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7화 (2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5. 비극적 암시(6)

- 하여간 자네는 정말 귀신같은 사람이야.

- 자네는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할 때 항상 변죽을 울리지. 그리고 정작 그 얘기는 감추고. 그런데 그 얘기가 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혀로 윗입술을 계속 핥아대지. 아니 그렇게 뻔한 행동을 하는데 뭐가 귀신이야.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다시 임 박사를 보았다. 지훈은 전에 박 형사가 얘기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아무리 서로 친분이 깊어도 그런 것은 쉽게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그런데 지훈의 놀람보다 임 박사의 반응이 더 빨랐다.

- 누가 형사 아니랄까봐 이그...

임 박사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에 놓인 프린트 한 장을 보여주었다.

- 세인트 조지 연구소와 연결된 병원들하고, 연구소들 목록이네. 다른 나라는 지금 수사하기 힘들 테니까 여기와 여기를 좀 더 알아보면 될 거야.

임 박사가 내민 프린트를 보고 박 형사와 지훈은 동시에 깜짝 놀랐다.

-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 왜 아는 덴가?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가 대답했다.

- 임혜민 씨, 제수씨가 혈액 검사를 했던 데야.

- 뭐? 보내온 봉투에는 그냥 미래 병원이라고만 되어 있던데?

- 나랑 작은 박이 갔었지.

- 그래?

- 이거 뭔가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데?

박 형사는 목록에 적힌 두 곳을 뚫어지게 보았다.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는 이미 지훈과 갔던 곳이었기에 알고 있었지만, 맥컬리 병원은 생소했다.

- 우리나라에 맥컬리 병원이라는 데도 있나?

- 맥컬리 병원? 아! 그거 신아 그룹에서 만든 병원 있지 않나. 거기에 미국 맥컬리 병원이 참여해서 만든 병원이지. 원래 이름은 신아 맥컬리 병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신아 병원이라고 하고, 외국에서는 맥컬리 병원이라고 하지.

- 그렇군. 그런데 세인트 조지 연구소는 여러 군데와 교류를 하는군. 유명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뭐 이렇게 많아.

- 거기 있는 병원들을 알면 자네가 놀랄 걸. 노벨상 받은 사람도 몇 명이나 연구를 하고 있지.

- 아무튼 고마워. 이제 좀 가닥이 잡히는군.

- 이거 어렵게 알아낸 거야. 하버드 의대에서 같이 공부하던 녀석한테 내가 조만간 미국에 간다고 하고 받은 거지. CSI에서 같이 근무한다고 얘기했지.

- 뭐? 자네 미국으로 가나?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임 박사는 그런 박 형사의 반응에 더 놀라 대답했다.

- 허! 내가 미국에 왜 가나? 미국엔 족발하고 소주 먹기 힘들어.

- 친구한테 사기친 거군.

- 사기가 아니지. 먼 훗날 약속을 먼저 한 것뿐이야.

- 하하하.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말이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임 박사 역사 그런 박 형사를 보고 같이 웃었다. 하지만 지훈은 프린트에 적인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라는 이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웃음이 잦아들자 지훈이 일어서며 말했다.

-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 섣불리 덤비면 아무 것도 못하고 다쳐.

박 형사의 말은 날카로웠다. 지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박 형사는 소파에서 기대어 앉았다.

- 그래도 이렇게 정보가 나왔으니까...

- 또 가서 경비원들하고 실랑이하게?

지훈은 선뜻 나서지 않는 박 형사가 내심 서운했다. 하지만 박 형사는 여전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지훈에게 말을 했다.

- 지금은 때가 아니야. 아니 우리가 섣불리 움직이면 그 쪽도 알아챌 수 있지. 우리는 지금 그 쪽을 알았지만, 그 쪽은 우리를 몰라. 그러니까 드러나지 않게, 그들이 모르게 접근을 해야지.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박 형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 글쎄. 아직은 없어.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는 날, 우리 둘이 죽거나 그 병원을 부숴버리거나.

박 형사는 그렇게 말하고 임 박사를 보았다.

- 아무래도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군. 자네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 도움은 무슨.

- 앞으로 소설같은 얘기는 그만 하고.

- 어허. 과학 수사를 몰라. 하여간...

- 과학이고 뭐고 간에. 자네랑 얘기하면 머리가 아파. 그 조그만 머리에 뭐 그렇게 많이 들어차 있는지.

임 박사의 대꾸도 듣지 않은 채 박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훈에게 말했다.

-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합숙하면서 일단 그 병원을 살펴보자고.

- 보고는....

- 보고는 확실할 때만 하는 거지. 아직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먼저 보고하면 괜히 일만 커질 수 있으니까. 일단 작은 박, 너하고 내가 먼저 조사를 해 보자고.

박 형사는 지훈과 함께 사무실 밖으로 나가며 임 박사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 자네 얘기 때문에 갑자기 이 사건에서 엄청나게 구린내가 나기 시작했어. 뭔가 있어도 크게 있는 것 같으니까 당분간 자네는 그냥 있어. 어디 전화해서 쑤셔놓지 말고.

임 박사는 그런 박 형사의 등을 탁치며 말했다.

- 자네가 걱정 안 해도 난 원체 소심한 사람이라 위험한 일은 안 하네.

-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간다.

박 형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번쩍 들었다. 지훈은 임 박사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임 박사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우울한 건 두 사람 똑같군.

처음 두 사람을 보았을 때 느꼈던 어색한 조합이 지금은 마치 두 사람이 원래 파트너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덩치에 박 형사의 뒤를 따르는 지훈에 뒷모습에서도 어느샌가 박 형사에게서만 풍기던 우울함과 괴기(魁奇)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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