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2. 또 하나의 죽음(5)
혜민이 혜연과 헤어지고 집으로 올라온 것은 삼 일 후였다. 정기적으로 있는 산부인과 진료 때문이었다. 혜민이 가봐야 한다는 말에 혜연은 아쉬운 듯이 혜민의 손을 잡았고, 자기는 며칠 후에 영국으로 가노라고 말했다. 혜연은 혜민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혜연이 가자 혜민은 뭔가 아쉽고 허전하였다.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는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산부인과로 향했다. 산부인과 진료를 마치고 나온 혜민은 입구에서 만난 지훈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오늘 늦는다면서요?
- 사랑하는 부인이 진료를 받는데 늦으면 안 되지.
지훈의 말에 혜민은 입을 삐죽 내밀며 '피~'하고 얘기했다. 지훈은 뒤에 숨겨놓은 꽃다발을 혜민에게 내밀면서 물었다.
- 아이는 어떻대?
혜민은 다소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 문제래요.
혜민의 말에 지훈은 당황하여 혜민의 팔을 붙잡았다.
- 뭐? 어디가? 왜?
당황하는 지훈을 보고 혜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 당신 닮아서 너무 건강해서 문제래요.
- 놀랐잖아!
- 자긴 좀 놀라도 돼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서 지훈에게 건네주었다. 아기 초음파 사진이었다.
- 뭐야? 이게 우리 애라고? 에어리언 같아.
지훈이 사진을 보고 말하자 혜민이 지훈의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 에이. 어차피 못 듣잖아.
- 왜 못 들어요? 얘도 다 듣고 기분도 느껴요.
지훈은 허리를 숙여 혜민의 배에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 어이구. 미안합니다. 아들.
- 네? 아들이라구 생각하는 거에요?
- 당연하지.
- 난 딸이었으면 좋겠는데...
- 아냐. 이 녀석은 아들이야.
- 피. 어떻게 알아요?
- 난 형사거든. 직감이 아들이라고 그러거든.
- 아들이든 딸이든 나 배고파요.
- 그래,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차피 사건도 끝났고, 전화기를 꺼둬야지.
지훈은 전화기의 전원을 끄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지훈과 혜민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레스토랑 안은 한가했다. 그 안에 앉은 두 사람은 오랜만에 여유롭게 식사를 했다.
- 처형은 그래서 돌아갔어?
- 며칠 후에 영국으로 출국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사이에 진해랑 부산, 뭐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나 봐요. 밥 한 끼도 못해줬는데...
혜민이 아쉬운 듯이 말하자 지훈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 그러게. 아쉽네. 다음번에 오실 때에는 내가 꼭 시간을 비워둘게.
- 그래요. 그런데...
혜민이 말끝을 흐리자 지훈은 의아한 듯이 혜민을 보았다.
-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그래요. 왠지 언니가 평소랑 다르게 좀 서두는 것 같기도 했고... 뭐 바쁜 사람이니까. 기분 탓이겠죠. 원래 임신하면 기분이 오락가락 한다고 그러더라구요.
- 하긴 바람같은 분이잖아. 금방 또 오시겠지.
- 아까 전화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구요. 바쁜지.
- 그래, 이따 내가 전화해 볼게. 아기 선물 인사도 할 겸.
- 네.
두 사람은 마치 연애 때처럼 서로 웃으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도 여느 연인들처럼 꼭 붙어서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시고 했다.
집으로 들어오자 혜민이 초음파 동영상을 보여준다고 지훈과 함께 컴퓨터에 앉았다. 산부인과 홈페이지에 접속하고는 로그인을 하자 혜민이 오늘 찍은 초음파 동영상이 나왔다.
- 어라? 이 자식 움직이네?
지훈이 동영상을 보고 말을 하자 혜민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지훈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자 지훈은 놀라면서 말했다.
- 이게 이 녀석 심장 소리라는 거지? 하하하.
동영상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광고처럼 화면이 하나 떴다.
'제대혈 보관 프로그램.'
지훈은 그냥 광고이려니 하고 넘기려고 했는데, 혜민이 그 화면을 클릭했다.
- 제대혈이 뭐야?
- 네, 탯줄에 있는 피래요.
- 그 피로 뭐하게?
- 그게 그 피에는 아기의 모든 유전자 정보가 들어 있대요. 저번 달에 백혈병 걸린 애기가 제대혈을 이식받아서 치료가 되었대요.
- 그래?
- 우리도 보관해 볼까요?
- 필요한 건가?
지훈의 시큰둥한 반응에 혜민은 적극적으로 말했다.
- 아기를 위해서 하는 건데요.
화면의 다음 페이지로 넘기던 혜민이 박수를 탁 치며 말했다.
- 어머. 여기 이벤트 하나 봐요. 프로모션 행사로 5쌍한테 무료로 보관해 준대요.
지훈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 그래두.. 한 번 해 봐요.
지훈은 혜민의 성화에 제대혈 회사를 살펴보았다.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생소한 회사였지만, 그 모회사가 생명 공학으로 유명한 휴먼 바이오사였다.
- 휴먼 바이오사에서 하는 거네요. 여기 유명하잖아요. 지난번 수술도 휴먼 바이오사 계열 병원에서 했다고 하던대.
