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1. 연쇄 살인 사건(5)
지훈은 처음 혜민의 집에 갔을 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혜민의 어머니라고 하기엔 다소 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장인 역시 젊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두 사람 모두 상당한 동안(童?)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혜민은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하면서 사진을 보여줬지만, 지훈은 고개만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프랑스에서 돌아온 언니를 보자 지훈은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자매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니 어쩌면 쌍둥이로 태어나서 한 사람이 나이를 좀 더 먹고, 한 사람은 덜 먹은 것으로 보였다.
두 사람이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을 때 지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훈은 핸드폰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 나 참. 오늘은 연락하지 말라니까.
지훈은 그냥 핸드폰을 놔둔 채 혜민을 쳐다보았다. 그런 지훈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민이 말했다.
- 급한 일일 수도 있잖아요. 받아 봐요.
- 급한 일일까 봐 안 받는 거야.
- 그래도 형사가 전화를 안 받으면 어떻게 해요. 사람이 다칠지도 모르는데.
혜민의 다그침에 지훈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전화를 받고 있는 지훈의 표정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혜민은 그런 지훈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지훈이 전화를 끊자 혜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중요한 일인가 봐요. 언니한테는 내가 잘 얘기할 테니까 가 봐요.
혜민의 말에 지훈은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 미안해. 오늘은 꼭 같이 있고 싶었는데.
- 아니에요. 언니야 다음에 또 만날 수도 있는데요. 그리고 급한 일 같던데 빨리 가 봐요.
혜민을 안타깝게 쳐다보던 지훈은 아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나갔다. 찻집에 혼자 남은 혜민은 부리나케 나가는 지훈의 모습을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 또 언니 잔소리 듣겠네.
아니나 다를까 언니에게 연락이 와서 만난 자리에서 혜민은 또다시 지겨운 잔소리를 들었다.
- 대한민국에 경찰이 제부 하나밖에 없어?
- 남편이 이번에 맡고 있는 일이 중요한 일이어서 그래.
- 아무리 중요해도 저녁 먹을 시간도 없어?
- 내가 미안해. 갑자기 전화가 와서...
- 니가 왜 미안해! 그리고 남편 변명 좀 하지 말고.
혜연이 짜증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조용한 레스토랑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자 혜연 역시 잠시 민망해하며 소리를 낮췄다.
- 혹시 나 보기 싫어서 간 거 아냐?
- 설마. 오늘 언니를 만나려고 얼마나 준비를 했는데.
- 준비? 무슨 준비?
- 아니.. 그냥...
혜민은 무언가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혜연은 혜민의 손을 잡으며 다그쳤다.
- 무슨 일 있어?
혜연의 말에 혜민의 얼굴은 빨갛게 되었다.
- 사실... 언니 조카가 생겼어.
혜민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혜연의 표정은 잠시 당황과 놀람이 서렸다. 그러나 곧바로 혜민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평소의 언니답지 않게 부산스럽게 말을 이었다.
- 정말? 조카가? 아들이야, 딸이야?
- 아직 몰라. 이제 3개월인걸.
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혜민 옆으로 가서 앉아 혜민의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 요놈. 내가 만져보니까 딸인 거 같은데? 축하해!
- 고마워. 언니.
혜연은 마치 엄마의 표정으로 혜민을 안았다. 그러나 한 손으로 혜민의 머리를 쓰다듬는 혜연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하지만 혜민과 떨어졌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 다 먹었으면 나가자.
아직 음식이 반 넘게 남아 있었기에 혜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혜연을 보았다.
- 조카 선물 사러 가야지.
- 아니야. 언니. 아직...
- 너희 부부 말고 나한테 처음 생긴 가족이야. 너라면 밥이 넘어가겠니? 얼른 일어나.
그러나 혜연은 막무가내로 혜민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혜민은 언니 역시 조카가 생긴 걸 기뻐해서 들떴구나하고 생각을 했다. 밖으로 나온 그들은 혜연의 차로 올라탔다. 혜연은 혼자 콧노래를 하면서 핸드폰으로 아기용품 파는 가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 언니.
혜민이 언니를 불렀지만, 혜연은 검색 삼매경에 빠져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 잠깐. 잠깐. 여기가 좋겠다.
자동차에 시동을 건 혜연은 혜민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차를 몰기 시작했다.
- 제부는 뭐래?
운전을 하며 묻는 혜연의 질문에 혜민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 좋아하지. 언니처럼 이렇게 들뜨진 않았지만.
- 뭐라고? 자기 아이가 생겼는데 그랬단 말야? 이거야 말로 혼날 일이지.
- 호호호. 그런가? 이건 혼날 일인가?
- 그럼. 난 조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데.
- 고마워. 언니.
-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아빠, 엄마 그렇게 되신 후에 너나 나나...
그러다가 혜연은 자신의 입을 때리며 말했다.
- 이런 우울한 얘기는 태교에 안 좋아. 좋은 것만 얘기하자구.
