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3화 (23/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5. 비극적 암시(2)

수술실 안은 온갖 기계 장치로 연결된 사람이 누워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많이 비어 있고, 그 자리를 기계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사람이라고 보기 힘든 존재였다. 수술실 안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사방 어디에서건 수술 장면을 다 볼 수가 있었다. 무균실을 통과한 의사들이 수술 장갑을 낀 채 수술실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각자 기계 장치들이 올바르게 작동하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오려던 백발의 남자는 인터폰을 들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 왜 CS2에게서 장기를 적출하지 않은 거지?

음산한 기계음이 들리자 백발의 남자는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듯이 대답을 했다.

- 스펜서의 보고서를 보시면 아실 텐데요?

- 그건 가능성이지 않는가?

- 현재의 가능성보다 훨씬 높은 가능성이지요.

- 음. 그럼 어떻게 할 예정인가?

- 일단은 계획대로 해야지요.

- 알겠네.

인터폰을 끊은 남자는 무균실을 통과해서 수술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주변 의사들을 보며 말했다.

- 일단 폐를 제외한 다른 장기들을 연결하자구. 준비 됐지?

백발의 남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일사분란하게 수술을 진행했다. 비어있는 간의 자리에 냉동에서 녹은 간을 넣었다. 백발의 남자는 간과 연결된 대정맥을 조심스럽게 환자의 대정맥과 연결하였다. 내시현미경으로 보면서 차근차근 봉합을 하였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는지 남자는 잠시 어깨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심장 쪽을 연결하였다. 각각의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데 능숙하게 수술을 진행하였다. 그는 돌아보며 실린더에 담긴 대장과 소장을 보았다.

- 이제 큰 산 하나가 남았군.

백발의 남자가 위를 올려다보자 다른 팀은 안면에 있는 눈에 각막을 이식하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내시현미경을 썼다. 그리고 옆의 의사들이 겸자로 잡고 있는 조직을 벌려 대장과 소장의 이식을 하였다. 대수술이었지만, 그는 능숙하게 장기들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깔끔하게 봉합을 하였다. 열 시간이 넘는 긴 수술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지친 기색 없이 수술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백발의 남자가 수술 종료를 선언하자 환호하기보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수술을 마친 사람은 놀랍게도 여인이었다. 비록 얼굴을 비롯해 온몸에 꿰맨 자국이 있었지만,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수술을 마치자 그녀를 안에 두고 의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 수고했어. 가서들 쉬게나.

다른 의사들이 모두 흩어지자 백발의 남자는 자신의 사무실로 천천히 걸어왔다.

- 이제 깨기만 하면 되는데...

그가 의자에 앉았을 때 전화가 울렸다. 백발의 남자는 전화를 들었다.

- 피터, 수고했네.

늙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피터라고 불리는 백발의 남자는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 하하하. 제가 살면서 수고했다는 소리도 다 듣고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러나 늙은 남자의 목소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듯이 말을 이었다.

- 잘 한 건 잘 한 거지. CS2만 남았나?

- 아뇨. 이미 끝났습니다. CS2는 남겨둘 겁니다.

- 뭐.. 뭐라고?

늙은 남자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백발의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 CS2는 좀 더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폐는 다른 걸 이식할 예정입니다. 이 정도면 아버지께서 실수하신 것을 어느 정도 복구했다고 생각하는데요.

- 안 돼. 그 분은 완벽하게 복원되어야 해. 그 분 때문에 지난 4년을 맘 졸이며 살았다.

- 그거야 아버지 사정이구요. CS2는 아직 아닙니다. 스펜서 박사의 소견서를 보셨을 텐데요.

- 그런 천박한 결론으로...

- 천박하다뇨?

피터는 정색을 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 어쩌면 이 일은 우리의 과업에 커다란 획이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꿈은 여기까지입니다.

- 이 녀석! 당장 시행하라니까.

- 그 분의 의지도 있다고 말씀드렸나요?

피터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그.. 그가... 아닐 거야. 그가 그렇게... 그렇게...

피터는 자신의 아버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상징은 상징이지요. 이제 상징이 아니라 실질의 시대가 올 겁니다.

- 이 놈!

늙은 남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쳤다.

- 좀 더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피터가 전화를 끊자 늙은 남자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옆에 놓인 시거를 들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독한 향이 입 안에 퍼졌다. 30년 만에 피워보는 담배가 무척이나 썼다. 시거의 향이 입 안을 돌고 머리까지 퍼지자 늙은 남자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 상징은 끝났다라...

그리고는 옆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 샘, 나네. 그래. 수술은 다 잘 마쳤다고 하네. 그런데... 긴히 할 말이 있다네.

늙은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그 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늙은 남자의 목소리엔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이미 부질없는 후회라는 걸 알고 있는 듯 고개만 젓고 말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았다. 산 중턱에 있는 그의 성은 창문을 열면 온 세상을 내려다보듯이 아래의 광경이 넓게 펼쳐져 보였다. 높이 솟아있는 천장에 걸려 있는 샹들리에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늙은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세상을 호령하고 모든 이의 위에 군림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그 분의 의지라는 것에 받은 충격은 그 무엇보다 컸다. 그에게 있어서 그 분은 세상의 전부이고, 그녀는 세상의 전부를 안고 있는 보금자리였다. 그런데 세상의 전부가 보금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늙은 남자는 피우던 시거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바람에 날려가는 시거를 보았다. 그 시거는 마치 자신을 보는 듯 하였다.

-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늙은 남자는 벽에 걸린 인터폰을 눌렀다. 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헬기 대기시키게. 갈 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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