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5. 비극적 암시(4)
- 어. 임 박사.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훈을 한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 곳으로 갔다. 아무래도 지훈 앞에서 지훈의 아내 얘기를 하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 혈액이 도착했는데, 이게 막내 와이프 건지 어떤지 모르겠군. 비교 샘플이 없으니까.
- 그래? 집 안에서 찾아낸 게 없으니까. 대상은 실종 상태고. 일단 그 언니랑 유전자 샘플은 같으니까 조사해 보긴 했는데, 같은 형제일 가능성이 99% 이상이라고는 나왔어.
- 그럼 된 거 아냐?
- 이 사람아. 이게 지금까지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던가. 아무 관련이 없는 그 두 여자도 유전자가 99% 일치했는데 말야. 물론 형제가 아니라면 유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 아무튼 어렵군.
- 지난번에 말했던 그 법의학자 있지 않나. 그 분께 문의를 해 보았더니 특이한 경우라고 하더군. 자료를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는데, 조만간 결과서를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일단 이 쪽은 대강 정리가 될 것 같네.
- 그러게. 범인을 잡는 일만 남았군. 그런데 그게 참..
- 왜? 무슨 일인데?
- 그게 한국에서 조사할 수 있는 거라면 뭐 대충 들이밀어서 까고 할 텐데, 이건 영국이다, 독일이다, 뭐 세계적으로 노니... 이거야 원.
- 영국은 뭐구, 독일은 뭐야? 독일은 그 뭐냐, 안나 성?
- 그것도 그렇고, 자네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수술 자국, 그거 조사해 봤더니 영국에 있는 세인트 조지인가 하는 데서 했다더군.
- 세인트 조지?
임 박사의 반문에 박 형사는 순간 무언가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꽉 막힌 갱도에서 서늘한 바람이 나오는 구멍과 같이 무언가가 보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좀 아나?
- 세인트 조지 연구소라면 내가 좀 알지.
- 세인트 조지 연구소? 아니 세인트 조지 병원.
- 글쎄, 세인트 조지 병원은 잘 모르겠는데.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는 잠시나마 느꼈던 명료함이 흩어져 버렸다.
- 그래? 수술을 받았으니까 병원이 맞겠지.
박 형사의 푸념 섞인 말에 임 박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 일반적인 수술이야 대부분 병원에서 하지. 하지만 특이한 사례나 연구 목적이 있다면 연구소에서도 수술을 한다네. 더군다나 세인트 조지 연구소는...
임 박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느려졌다.
- 왜? 뭔 일 있어?
- 아냐. 갑자기 세인트 조지 연구소 얘기를 하니까 떠오르는 게 있어서. 내가 조금 있다가 전화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게나.
임 박사는 박 형사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와서 앉았다. 한 30분 쯤 지나자 박 형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 역시. 그 곳이었어.
- 그 곳이라니?
임 박사의 뜬금없는 말에 박 형사가 반문을 했다.
- 물론 아직 가설이긴 한데...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지만 말야.
- 뭘 그렇게 뜸을 들여?
- 아무튼 그 피해자들 모두 하플로그룹 R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 그런데?
- 그건 자연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얘기지.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는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그리고 수첩을 펼쳤다.
- 계속 해봐.
- 자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인공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얘기지.
- 인공적? 그럼 뭐 만든다는 거야?
- 만든다라... 뭐 유전학적으로는 다른 거지만, 대충 그런 개념이야.
- 이 사람아. 아무리 도깨비 같은 세상이어도 사람을 어떻게 만드나?
- 그러니까 만드는 게 아니라 '인공 수정'으로 태아를 만드는 거지.
- 뭐 시험관 아기같은 거?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엔 그 사람들 나이가 좀 많지 않나?
- 이 사람아. 인공 수정은 19세기 후반부터 있었어. 체외 수정도 1970년대에 성공했고.
- 그래? 아무튼 그래서 그 여자들을 모두 만들었다는 거야?
- 세인트 조지 연구소가 유전자 구조 연구에서는 세계 제일이지.
- 어려운 말만 하지 말고 그래서 결론이 뭐야?
- 쉽게 말하면 단순히 인공 수정으로 '만든'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일세. 아까 전화 끊고 피해자들 신변 확인해 보니까 IQ가 모두 비정상적으로 높아. 그런데 일단 가설을 하나 세우자면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여인들일 수 있다는 거지.
- 유전자 조작? 그럼 그 사람들 부모가 부모가 아닌 거야?
- 어허. 앞서 나가지 말고. 이건 단순히 가설이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생각해 보면, 내가 계속 이상하게 생각한 부분인데...
임 박사가 말을 끊자 박 형사는 답답한 듯이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 뭔데 그래?
- 일단 여기로 좀 오게나. 지금 시간 되지?
- 기다려. 내가 족발에 소주 사갈 테니까.
- 어? 그럴래? 그래. 나도 출출하던 참인데.
박 형사는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은 여전히 서류들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이 이런 저런 조합을 만들고 있었다.
- 작은 박. 같이 가자.
지훈은 박 형사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 작은 박!
박 형사가 조금 더 크게 부르자 지훈이 놀라며 고개를 들고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나가자. 임 박사한테 잠깐 가보자구. 그 사람이 뭔가 찾은 것 같아.
안 그래도 서류 안에서 정보를 조합하는 데 신경 쓰느라 정신이 어지러웠는데 잘 됐다 싶었던 지훈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처 족발집에서 족발과 소주를 사고 국과수로 가는 차 안에서 박 형사는 임 박사와 한 얘기를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 가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자네가 예전에 했던 말 있잖아. 처가댁 식구 중에서 언니와 제수씨만 닮았다는 말. 그런데 피해자들 조사해 보니까 다들 부모하고는 거의 안 닮았더라고.
- 입양이나 그런 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렇겠지. 그런데 호적 기록이라는 게 나도 그렇지만 그렇게 믿을 게 못 돼. 난 호적 기록으로 따지면 군대에 4년간 있었지. 동사무소 여직원이 80년 제대를 81년으로 쓰는 바람에. 그래서 전산화한다고 그 난리들이겠지만.
- 그럼 입양한 기록이 누락되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지훈의 말에 박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 그런데 제 생각에는 박 형사님의 말씀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만 해도...
지훈은 아내 얘기를 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금이 너무 답답했다. 그런 지훈의 마음을 알았는지 박 형사는 지훈의 말을 끊고 자기의 얘기를 했다.
- 제수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의심이 가긴 하지.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모두 입양됐다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입양 여부를 보고 죽이는 것도 아닐 테고 말야.
- 음.
- 아무튼 이번 사건은 정보가 많은데, 도대체 정보들끼리 연결되는 게 없어. 골치 아픈 일만 계속 터지고 말야.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하던 지훈 역시 답답하였다. 그녀들을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왜 자신의 아내를 납치해 갔는지도 의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지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박 형사는 그런 지훈을 잠깐 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두운 거리에 켜진 가로등들이 일직선의 불빛을 내뿜으며 도로에 오렌지색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자신들이 추적하는 범인과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