혜연은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노래를 틀었다. 몇 개의 트랙을 넘기더니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 좋았어.
혜연은 들뜬 소녀처럼 행동을 했고, 언니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혜민은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즐거웠다.
곧이어 아기 용품을 파는 집에서 혜연은 아기 옷이며, 신발, 모자를 보며 연신 '귀엽다'는 말을 외치면서 사들였다.
- 모유 수유할 거야? 그래도 젖병은 필요하지? 목욕을 하려면 작은 욕조가 필요할 테고. 외출하려면 외출복도 필요할 거야. 아 참! 유모차도 필요하지? 그리고... 애 태우고 다니려면 카시트도 필요할 테고, 아! 차. 차부터 바꿔야겠다. 너네 차 솔직히 너무 작고 위험해. 아이를 태우려면 튼튼해야 돼.
그러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 그 거 튼튼하죠? 네. 그럼 계약해 주세요.
- 언니. 그건..
혜민이 말리기도 전에 혜연은 차를 주문하고는 혜민에게 말했다.
- 오늘은 나 말리지 마.
그러더니 혜연은 혼자서 흥얼거리며 가게를 헤집고 다녔다. 가게 점원에게 이것이 좋은지 저것이 좋은지 묻기도 하고, 고민되는 것은 두 개 다 사기도 하였다.
- 이거 몇 개만 포장해서 주시고, 나머지는 택배로 보내주실 수 있죠? 제 동생이 임신 중이라 무거운 거 들면 안 되거든요.
- 언니. 너무 많이 샀어.
- 많다고? 애 태어나면 이건 약과야. 안 그래요?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점원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 네? 네. 그렇죠.
- 거봐. 아직 멀었다니까.
너무 많이 사서 다 들고 갈 수도 없을 만큼 산 후에야 혜연의 쇼핑은 끝났다. 그리고 혜민을 태우고 혜민의 집 앞으로 갔다.
- 오늘 남편은 들어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혜연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응? 글쎄.
- 그럼 짐 올려다 놓고 내 방에서 같이 자자.
- 그래도 밤에라도 지훈 씨가 들어올지 모르는데...
- 잠깐.
혜연은 지훈에게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 네. 오늘 먼저 가서 죄송했습니다. 갑자기 급한 호출이 와서요.
- 알고 있어요. 그리고 축하해요.
-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둘 간의 어색하고도 딱딱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혜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 그런데 오늘 밤에 제가 혜민이 데리고 자도 되죠?
- 네? 그러세요. 안 그래도 혼자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 네. 그럼 아침에 데리러 와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혜연은 혜민을 태우고 자기가 한국에서 머물 때 사용하는 별장이 아닌 바닷가 근처로 갔다. 혜민은 차창 밖을 보다가 놀라서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 여기 언니 사는 곳이 아니잖아.
- 너랑 여행 겸 온 거야. 어차피 네 남편이 아침에 못 올 거 아냐.
- 그래도...
- 걱정 마. 내일 내가 전화할 테니까. 우리 여기서 며칠 지내다가 올라가자.
- 언니 일은? 언니 바쁘잖아.
- 내 일보다 동생이 더 중요해. 앞으로 배 나오고 그러면 더 돌아다니지도 못할 텐데 지금이라도 잠깐 가는 거야.
혜연의 말에 혜민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지훈과 결혼하고 나서 변변한 여행조차 다니지 못해 답답했는데, 언니와 함께 이렇게 무작정 떠나오니 오히려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 언니 고마워.
- 고맙긴.
바닷가 근처 호텔 앞에 도착해서 혜연이 로비에서 체크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피곤했는지 씻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 이렇게 같이 누워서 잔 게 벌써 10년도 넘었네.
혜민이 혜연의 품속으로 안기면서 말했다. 혜연은 혜민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 그러게. 어릴 때에는 내 방에서 곧잘 자더니만.
- 그랬었지. 그 때는 혼자 방에 누워있으면 왠지 무서웠거든. 그리고 꿈도 하도 괴상망측한 것만 나와서.
옛날 꿈이 생각이 난 혜민은 몸서리를 쳤다. 그런 혜민을 혜연은 끌어안으면서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시절부터 혜민은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것은 혜연과 지훈만이 아는 묘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불안해하거나 슬퍼할 때에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아져 쉽게 풀어졌다.
- 걱정 마. 내가 지켜줄 테니까.
혜연의 뜬금없는 말에 혜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언니도 얼른 시집가야지. 그런데 언니가 애기 가지면 나는 우리 집 기둥 뽑아야겠다.
혜연은 혜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혜민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언니의 반응이 없자 혜민은 그냥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얼마 후 혜연은 혜민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았다.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혜연은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 Interdum requiescendum.(때론 쉬어야 한다.)
전화기를 통해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혜민을 한 번 돌아보더니 붉은 차이나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에 들어온 혜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혜민의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