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2. 또 하나의 죽음(4)
지훈이 속을 쓰다듬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형사들이 푸석한 얼굴들로 들어왔다.
- 어이 막내. 어제 많이 달리더만.
최 형사가 지훈의 등을 툭 치자 지훈은 순간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지훈은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 하하하. 아직 적응이 덜 됐구만. 이 정도로 화장실 행이라니. 제복에 묻히지 말고 와!
순간 사무실 안에서는 지훈의 모습을 보고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 때 조 반장이 안으로 들어와서 분주하게 서두르며 말했다.
- 막내 어디 갔어?
그러면서 부산스럽게 책상 위에서 서류철들을 정리하였다.
- 무슨 일이죠?
박 형사가 반장 옆으로 다가가서 묻자 조 반장은 서류들을 눈으로 쭉 보면서 대꾸했다.
- 씨벌놈들. 안 될 때는 존나게 조지다가 범인 잡았다니까 매스컴 브리핑인가 뭔가 하라네.
조 반장은 갑자기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지훈을 찾았다.
- 막내는 어디 간 거야?
- 화장실 갔습니다.
고 형사의 대답에 조 반장은 박 형사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 싫겠지만, 그냥 가서 뒤에 서 있기만 하면 돼.
인상을 찌푸리는 박 형사를 외면한 채 조 반장은 계속 지훈을 찾았다.
- 막내는 똥을 만들어서 싸나? 왜 안 와?
- 똥이 아니라....
그 때 지훈이 사색이 된 얼굴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훈을 본 조 반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너 보고서 어디다 뒀어? 보고서는 다 썼지?
지훈은 지난 밤 조 반장이 귀가 닳도록 떠들어댔던 보고서를 술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을 했다. 속은 뒤집히고, 술을 깨지 않아 어지럽고, 졸음까지 쏟아지는 상황에서 작성한 것이라 뭐라고 썼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 네? 쓰긴 했는데, 아직 검토를...
- 검토고 자시고, 얼른 가서 출력해 와.
지훈은 조 반장의 말에 자리에 가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새벽에 쓴 보고서를 불러왔다. 한눈에 보아도 오타 투성이에, 말도 안 되는 얘기도 있었다.
- 조 반장님, 조금 손을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조 반장은 시계를 쳐다보다 지훈을 보며 말했다.
- 11시까지니까.. 한 30분 정도 시간 되니까 얼른 고쳐. 니가 쓴 게 기사로 나가는 거니까.
지훈은 그저 보고서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쓴 내용이 보도 자료로 배포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자 자기가 써 놓은 모든 내용이 이상해 보였고,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내용은 수정을 해도 그 자리였고, 계속 오타가 나곤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 형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짜식. 소설을 써야지. 일어나봐.
고 형사는 자리에 앉더니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내용을 술술 써내려갔다.
- 형님, 왼쪽 대퇴부에요? 오른쪽이에요?
고 형사가 외치자 박 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 왼쪽.
- 두 발?
- 응.
그러더니 혼잣말로 '칼은 메스가 좋겠군. 그리고...'하며 옆에 놓인 서류들을 쓱 쳐다보고, 지훈의 보고서를 보며 내용을 넘겼다.
- 어제 보니까 형님 오른손에 상처 있던데?
박 형사가 오른손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참치 캔에 벤 거야.
- 어쨌든 날카로운 거에 벤 거 아니유.
'메스에 오른손이 살짝 베이는 상처를 입고,'를 쓰더니 지훈을 흘끗 한 번 보았다. 지훈은 고 형사가 왜 자신을 보는지 잘 몰랐으나, 고 형사는 이내 혼잣말로 말했다.
- 범인에게 복부를 가격당해 약간의 복통 기미가 있음.
고 형사의 말에 지훈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조 반장이 다가와서 고 형사에게 말했다.
- 끝났어?
- 네.
- 출력해.
프린터에서는 그럴 듯하게 꾸며진 보도 자료가 나왔다. 조 반장은 흐뭇하게 쳐다보면서 고 형사에게 말했다.
- 넌 형사 말고 소설가 해라. 범인은 못 잡는데, 하여간 꾸미는 건 기가 막히다.
