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4화 (2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5. 비극적 암시(3)

박 형사는 지훈이 걱정되어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했다. 지훈은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박 형사는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지훈의 곁을 지켰다.

- 내 아내는 길 건너편에서 죽었어.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박 형사는 거실 소파 앞에 누워 있는 지훈을 향해 박 형사는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 그 녀석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지. 건너편엔 아내가 서 있었고.

그러다가 갑자기 박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냉장고로 가서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왔다.

- 그 때 생각만 하면 술 없이 잠을 못 자지.

지훈은 박 형사를 외면한 채 이불에 눈물을 적시고 있었다. 박 형사는 지훈을 부르지 않고 혼자 소파에 앉아서 소주를 잔에 따라 한 잔 마셨다.

- 그 자식이 나를 보고 웃었어. 나는 그 자식이 누군지 몰랐었지. 그런데 아내가 나를 향해 손을 들어 흔들었을 때 그 자식이 아내를 찔렀지. 그 잔인한 새끼는 피를 흘리며 저항하는 아내를 두 손으로 누르며 나를 보고는 씨익 웃었어.

박 형사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는 한 잔을 벌컥 마셨다.

- 난 미친 듯이 횡단보도를 건넜는데, 그 때 반대편에서 오던 차랑 부딪혔지. 다리가 꺾였는데, 나는 멈출 수 없었어. 그 새끼가... 그리고 비웃듯이 도망쳤지. 병원에 있는데 아내가 과다출혈로 죽었다고 하더군. 학교에서 온 딸이 나에게 분노를 퍼붓더군. 내가 죽인 거라고. 다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었지. 무기력하게. 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었지. 맞아. 내가 죽인 거였어. 그 자식. 나한테 걸렸던 조폭 똘마니였지.

박 형사는 그 때 생각이 나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또다시 혼잣말처럼 말했다.

- 그 새끼한테 사주한 새끼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가서 죽여 버리려고 했어. 그런데 조 반장이 말리더군. 딸을 생각하라고. 그리고 딸이 미국으로 떠났지. 가끔 전화는 오는데... 미안할 뿐이지.

지훈은 눈물을 닦고 일어나 앉아 박 형사가 따라 마시던 소주를 같이 마셨다.

- 저라면 가서 죽였을 겁니다.

- 그래? 그런데 나중에 딸이 그러더군. 잘 참았다고. 살인자 아버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그 말에 지훈은 침묵했다. 박 형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 힘들겠지만, 지금은 참아야 해. 누군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확실히 알게 되면 죽이지 않아도 죽을 만큼 힘들게 만들 수 있으니까.

박 형사의 섬뜩한 말에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박 형사는 지훈이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한 잔 마셨다.

- 아내를 찌른 새끼는 그 조폭 새끼 손에 죽었더군. 자기한테 화살이 오니까 처리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 조폭 새끼는...

박 형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 조폭 소탕할 때 조 반장이 그 자식 아킬레스건을 잘라놨지. 그리고 다른 조직 나와바리에 버렸더군. 얼마 전에 보니까 서울역 앞에서 앵벌이를 하고 있었어.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군.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신음성을 토했다. 박 형사가 조 반장과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었다.

- 그러니까 니 손에 피 묻히지 마라. 제수씨에게 약속했듯이 이건 내가 해결해 줄 일이야.

박 형사는 남은 소주를 벌컥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잠시 지훈을 쳐다보았다.

- 잠자긴 글른 것 같다. 한 잔 더 하자.

박 형사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더 꺼내 지훈과 자신의 잔에 따랐다. 지훈은 그런 박 형사가 내심 고마웠다. 자기의 얘기를 해 준 것도 그렇고, 범인을 잡아주겠다는 말도 고마웠다.

다음 날 아침에 경찰서로 가자 형사들이 지훈의 복귀를 반겼다. 고 형사가 빠진 자리에 지훈이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상황판 마지막에 자신의 부인 이름이 보였다. 그러나 어제처럼 울컥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이름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판도 이내 의식에서 사라졌다. 죽은 이들과 사라진 사람과 관련된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산더미같은 서류를 분류하고 분석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조 반장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 우라질. 난 노안이라 그런지 이젠 글이 안 보이네. 아함. 한숨 붙이고 와야겠다.