혜민은 그녀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필요한 양식에 내용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 화면에서 유의 사항에 나왔다.
'이벤트에 당첨되지 않으시더라도 태아 DNA 검사는 무료로 진행됩니다.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로 오시면 됩니다.'
수첩을 꺼내 혜민은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 이 날 가서 DNA 검사 한 번 해 보려구요. DNA 검사하는 것도 10만원이 넘더라구요.
지훈은 아이에게 정성인 혜민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혈육이라고는 언니 외에는 없는 그녀였기에 아기가 생겼을 때 혜민이 누구보다 기뻐했던 것을 알고 있는 지훈은 그녀의 호들갑이 더욱 예뻐 보였다.
- 그 날 비번 잡아서 같이 가자.
- 정말요? 그러면 나야 좋죠.
- 그래. 약속할게.
박 형사는 서재에 앉아서 나머지 사건 파일들을 펼쳐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전혀 살인 사건의 피해자라고 보기 힘든 사진들이었다. 모두 그냥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박 형사는 세 명의 사진을 빼고 나머지 사진들만 배열을 하였다.
- 묘하군. 전혀 관련없는 사람들인데 닮아 보여.
박 형사는 전화기를 꺼내 임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임 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이. 박 경위.
- 경위 말 좀 그만 해. 오늘도 낯간지러워서.
- 경위를 경위라고 하지. 뭐하라고 하나?
- 아무튼 그 시신들... 뭐 좀 있나?
- 음. 글쎄. 거기서는 세 사람 밖에 없었어.
- 세 명?
- 그래. 나머지는 안 나왔어.
- 세 명뿐이라는 거지?
- 나머지는 버렸을 수도 있지.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 어이. 과학 수사를 주장하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 과학이고 나발이고, 아이고. 골이야.
- 분 것도 현재는 세 명 뿐이야. 꽃가게 원래 주인은 실종 상태이고.
- 그럼 혹시 나머지는 다른?
- 뭐 대충 그런 것 같아. 그런데 다른 건 뭐 없어?
- 아직 검사 중인데... 뭔가 있는 것 같아. 특히 뇌는 독일에서 활동하던 조각가라고 하더라고.
- 독일?
- 인터폴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름이 '안나 성'이라고 하더라구. 나이는 32세.
- 독일 조각가가 왜 한국에서 죽었을까?
- 그거야 모르지.
장난처럼 주고받던 대화에서 임 박사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박 형사는 임 박사에게 은밀하게 이야기를 했다.
- 음... 일단 덮어둬. 내가 달라기 전까지는.
- 자네 말대로 덮어두긴 할 텐데 너무 오래 걸리진 말라구.
- 오케이.
- 그나저나 이번엔 자네 반장으로 올라가는 건가?
임 박사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 그런 거 관심 없어.
- 이 사람아. 승진을 관심으로 하나? 자네 나이도 생각하라구.
임 박사의 말에 박 형사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 자네보다는 팔팔해.
- 아냐. 겉으론 팔팔해 보여도 속은 다 곯았을 거야. 전에 내가 말했던 건강검진을 받았나? 안 받을 테지.
- 알았어. 시간 되면...
박 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 박사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 오늘은 좀 쉬어. 아니 오늘 수사 종결 발표하고 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
- 뭔가 찜찜해서 그래.
- 아무튼 부검 결과 나올 때까지는 자네도 손 놓고 있게.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 건강검진...
-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중에 전화해.
- 어허. 사람하고는...
박 형사는 낯간지러운 칭찬에 머쓱해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내가 사고로 죽고, 딸마저 미국으로 가버린 후에 박 형사는 유일한 지기(知己)인 임 박사와 가까워졌다. 임 박사는 박 형사의 날카로움과 철저함에 반했고, 박 형사 역시 엘리트답지 않은 소탈함과 사려 깊음에 늘 고마워했다. 두 사람은 성향도 전혀 다르고, 모든 환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였다. 얼마 전 박 형사가 이번 사건으로 너무 피곤해 하자 종합검진을 받아보라며 자신의 친구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박 형사는 임 박사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에 고마움을 느꼈다. 늘 혼자 있는 집에 소주와 안줏거리를 사서 찾아오는 것도 대부분 임 박사의 몫이었다. 박 형사에게 임 박사는 형이자, 보호자이자,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다. 임 박사와 전화를 마친 박 형사는 사진들을 펼쳐 놓으며 수첩에 내용을 적었다.
'여자들, 닮음, 심장, 대장과 소장, 간, 뇌. 뇌는 이식 불가능. 나머지는 가능.'
그러고는 수첩을 접었다. 그 순간 누군가 건물 건너편에서 이쪽을 주시하는 느낌이 들어 박 형사는 찡그려 그 쪽으로 쳐다보았다. 희미한 그림자가 사라졌다. 박 형사는 창가로 다가가 건너편 건물 쪽을 훑어보았다.
- 응?
박 형사는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는 1년이 다 되었지만, 워낙 집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집 주위에 관심이 없던 터라 그 건물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박 형사는 밖을 훑어보고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오랜만에 방에 누워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는 이렇게까지 적막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왠지 자신이 외롭고 초라해 보였다. 박 형사는 눈을 감고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형사가 되었을 때부터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딸을 낳았을 때, 그리고 아내가 죽게 되었을 때까지.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