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5. 비극적 암시(5)
탁자 앞에 앉자 마자 임 박사는 족발 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신이 나서 떠들었다.
- 아까 얘기했듯이 이게 아주 놀라운 일일 수 있다는 거야. 의학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야.
임 박사는 서둘러 소주 병뚜껑을 열고는 글라스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는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 캬~! 내가 이 맛에 여기를 못 떠.
박 형사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임 박사를 보며 말했다.
- 딴 데로 세지 말고.
- 흠흠. 아무튼 자네 식으로 조합을 하자면 사라진 사람들의 성별이 여자이고, 장기가 하나 혹은 두 개만 사라졌지.
임 박사는 족발을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유전적 성질이 비슷하고, 이미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렇다면 이게 뭘 의미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딱 결론이 나왔지.
- 그 결론이 뭐라는 거야?
- 장기 이식.
- 뭐? 그건 이미 아닌 걸로 결론이 났잖아.
박 형사는 김이 빠지는 것 같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왔는데 임 박사는 너무 뜬금없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 이 사람아. 누가 장기를 팔아먹는다고 했나? 이식을 한다고 했지.
- 팔아먹어야 이식을... 잠깐. 그럼?
- 이제야 알아먹는군. 아직 유전자 조작으로 장기를 만들기는 힘들지. 하지만 성체(成體)는 만들 수 있어. 아까 얘기했듯이 인공 수정으로. 그럼 왜 그 사람들을 인공 수정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식 수술은 왜 했을까? 생각해 보니까 대강 결론이 나오더군. 피해자들은 장기를 이식 받은 사람들이었지.
- 누구의 장기를?
- 그거야 모르지. 다만 누군가의 장기를 이식받은 것이지. 그게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하지만 그 이식을 받은 피해자의 조합으로 볼 때 한 사람일 가능성이 커.
- 한 사람이라고?
- 그렇지 않고서야 유전적 형질이 비슷한 사람들만이 피해자가 될 이유는 없지 않나.
- 그 이식 수술이라는 게 말야. 내가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런데... 유전적 형질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 걸 가져다 쓰면 되지 않나?
- 다른 사람 것을 가져다 쓸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럴 때에는 아무리 형질이 비슷하더라도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쉽지. 만약 사라진 모든 장기를 다른 사람 것으로 대체한다면 아마 면역억제제를 한 움큼씩 먹어야 할 걸.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건 역시 자신의 것이라네.
- 전에 자네가 뇌는 이식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 뇌를 이식하는 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안나 성이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녀는 다른 환경이 노출이 되지 않은 채 있었다면 말야. 전에 말하지 않았나. 안나 성은 마치 무균실에서 살았던 사람같다고.
- 그럼 어떤 사람의 뇌를 안나 성한테 이식했다가 다시 빼내갔다고?
- 그런 셈이지.
- 아무리 똑똑한 자네 말이라도 그건 좀 믿기 그런데. 그럼 연쇄 살인범의 정체가 장기를 이식해 준 사람이란 건가? 그리고 자기 장기를 가져가기 위해서 그녀들을 죽인 거라고? 아니 그럼 왜 시체들을 그냥 두고 갔지?
- 음.. 이것도 가정이네만.. 만약 그 사람이 엄청난 부자이거나 혹은 엄청난 권력자라면 어떤가? 굳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실력 좋은 사람이 한 둘인가?
- 그럼 시체들은?
- 그거야....
임 박사는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사람이 배후에 있다면 시신들을 그렇게 발견되기 쉽게 놔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 아무튼 자네 말은 어떤 돈 많은 미친 인간이 자신의 장기를 이식해 줬다가 그 사람들을 죽이고 다시 가져갔다는 거군.
박 형사는 수첩을 보며 또 물었다.
- 아까 자네가 다들 비정상적으로 IQ가 높다고 그랬지? 그리고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굳이 그렇게 만든 사람을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돈도 많이 들었을 텐데. 그리고 장기만 빼고 다른 장기를 이식해 주면 되지 않나? 자네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아.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말을 논리적으로 따졌다. 임 박사는 그러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까 얘기하지 않았나. 그냥 가정이라고. 사람이 뭘 그리 따져.