고 형사는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에 머리를 긁었다.
- 막내, 가자. 넌 그냥 내 뒤에 서 있으면 되니까. 박 형사 가자.
서울 지방 경찰청 대회의실에서는 기자들의 입회하에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 ... 원래 주인이었던 여 사장을 무참하게 살해하여 유기한 후, 꽃집 주인으로 가짜 주인 행세를 하면서 꽃을 사러온 부녀자를 납치, 살해, 유기를 하였습니다. 수술 실력이 탁월하여 유명한 의사였던 범인은 불법 시술 혐의로 병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반사회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되어....
원래는 간소하게 범인을 잡은 형사들에 대한 포상만을 할 예정이었으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 브리핑 이후에 포상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박 형사는 이런 자리가 딱 질색이었고, 지훈 역시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얼떨떨했다.
- 연쇄 살인범을 검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지훈은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범인을 잡는 건 박 형사 혼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은 박 형사의 파트너였다는 사실만으로 포상을 받는 것이 민망했다. 이러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형사는 시상식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경찰청장이 조 반장에게 상장을 수여하고는 박 형사에게로 다가왔다. 박 형사는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상장을 받았다.
- 이번 연쇄살인범 검거에 대한 공적이 크네.
- 과찬이십니다.
총장은 박 형사에게 허리를 숙여 귓속말을 했다.
- 자네 반장 승진 건이 누락된 건 들었네. 내 이번에 자네의 경위 특진을 임명했네.
-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팀원들이 수고해 준 결과라 생각합니다.
총장은 박 형사의 어깨에 손 올리며 말했다.
- 허허. 그래?
총장은 박 형사와 대화를 나눈 후 지훈에게로 다가왔다. 지훈은 처음으로 받는 상장이었기에 무척이나 긴장을 하였다.
- 자네도 이번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지? 경찰대를 우수하게 졸업하고도 형사 지망이라니 자네같은 사람이 귀감이지.
-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박 경사를 도왔을 뿐입니다.
총장은 웃으면서 반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 자네 팀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남다르군.
조 반장은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총장은 대답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훈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 잘해 보게.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커.
사무실로 조 반장과 박 형사, 지훈이 들어오자 구석에서 자장면을 먹고 있던 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 총장님 상장 한 번 봅시다.
고 형사가 너스레를 떨며 다가오자 조 반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 이거 박 경사, 아니 오늘 특진 했으니까 박 경위님 덕분에 상장도 받고.
조 반장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으로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 형님, 특진 하신 겁니까? 축하합니다.
고 형사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치며 박 형사를 축하해 주었다.
- 막내도 특진했나?
아직 경장인 김 형사가 지훈에게 말했다.
- 아닙니다. 저는..
멀리 있던 최 형사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 막내마저 특진 하면 김 형사보다 두 단계 높은 거 아냐?
- 에이. 형님도.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형사들이 부산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박 형사는 조용히 한 쪽 구석에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 형님, 오늘같은 날 왜 뭐 씹은 표정이슈?
형사들 사이에서 나와 고 형사가 물었다. 박 형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담배만 연신 피우다가 지훈을 향해 소리쳤다.
- 작은 박! 목욕탕이라도 가자.
조 반장은 점심 뭐 먹을까를 형사들과 실랑이를 하다가 박 형사의 말을 듣고 소리쳤다.
- 어이! 밥 먹자구.
박 형사는 지훈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가자는 목욕탕은 가지 않은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 박 형사님, 아니 박 경위님..
박 형사는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 짜식. 낯간지럽게 경위님은... 오늘은 들어가 봐.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박 형사는 오늘 분위기상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지훈을 먼저 집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지훈은 박 형사가 승진을 하고 분위기도 좋은 상황에서 먼저 가기가 민망했다.
- 아닙니다. 오늘은...
- 됐고. 들어가 봐. 내일부터 또 밤새야 될지 모르니까.
지훈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아내가 지난밤에 한 말이 떠올랐다.
-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래. 제수씨한테도 건강하라고 전하고.
무뚝뚝한 박 형사가 자신의 와이프에 대해 말을 하자 지훈은 박 형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환하게 웃은 후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