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3화 (13/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3. 냄새가 나지 않는 사건(2)

그날 저녁 박 형사는 비닐 봉투에 족발과 소주 네 병을 사서 임 박사가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향했다. 임 박사나 사건 때문에 가끔 오는 곳이지만, 병원 특유의 포르말린과 크레졸 냄새에 박 형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법의조사과 앞에서 '흠흠'하고 헛기침을 하자 안에서 임 박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와.

박 형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법의학서적이 가득 찬 책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 넓은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한 쪽 구석에 현미경이며, 시료 배합 기계들이 놓여 있었다. 박 형사가 들어가자 임 박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 타이핑을 치다가 박 형사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박 형사는 어정쩡하게 소파에 앉아서 비닐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렸다. 임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 형사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왔다.

- 배고프던 참인데, 잘 됐군.

임 박사는 구석에 쌓인 신문지를 펼쳐 탁자에 깔았다. 그리고는 박 형사에게 묻지도 않고 비닐 봉투를 찢으며 족발과 술을 꺼냈다.

- 인상 좀 펴라구. 아무리 어색해도 경위까지 단 사람이 쫄기는.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는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쪽에 놓여 있는 글라스를 꺼내오더니 소주 반 병씩을 따랐다. 임 박사는 박 형사에게 먹으라는 말도 없이 소주 한 모금을 마시더니 족발을 집어 먹었다.

- 기가 막히군. 거기 경찰서 앞에 있는 족발집이지?

- 그래.

- 가끔 거기 족발이 먹고 싶더라구. 아무튼 맛있어.

임 박사는 커다란 돼지족을 들더니 거기에 붙은 살을 뜯어 먹었다. 입가에 기름기가 묻어 번들거렸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지 잘도 먹었다. 박 형사는 임 박사가 먹는 걸 쳐다보았다.

- 어. 거참. 얼른 먹어. 먹어야 내가 어려운 얘기를 해도 머리 쓸 거 아냐?

- 아냐. 난 저녁을 먹어서.

- 이 맛있는 걸 두고 저녁을 먹었다고? 어허. 배가 불렀어.

그러더니 임 박사는 게걸스럽게 족발을 뜯어 먹었다. 한참을 먹더니 트림을 꺼억하고 하고는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

- 급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맘 편히 먹겠나.

이미 족발을 거의 다 먹고는 임 박사는 박 형사를 타박했다. 박 형사는 임 박사의 그런 행동이 고마움의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피식 웃었다.

- 중요한 일이 뭐야?

- 어허. 사람이 뭐 그렇게 급해? 그렇게 급해 봤자...

뒷말은 얘기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박 형사의 급한 성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임 박사는 항상 박 형사 앞에서는 느긋하게 행동을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냉정하고 올곧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었지만, 박 형사와 있을 때만은 농담도 잘하고, 가끔은 실없는 소리도 해댔다.

- 알았으니까 일단 얘기해 봐.

박 형사가 말을 끊자 임 박사는 자신의 컴퓨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박 형사를 불렀다. 박 형사가 본 모니터 화면은 뭔가를 분석한 내용이었다. 그것이 스펙트럼처럼 쭉 늘어져 있었고, 아래는 꺾은 그래프가 점차 상승하는 모습이었다.

- 이게 뭔지 알겠나?

박 형사는 임 박사를 한 번 쳐다보았다.

- 자랑하려고 이리로 부른 거야?

- 아니 형사 짬밥이 몇 년인데, 이걸 몰라. 이게 DNA 분석표라는 거지.

- 알았으니까 요점만 말해.

- 자네 말대로 DNA 검사를 다시 요청해봤지. 그 변태 새끼가 죽였다던 세 사람을 포함해서 했는데, 뭐 크게 중요한 점은 없었지. 그런데 그 세 명을 빼니까 아주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더군.

- 놀라운 결과?