반장의 외침에 다른 형사들도 허리를 펴고 반장을 쳐다보았다. 그 때 최 형사가 목을 돌리며 말했다.

- 아, 죽갔구만. 나도 라면이나 한 그릇 말아먹고 와야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형사와 김 형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성준을 불렀다.

- 막내야 가자!

그러자 지훈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 전 됐습니다.

- 어? 이젠 너 막내 아냐. 저기 성준이가 막내지.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성준이 머리를 긁으며 지훈과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갔다 와. 눈치 보지 말고.

박 형사가 말을 하자 성준은 냉큼 최 형사 뒤를 따라갔다.

- 형님은 안 드십니까?

- 내가 라면 먹는 거 봤냐?

박 형사의 말에 최 형사가 손을 한 번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갔다.

- 피곤하지?

- 아뇨. 버틸 만 합니다. 형님이 걱정이죠.

지훈의 말에 박 형사가 지훈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훈의 입에서 처음으로 '형님'이란 말이 나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난밤과 지훈의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이 더 놀라웠다. 자기도 그 일에서 벗어나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는데, 지훈은 강한 힘으로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 뭔가 찾은 건 없어?

- 글쎄요. 아직 감이 잘 안 잡히는데요.

- 너 저번에 나보고 범인 어떻게 찾았냐고 물어봤지?

- 네.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돌려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니가 분류해 놓은 걸 보니까 우연히 어떤 사실이 하나 보이더군. 그게 잡힐 듯 하다 안 잡히는 거였었지. 살펴보니까 피해자들 모두 지인들의 생일이 있었지. 그럼 케이크나 꽃 등이 필요할 거 아냐.

- 그렇겠죠.

- 그래서 그 때 너한테 빵가게와 떡 가게를 조사하라고 했었지. 난 꽃가게를 돌아다니고. 그런데 니가 돌아다닌 빵가게 주인들 중 몇 명이 봤다 했지? 그런데 내가 돌아 다닌 꽃 가게에선 피해자를 목격한 사장들 없었지.

- 그럼, 케이크는 샀지만 꽃을 사지 않은 거로군요.

- 아니 사지 못한 거지. 그래서 생각해 보았지. 꽃 집 주인들 중에 범인이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서는 건 간단한 거야.

- 그런데 그 많은 꽃집 중에서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셨습니까?

- 노래방에서 발견된 여자애가 교복을 입고 있었지? 그러니까 일단 학교 밀집지역에서 이동이 힘든 거리의 꽃집은 제외하면 되지. 그리고 범죄 현장을 숨기기 위해서는 혼자 혹은 오래된 지인과 함께하거나 해야 하니, 새로 점원을 구하거나 했다면 그 곳은 제외해야 하지. 그랬더니 단 두 집이 남았지.

- 그래도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눈빛이야. 그 놈 집에 처음 갔을 때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 집 앞에서 잠복을 했지. 아니나 다를까 한 여학생이 들어가자 얼마 후에 문을 걸어 잠그더군.

- 눈빛이요?

- 누군가를 죽이는 데 거리낌 없는 자들의 눈빛. 언젠가 너도 보면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야.

지훈은 그런 눈빛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 일단 나머지 사건들의 교집합을 먼저 찾아야겠군요.

- 그렇지. 예전엔 나도 빠릿하게 돌아갔는데, 요즘은 둔해졌지. 아무래도 그런 교집합을 찾는 건 니가 나보다 나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지 공통점이 존재하기 마련이지. 아무리 작은 거라도 찾아내봐. 분명히 뭔가 더 큰 게 있어.

- 네. 그런데...

지훈이 다른 말을 꺼내자 의자에 기대던 박 형사가 지훈을 쳐다보았다.

- 그런데 형님은 왜 놈들을 잡을 때 발로 잡으시죠?

그러자 박 형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 경찰이 두 손 다 써서 범인 잡으면 수갑은 뭐로 채워? 일단 발로 밟아 놓고 잡는 거지. 특히 허벅지나 오금 부분을 밟아 놓으면 대충 정리되지.

- 아!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너무 단순한 사실이라 그동안 자신이 궁금해 했던 것 자체가 무안해졌다.

그 때 박 형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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