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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4화 (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1. 연쇄 살인 사건(4)

전날 오전.

- 이 작품은 태초의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빅뱅이 일어났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작가가 상상을 하며 조각을 한 것이죠.

잔뜩 짓이겨놓은 듯한 석고 위에 날카롭게 가다듬은 철근이 꽂혀 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형이상학적인 작품이었다.

설치 미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철거 현장에서 철근과 엉켜있는 콘크리트를 가져다가 전시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처형이 큐레이터가 아니었다면 지훈은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이런 기괴한 작품들만 있는 곳은 더욱 그와는 관련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국의 유명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지훈의 처형은 한마디로 수재(秀才)였다.

그녀는 지훈의 부인과는 여덟 살 차이로 지훈의 부인이 지훈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외국에서 하던 공부를 멈추고 돌아와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의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한 부분만 뛰어나기도 힘든데 지훈의 부인은 어린 시절부터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무 살에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하기도 하였고,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미술 역시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스물넷에는 발명 특허까지 보유하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하는 천재(天才) 소리를 듣고 자란 그녀가 스물여섯이 된 봄날 느닷없이 경찰과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했으니 집안에서는 지훈이 탐탁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더욱이 지훈은 경찰 대학교를 졸업한 인재(人才)였지만, 강력계를 지원하여 형사로 근무 중이었기에 가족들의 반대는 더욱 심했다.

하지만 지훈의 부인인 혜민은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훈에게 시집을 갔다. 집안과 의절하겠다는 그녀의 외침에 가족들은 모두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결국 결혼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혜민이 자신의 모든 재능을 포기한 채 지훈에게 시집을 가자 혜민의 언니인 혜연은 프랑스에서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했었다.

그러나 피는 역시 물보다 진한 것이었다. 혜연은 가족들과, 특히 혜민과 일체의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한국에 돌아왔다.

부모님이 뺑소니 사고로 죽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훈이 범인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지훈에 대한 인상이 다소 나아졌다.

그 후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냈지만, 일 년에 서너 번은 한국에 들어와 지훈과 혜민을 만나곤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동생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지훈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 있기는 하였다.

- 왔어?

혜연은 지훈과 혜민을 보고 손을 들어 다가왔다. 혜민은 그런 언니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말했다.

- 언니 정말 훌륭해! 내가 전시회장에서 본 큐레이터 중에서 가장 멋져.

혜민의 말의 혜연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 니가 했으면 더 잘 했을 거야!

그 말에 지훈은 고개를 외면하였다. 지훈 역시 혜민과의 결혼 과정에서 혜연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았기에 처형이었지만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다.

- 작품 구경은 잘 하셨어요?

아직 지훈이 어색한 혜연은 존대를 했다.

- 네. 그런데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다소 어렵더군요.

지훈은 나름 살갑게 말하려고 했지만, 평소의 말투가 딱딱하고 거칠어서 그런지 부드럽게 말을 하진 못했다.

- 아마 그러실 거예요.

지훈에게 간단하게 대답을 한 혜연은 혜민을 보며 말했다.

- 오늘 저녁 때 시간 되지?

혜연의 말에 혜민은 고개를 끄떡였다.

- 응. 그런데 오늘은 시간 돼? 일주일동안 들어와서 전화만 하고는.

혜민은 오랜만에 만난 언니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말했다. 언니에게 오늘은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미안. 전시회 준비로 바빠서 그랬어. 이따 그럼 전화할게.

- 그래. 그럼 우린 밖에서 기다릴게.

- 왜? 안쪽에 좋은 작품 많아. 더 구경하고 가지.

- 아니.. 그냥.

혜연은 혜민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 예술 작품에 관심이 많은 혜민이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보지 않겠노라고 하는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 그럼 내가 여기 마무리하는 대로 전화할게.

혜연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가자 혜민이 지훈을 보며 말했다.

- 고마워요. 이렇게 같이 와 줘서.

- 고맙긴. 그나저나 여기는 정말 자기한테는 안 좋은 환경이네. 아무리 예술작품이라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지훈을 보며 혜민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눈을 반짝이며 지훈을 쳐다보던 혜민은 갑자기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언니가 뭐라고 할까요? 기대되는 대요?

- 뭐... 글쎄.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는 지훈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혜민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 얼른 나가요.

혜민은 지훈의 손을 끌고 갤러리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봄 햇살을 맞으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예전 두 사람이 데이트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길가를 따라 걷다가 예뻐 보이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 오랜 만이네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혜민이 말했다. 그 말에 지훈은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이 들었다.

- 미안. 이렇게 자주 나와야 하는데...

- 훗. 됐네요! 밤에 자다가도 호출 때문에 뛰어나가는 사람이 느긋하게 이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같이 앉아서 차를 마시니까 참 기분이 좋아요.

혜민은 오월의 햇살 아래에서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그런 혜민을 바라보는 지훈 역시 마음이 노곤하게 풀렸다.

- 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혜민의 말에 지훈은 손사래를 쳤다.

- 안 되지. 지금 시간이 멈추면.

지훈의 말에 혜민이 지훈의 팔뚝을 꼬집으며 말했다.

- 에이. 무뚝뚝하긴. 당신하고 이렇게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거에요.

- 그런가?

지훈은 또다시 뒤통수를 긁었다. 혜민은 그런 지훈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 언니를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해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혜민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 불쌍하다고?

- 네. 저렇게 혼자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외로울 거에요. 언니는 나보다 더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 처형이? 내가 보기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데?

- 피! 그건 당신이 언니를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언니가 나 시집갈 때 왜 그랬는지 모르죠? 언니가 나보고 같이 공부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자고 했거든요. 어렸을 때는 그러자고 했었는데, 내가 배신한 거죠. 당신 때문에.

- 그럼 언니는 배신감 때문에 반대한 거라고? 에이. 그건 말이 안 되는데.

- 아무튼 언니를 보면 참 좋아요. 어쩌면 돌아가신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 엄마라. 하긴 당신은 장모님보다 처형을 빼다 박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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