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2. 또 하나의 죽음(1)
2. 또 하나의 죽음
- 용의자 조사는 어떻게 됐지?
이틀 동안 자료들과 씨름을 하느라 박 형사와 지훈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목욕탕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온 것이 전부였다. 박 형사의 묻는 말에 지훈은 지난 밤 고 형사가 넘겨준 서류를 보고는 조금 낙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 전과 같습니다. 건물 관계자들은 전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경비원은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깊이 잠들었구요. 의심 가는 점이라면 그 여자의 신원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점뿐입니다.
- 그래? 그럼 이번에도 용의자가 없다는 말이군.
- 그런 것 같습니다. 피해자를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이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이나 친구 관계는?
- 고 형사하고 최 형사가 조사 중이긴 한데, 아직 뭐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특이한 건 피해자 중 세 명이 고아라고 하더구요.
- 고아라...
- 부모가 대부분 차 사고나 비행기 사고로 죽었답니다. 병으로 죽은 사람은 없구요.
- 이거야 원.
- 자! 그럼 이젠 사건을 재배열해 보자구.
지훈은 사건의 피해자들의 사진을 나열했다. 각 사진별로 일어난 순서에 따라 번호와 나이가 붙어 있었다. 박 형사가 사건의 정황을 놓고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1) 청담동 웨딩숍 앞에서 발견된 예비 신부 김예나(28, 부모 O) - 신장, 자궁
(2) 국회의사당 지하 창고에서 발견된 학생 이민영(17, 모 O) - 심장
(3) S여대 교수실에서 발견된 교수 최나연(35, 부모 X) - 대장과 소장
(4) 성북 룸살롱에서 발견된 대학생 조영아(24, 부모 X) - 간
(5) 종로 술집 화장실에서 발견된 모델 박민주(19, 부모 O) - 질을 포함한 성기
(6) 대치동 노래방에서 발견된 학생 오에리사(18, 부모 X) - 대장, 직장을 포함한 항문
(7) 인사동 갤러리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여자(?, ?) - 뇌
- 우선 청담동 웨딩숍, 국회의사당 지하 창고, S여대 교수실, 인사동 갤러리하고, 성북 룸살롱, 종로 술집, 대치동 노래방. 자 뭐가 보이지?
- 글쎄요. 단순하게 보자면 비유흥가와 유흥가 정도 되나요?
-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좀 더 세밀하게 보면 일반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나 '갈 수 없는 곳'과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나눌 수 있지.
- 그럼 이렇게 나눠보면 어떨까? 국회의사당 지하 창고, 종로 술집, 대치동 노래방하고, 청담동 웨딩숍, 성북 룸살롱, S여대 교수실, 인사동 갤러리.
- 음.. 피해자와 결부해서 본다면 앞에는 10대들이고, 뒤에는 20대 이상입니다.
- 맞았어.
- 그럼 다른 방법으로 한 번 보자고. 지역으로 보면 대치동 노래방, 청담동 웨딩숍, 인사동 갤러리는 강남에 있고, 성북 룸살롱, 국회의사당 지하 창고, 종로 술집, S여대 교수실은 강북에 있지.
- 지역적으로는 딱히 특색이 없는데요.
- 그런가? 하긴 뭐 길이야 다 이어져 있는 것이니.
박 형사는 배열했던 것을 지우고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러나 지훈은 수첩과 서류들을 뒤지며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 작은 박. 나 커피 한 잔 마실게. 뭐 마실래?
박 형사의 말에 지훈은 펜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 아냐. 하던 거 마저 해.
박 형사가 밖으로 나가자 지훈은 조사하던 것을 마저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 어쩌면 이거...
지훈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서류들에서 다른 공통점을 뽑아보았다. 그들은 출신 학교나 주 활동 지역도 서로 일치하는 것이 드물었다.
박 형사가 커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 작은 박. 담배 있나?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바람 좀 쐬려고 했는데.
- 여기 있습니다.
박 형사는 담배를 물고 불을 댕겼다. 그리고는 지훈에게 '피워도 된다'는 손짓을 했으나 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정리한 문서를 펼쳐 보였다.
- 박 형사님, 이건 제가 추측해 본 건데요. 이 사람들 중에 이민영, 최나연, 조영아를 하나로 묶고, 김예나, 박민주, 오에리사를 하나로 묶어보는 것입니다.
박 형사는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 이들이 무슨 공통점인데?
지훈은 사진을 보면서 하나씩 숫자를 말했다.
- 이 사람들은 155, 152, 160. 그리고 이 사람들은 125, 102, 110. 신원 미상은 알 수 없구요.
- 키는 아닐 테고. 속 시원히 말해 봐.
- 천재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죠. 고등학교 학적부에서 발견한 것들인데요.
박 형사는 또 뭐라고 하는 표정으로 의자를 뒤로 젖혔다.
- 살인자가 IQ 보고 죽이나? 뭐 앞의 사람들은 천재들이네. 그런데 뒤에는 아니잖아.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 짜식. 너. 경찰대 나온 거 맞구나!
지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그 때 뭔가를 만든다는 말씀에 나눠 보았는데요.
-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여기 다시 봐봐. 사람별로 묶어보니까 대충 보이는구만.
박 형사는 사진을 다시 배열하면서 말했다.
- IQ의 문제도 있지만, 뒤쪽 애들 봐봐. 얘네들 없어진 게 뭔지 봐봐. 앞의 피해자들은 심장, 대장과 소장, 척추 전 부분, 뇌가 없어졌어. 그런데 뒤의 피해자들은 신장하고 자궁, 질을 포함한 성기, 대장하고 직장을 포함한 엉덩이 부분이 없어졌지. 그리고 사는 지역도 조영아랑 얘네들하고, 오에리사랑 얘네들하고...
- 그럼 혹시?
박 형사는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변태 새끼란 말이지.
그리고는 박 형사는 지훈이 보던 서류들을 훑어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썼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거 묘한데?
- 네? 뭐가요?
- 음. 얘네는 아니고, 얘는... 아빠, 여동생, 형부...
박 형사는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며 적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그럼 범인 잡으러 가 볼까?
지훈은 박 형사를 따라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 범인이요? 벌써 어떻게...
- 누가 지금 잡으러 간다고 했냐?
- 그럼...
- 넌 여기랑, 여기 근처에 있는 가게들 돌아다니면서 얘네 사진만 가지고 가서 물어봐.
박 형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본 지훈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 네? 여기는 사건 현장과는 완전히 다른 곳인데요?
수첩과 총을 챙기던 박 형사는 지훈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말했다.
- 아무튼 가서 물어봐. 나도 근처에 있을 테니까 뭔 일 있으면 전화해.
박 형사의 표정을 본 지훈은 박 형사와 마찬가지로 총을 가슴에 차고는 일어섰다. 박 형사의 굳은 표정을 보니 박 형사는 이미 범인의 흔적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박 형사가 밖으로 나가자 지훈은 자신의 후배인 성준에게 전화를 했다.
- 네. 선배님.
- 성준아. 이따가 내가 전화하면 출동해라.
-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박 형사님이 실마리를 잡은 거 같거든. 전화하면 잽싸게 상황 보고 하고 출동해라.
- 아! 그래요? 그럼 제가 상황실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 오케이.
지훈은 재빨리 문 밖으로 뛰어나가 박 형사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