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2화 (2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5. 비극적 암시(1)

5. 비극적 암시

'아. 차가워. 온 몸이 아픈 것 같아. 눈이 떠지질 않아. 지훈 씨. 나 무서워. 지훈 씨.'

혜민은 눈을 떠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몸도 묶여 있는 것은 아닌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 것이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구지? 왜 나를...'

혜민은 머릿속으로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하려도 해도 자신을 납치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을 납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임신까지 한 여자를 집으로 쳐들어와 납치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그런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문까지 교묘하게 따고 들어와서 자신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잠재운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남편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일까? 아니면 혹시... 언니를 죽인?'

혜민은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 순간 못 견디게 지훈이 그리웠다. 지금쯤 자신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닐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배 안에 들어 있는 아이가 떠올랐다. 이 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길래 이런 시련을 당하는 것일까 하는 회한도 들었다.

'여기가 어딜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생각을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파악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눈을 뜨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다. 손을 움직여 자신의 아랫배를 만져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되지 않았다. 그 때 멀리서 마치 물속에서 얘기를 듣는 것처럼 먹먹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으려고 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검은 커튼이 닫히자 흰 가운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커튼 뒤에는 무언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모두들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 때 가장 가운데 서 있던 백발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 체크는 다 끝냈지?

그러자 수술용 장갑을 끼고 있는 여의사가 말을 했다.

- 심전도부터 영양 공급 상태까지 모두 체크 했습니다. 혈중 산소 농도와 온도도 매뉴얼대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발의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차트를 든 남자에게 말을 꺼냈다.

- CS2 샘플인 건 확실한 건가?

그러자 옆의 사내가 뭔가를 적은 기록지를 넘기며 말했다.

- CS1과 일치도가 99.99958%입니다.

- 다른 샘플과는?

- CR1과 CT1과는 99.99927% 일치합니다.

- 음. CS2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다는 건가?

- 아마도 CS1의 보고만을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CS1은 워낙 유능한 요원이어서 너무 쉽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허술한데?

- CS1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보고 했고, 시신까지 인계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기억나는군. 까맣게 타서 들어온 시신이지? 어쩐지 이상하더니만. 이제 아무도 믿지 않겠군.

백발의 남자는 혼잣말을 하듯 말하고는 다시 차트를 들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 다른 특이 사항은?

- 그게...

차트를 들고 있는 사내가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자 백발의 사내는 그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 다들 가서 내일 수술 준비 하지.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들이 다 물러나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 이건 아직 보고하지 않은 내용입니다만.

- 그래? 뭐지?

백발의 사내가 흥미가 있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차트를 들고 있는 사내는 차트를 몇 장 넘기더니 온갖 그래프가 있는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백발의 사내는 그 차트를 받아 들고는 잠시 놀란 표정이었다가 피식 웃었다.

- 이게 놀랍군. 하하. 이게 사실인가?

- 네. 오늘 톰슨 병원에서 온 자료입니다.

- 그래? 이거 참 우습군.

그러자 차트를 든 사내는 무언가 주저하듯이 말했다.

- 내일이 수술인데 이 사실을 보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음. 일단 이건 내게 맡기게. 내가 처리하지.

- 네. 알겠습니다.

- 그럼 자네도 가서 일단 내일 수술을 준비하지.

백발의 사내는 차트를 넘겨 다음 장을 보았다. 스펜서 박사의 견해가 적힌 내용이었다.

- 스펜서가 엄청 당황했군.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후훗.

백발의 남자는 차트를 덮고 커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검은 커튼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는 놀랍게도 대형 실린더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랫배가 조금 불룩한 여인 하나가 산소 공급 마스크를 쓴 채 실린더 안에 들어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백발의 사내는 마치 그녀에게 말을 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정말. 놀라운 아이야.

그러더니 손을 뻗어 실린더 안에 있는 그녀의 얼굴 부분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은 한없이 인자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 대단히 냉소적인 표정은 사라지고 마치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변했다.

- 잘 자랐구나...

백발의 사내는 그렇게 조그맣게 말하고는 실린더에서 물러나 커튼을 닫았다.

- 아직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군. 후훗. 재미있게 됐어.

백발의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실린더가 있는 방의 문이 닫히고는 실린더 안에 불빛이 옅은 하늘색으로 변하였다. 실린더 안의 여인은 몸에 전율이 흐르는지 몸을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은 이내 잦아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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