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21화 (2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4. 사라진 여인(6)

- 아무 것도 없어. 저 막내 형사 지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 그게 무슨 말이야?

- 머리카락 하나만 있어도 DNA 검사를 할 수 있는데, 온 집안을 이 잡듯이 뒤지는데 하다못해 안방 문손잡이나 화장실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어.

- 방에 있는 옷이나 그런 거에 남아 있지 않을까?

- 옷은커녕 화장품도 모두 사라졌어. 아무튼 여자와 관련된 모든 게 다 사라졌어. 이 정도면 거의 이사 수준인데 말야.

- 그래?

- 자네 말이 아니었으면 여기에 애초에 여자는 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 이거 골치 아프군.

- 이거 뭔가 이상해. 실종된 여자 DNA 조사해달고 하지 않았어?

- 그랬지.

- 두 여자 모두 실종이군.

- 음. 이거야 원. 도무지 갈피가 안 잡히니..

임 박사는 박 형사의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이거 생각보다 큰 거 같군. 단순히 한 사람의 짓이 아닌 거 같아.

- 그 이민영 엄마가 실종됐을 때만 해도 정보력이 뛰어난 미친놈 소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박 와이프가 실종되고 나니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 살인, 납치 조직이라... 그렇다고 조폭처럼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 그러게. 아참! 혈액 샘플은 받았나?

- 아직.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지 원.

- 이상하군. 대개는 다음 날이나 보내는데. 아무튼 잘 살펴봐 주게.

- 그래.

박 형사는 밖으로 나와 지훈에게로 왔다.

- 오늘은 나랑 같이 있지. 집은 현장 조사 때문에 들어가기 힘들 테니까.

지훈은 박 형사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래. 그럼 일단 차에 타 있어.

박 형사는 지훈을 차에 태운 후 조 반장에게 전화를 했다.

- 작은 박이 충격이 큰가 봐. 내가 일단 데리고 있을게.

- 그래. 뭐 지금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현재 용의자니까 신병 확보 잘 하고.

- 알겠어. 근데 뭐 좀 있어?

- 없어. 경비원들도 딱히 아는 게 없더라구.

- 아! 그리고 오늘 이사 오거나 이사 나간 집 있는지 알아봐 주시고.

- 이사? 그래. 알았어.

조 반장과 전화를 끊고 성준에게 말을 했다.

- 너도 일단 여기서 퇴근해. 내일은 바쁠 거니까 일찍 나오고.

- 네. 알겠습니다.

고 형사가 병원에 입원을 하자 임시로 성준은 박 형사와 파트너가 되었다. 성준은 본인 능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받아 들였다.

박 형사와 지훈은 차 안에서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분위기가 무거운 것도 무거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박 형사는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훈 역시 누구를 탓할 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느라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 내일은 그 병원에 같이 가 보자구.

박 형사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러자 지훈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박 형사에게 물었다.

- 혜민이 혈액 샘플은 도착했습니까?

- 아니. 그것 때문에 가 보자는 거야.

- 지금 가시죠. 거긴 나름 큰 병원이라 야간 진료로 할 테니까요.

박 형사는 지훈을 만류하려 했으나 옆으로 흘끗 본 지훈의 표정은 마치 지옥에라도 갈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말없이 그 쪽을 향해 갔다.

- 이 쪽 길 맞지?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의 위치를 모르는 박 형사에게 지훈은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그 목소리는 때론 떨리기도 했고, 때론 분노에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는 도중에 반장과 형사들의 전화가 왔다.

- 이사 간 집이 없다구? 목격자도 없고? 알았어. 내일 보자구.

박 형사가 전화를 끊자 차 안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자동차 시계가 10시를 가리킬 무렵 두 사람은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에 도착하였다. 지훈은 박 형사가 뭐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박 형사는 차에서 내려 지훈에게 소리쳤다.

- 작은 박! 아직 모르니까 사고 치지 마!

그러나 지훈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야간이라 그런지 로비는 환하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 외딴 곳에 응급으로 오는 환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병원은 고정 고객들 때문인지 야간 진료를 하고 있었다. 지훈은 안으로 들어가서 아내와 함께 들어갔던 의사의 진료실 쪽으로 갔다.

- 어떻게 오셨지요?

사설 경비 업체 직원인 듯 싶은 남자가 지훈에게 말을 걸었지만, 지훈은 그를 무시하고 진료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진료실 문은 잠겨 있었다.

- 함부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비업체 직원이 지훈을 제지하려고 하자 지훈은 그 사람의 손을 낚아챘다. 하지만 곧바로 들리는 박 형사의 목소리에 그의 손을 놔주었다.

- 작은 박! 뭐하는 거야!

경비업체 직원은 지훈이 손을 놓자마자 무전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무전 연락을 했다.

- 골치 아프군.

박 형사는 지훈의 곁으로 다가갔고, 곧이어 경비원들이 몇 명 뛰어왔다.

- 강남서 박상철입니다. 조사할 게 있어서 나왔습니다.

박 형사는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직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책임자인 듯 한 사람이 박 형사 앞에 섰다.

- 무슨 일이시죠?

- 그게... 여기에서 혈액 샘플을 보내주시기로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요.

- 아! 그러시면 이층 사무실로 올라가시죠. 제가 금방 알아보겠습니다.

책임자는 박 형사와 지훈을 이층 사무실로 안내했고, 어디론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왔다.

- 아! 임혜민 씨 혈액 샘플 말씀하시는 거죠?

임혜민이라는 이름에 지훈은 울컥하였다. 하지만 박 형사는 차분하게 얘기를 했다.

- 네. 맞습니다만, 시일에 꽤 돼서요.

- 조금 있으면 담당자 분께서 오실 겁니다.

보안 책임자가 그렇게 말하고 나가자 곧이어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러고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 안녕하세요.

명함을 받은 박 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여기는 혈액 샘플 보내는 데 꽤 오래 걸리더군요.

-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번에 제대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직원들이 정신이 없어서 담당자가 잊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 그 여의사는 어디 있습니까?

지훈의 적의에 가득 찬 말에 의사는 놀라며 말했다.

- 지금은 퇴근하고 없습니다. 그 과장님 잘못이 아니라 발송을 늦게 한 저희 직원의 잘못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에 바로 보내겠습니다.

박 형사와 지훈은 그 곳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왔다. 박 형사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며 건물을 쳐다보았다.

- 무슨 수용소 같은 분위긴데? 병원 냄새도 없고. 뭔가 이상하군.

박 형사의 말이 지훈은 들리지 않는지 혼자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혜민과 이곳에 같이 온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박 형사는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더니 구석 화단 쪽으로 던져버렸다.

- 작은 박. 가자.

지훈은 박 형사에게 이끌려 차에 올라탔다. 차 시트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박 형사는 말없이 시동을 걸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냥 여기를 전에 와본 것 같아서요.'

지훈의 머릿속에는 혜민의 말이 맴돌았다. 혜민이 사라진 것이 그 곳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훈은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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