 영광을.

그 때 건장한 남자 둘이 홈즈 옆으로 다가왔다.

- 같이 가시죠.

홈즈는 그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들에게 말했다.

- 가세나. 어차피 기다렸던 일.

건장한 남자들은 노인에게 별 말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한 쪽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피터의 짓인가?

홈즈는 사무실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는 놀랍게도 '그'의 목소리였다.

- 아니네.

노인은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계음이 섞여 있었지만, 노인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 와 계신 겁니까?

- 아니네. 자네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던데.

- 그렇습니다. 그 분은 살려야 합니다.

- 음.. 홈즈. 자네는 자네의 증조부와 참 똑같아.

그 목소리는 그의 증조부를 아는 듯한 목소리였다. 홈즈라고 불린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 저는 증조부님을 모르지만, 증조부님의 뜻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그레고리님의...

그러자 기계음 목소리가 커졌다.

- 너는 그레고리를 모시는 거냐!

- 그레고리님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 우습군. 혈육이라. 그녀는 그레고리의 얼굴조차 모른다. 아니 그의 유전자만 받았을 뿐이지.

- 그게 무... 무슨...

- 그의 기억을 받은 건 나다.

- 알고 있습니다.

홈즈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기계음은 마치 그를 보고 있는 듯이 말했다.

- 후회하는 것 같군.

- 아닙니다. 다만...

홈즈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계음은 더욱 날카롭게 얘기를 했다.

- 다만이라... 그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겠지.

- 그건....

- 이해하네. 그 때야 실험체가 필요했을 테니. 다들 죽어 나가는데, 인도 거지 아이가 살아날 줄은 몰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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