- 참나. 국과수 최고의 브레인이 왜 그러실까?
그 때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지훈이 한 마디 했다.
- 그거랑 세인트 조지 연구소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지훈의 말을 듣고 임 박사는 잊었던 것이 떠오른 사람처럼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 그렇지. 세인트 조지 연구소. 그 연구소가 의심스럽다는 거야! 그 연구소는 말야 처음에는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 유전자 연구를 했지. 그러다가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은 격인지 몰라도 잠재 유전자의 발현을 알아냈지. 그게 벌써 25년 전이야.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사이언스라는 잡지책을 보다가 벌떡 일어 났었다네.
- 잠재 유전자 발현?
- 잠재 유전자는 열성 유전자라고도 하지. 우성 유전자가 겉으로 들어나는 것이라면 열성 유전자는 안에 숨어 있는 유전자라네. 자네 혈액형이 BO형이면 B형으로 나타나는데 B형이 우성 유전자이고, O형이 열성 유전자지.
- 또 시작했구만.
- 아냐. 들어봐. 그런데 우성 유전자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지. 우성 유전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유전적 경향일 뿐이야. 만약에 유전병이 열성 유전자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유전병에 걸리지 않는다네. 유전병도 우성 유전자만이 병을 일으키는 거지.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 얼굴 좀 펴게. 다 끝났으니까. 그런데 잠재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우성보다 우성으로 만드는 것이지. 그러면 어떻게 되겠나? 우성 유전자가 열성으로 바뀌게 되겠지. 그럼 두 유전자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는 거지.
지훈은 그 말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우성 유전자가 열성이 되고, 열성 유전자가 우성이 된다면 단순히 치환이 아닐까요?
- 그게 생물의 신기한 점이지. 단순히 치환이 되는 게 아니지. 유전자라고 하는 게 단독으로 이 유전자는 코를 만들고, 이 유전자는 귀를 만들고 하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마련이거든. 그러니까 이 유전자는 코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저 유전자가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그런 관계망 속에 있다네. 쉽게 말하자면 열성 유전자가 우성 유전자가 되면 좀 비약을 하자면 전 유전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네.
- 이 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하나 하자면,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최초로 뇌와 직접 연관된 유전자 조작을 성공했지. 보통 쥐와 유전자 조작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유전자 조작 쥐가 보통 쥐보다 문제 해결 능력이 6배나 빨랐다네. 그건 정말 경이적인 실험이었지.
임 박사는 젊은 시절 사이언스지를 다시 읽는 것처럼 감회에 젖었다.
- 그럼 그 조작을 사람에게도 했다는 말인가요?
지훈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임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 했다, 안 했다는 모르지. 다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아무튼 현재는 거기가 제일 의심스럽단 얘기지.
- 자네 말은 알겠지만, 우리가 뭔 수로 영국에 있는 그 연구소를 조사하나? 혹시 자네가 조사 중인가?
박 형사의 말에 임 박사는 갑자기 능글대면서 말했다.
- 내가 어떻게 조사를 하나? 그냥 거기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고 전화는 해 뒀지.
- 그래? 그런데 자네의 그 공상 과학 소설같은 얘기를 들으라고 여기에 부른 건 아닐 테지?
- 공상과학 소설? 나름대로 합리적인 얘기야.
- 내가 들을 땐 말도 안 되는 얘기야. 그럼 장기를 빼낸 사람이 어떻게 살았어? 자네 얘기는 들을 때는 그럴 듯 한데, 듣고 나서 생각해 보면 구멍이 한 두 개가 아니야.
- 내가 그렇게 추리를 잘 하면 탐정을 하지, 왜 여기서 부검을 하겠나?
- 아무튼 이제 본론을 얘기해 보지.
박 형사의 말에 임 박사는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