- 일반적인 DNA 검사 말고 미토콘드리아 DNA(mtDNA)를 검사해 봤지. 이번에 미국에서 하는 최신 검사였어. 그런데 거기서 아주 특이한 점이 있었단 말야.

- 미토콘드리아 DNA? 어려운 말 하지 말고 쉽게 말해봐.

- 자, 잘 들어 보게나. 인간이 만들어질 때는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하게 되지. 이건 알지?

- 그건 알겠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 자네야 생물학에 대해 문외한이니까 쉽게 얘기하지. 인간이 될 때는 정자랑 난자가 만나서 수정란이라는 걸 만드네. 그런데 그 수정란은 정자의 꼬리가 잘려 나가서 정자의 핵과 난자가 융합하는 거지. 다시 말해서 핵, 사람의 핵심을 만드는 건 정자와 난자지만, 그 겉에 껍질을 구성하는 건 오로지 난자로만 이루어지지. 그러니까 수정란의 세포질은 100% 난자에서 유래하는 거야. 그런데 이 세포질에는 미토콘드리아가 있는데, 이것은 100% 난자, 다시 말해 엄마한테서만 받는 거야.

- 그래. 알았으니까 생물학 강의는 그만하고, 그게 어떻다는 건데?

- 어허. 이 사람. 척하면 착하고 알아들어야지. 이 미토콘드리아 DNA는 무조건 모계 유전 방식으로 전달된다네. 이제 여기부터 이상한 점이 나타나는데, 한국인은 모계로 따지면 대부분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하플로그룹(HaploGroup) A나 B에 속한단 말일세. 하플로그룹이란 건 말야, Y-염색체 (Y-DNA) 하플로그룹하고 미토콘드리아 DNA 하플로그룹이 있는데, Y-염색체 하플로그룹은 아버지한테서 아들에게로 전달되는 것이니까 이 피해자들하고는 상관이 없지. 그래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조사한 거지.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유전자 물질 사이에서 혼합되지 않고, 재조합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네.

- 그런데 그 피해자들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어떤데?

박 형사가 흥미를 갖고 다가서자 임 박사는 더욱 신나서 얘기를 했다. 술이 한 잔 들어가니 얘기가 더 술술 나왔다.

- 그런데 살해된 모든 여성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하플로그룹 R에 속해 있다네. 이게 뭘 말하는지 알겠나?

- 그게 뭘 말하는데? 그냥 다른 그룹이라는 거 아냐?

- 그렇지. 다른 그룹이라는 거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토콘드리아 DNA는 하플로그룹(HaploGroup) A나 B에 속한단 말일세.

- R 그룹은 없나?

- R 그룹은 대개 유럽 토박이나, 중동에서만 나타나지.

- 그럼 그 피해자들의 엄마가 유럽이나 중동 사람이라는 건가? 외형적으로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 모두 R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중에 간이 없어진 조영아와 심장이 없어진 이민영은 DNA 구조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네.

- 생김새는 다르던데.

- DNA 구조와 생김새는 별개지. 쉽게 얘기하자면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형제들의 얼굴이 다를 수 있지 않나. 그거랑 마찬가지야.

박 형사가 그 말에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 말하자면 그 여자들은 모두 미토콘드리아 DNA가 하플로그룹 R에 속하는데, 하플로그룹 R은 유렵이나 중동 여자들한테서 많이 나오고, 두 명의 DNA가 유사하다. 결국은 그거 아닌가?

-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 그게 뭐가 중요한 거지? 사람이 죽었는데. 그리고 그들 부모나 친척들이 있잖아.

- 이 사람보게.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거지. 그리고 그 부모나 친척들은 DNA 검사를 안 하지 않았나? 입양이나 다른 방법으로...

박 형사는 그 때 수첩을 꺼내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 고마워. 그리고 또 없나?

- 그리고는.. 아.. 이것. 가장 단순한 건데, 그 세 명을 빼고 나머지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AB형이었어. 뭐 단순하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DNA 결과랑 같이 보니까 뭔가 꺼림칙해서.

- 혈액형이 일치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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