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축신
필 포든은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과의 8강 전을 경험한 선배들의 말을 떠올렸다.
“살면서 그렇게 빠른 인간은 본 적 없어.”
“그는 혼자서 우리 팀 11명과 맞섰고, 이겼어.”
“내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선수인지 알았어.”
래시포드가 그랬고, 린가드가 말했으며, 당시 세계 최고 스트라이크였던 케인이 질투했다.
그의 대표팀 선배들은 전상욱을 같은 인간으로 표현하지 않는 듯했다. 그 이상. 무슨 로봇이나 함께 맞서 싸워야 할 괴물 같은 것으로 묘사했다.
“적으로 만났으면 좆 됐다고 생각해라, 필.”
러시아 월드컵 이후 인테르 시절 상욱과 맞붙었던 래시포드가 했던 말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앓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래시포드는 상욱을 메시 이상 가는 선수로 평가하고 있었고, 포든은 감히 축구사 지존(至尊)으로 불리는 메시와 20살짜리 아시아 선수를 비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위에만 있어. 알아서 이겨 줄 테니까.”
본인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어 대는 상욱을 본 필 포든은 사실 100% 믿진 못했다.
지금 이 스코어를 어떻게 뒤집는단 말인가. 게다가 상대는 보통 팀도 아닌 지역 라이벌 맨유인데 말이다.
[래시포드가 다시 한번 공 잡고 올라갑니다. 오늘 경기 최고의 활약 중인 선수인데요!]
[왼쪽으로 돌파하는데- 와아! 진이!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 있을까요!]
래시포드도 속도로 정평이 난 선수이나 상욱에겐 미치지 못했다.
분명 상대보다 뒤에 있고, 더 늦게 뛰었던 상욱이었으나, 그는 순식간에 오른쪽 터치 라인을 따라 미친 듯이 내려오더니 슬라이딩하며 상대의 공을 빼앗았다.
[완벽한 태클! 아마 진은 풀백을 했어도 세계적인 선수가 됐을 겁니다!]
[공만 건드렸습니다! 자, 다시 빌드업해 나가야 합니다! 맨시티는 다시 흐름을 가져와야 해요!]
후방 빌드업이나 @역습을 통해 흐름을 빼앗아야 한다는 해설의 주장과 달리, 상욱은 흐름을 가져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크로스인지, 슈팅인지 아니면 그저 공을 멀리 보내려는 건지.
상욱이 공중으로 띄운 공은 그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진이 상대 진영으로 길게 올려줍니다. 다소 긴 것 같은데요. 어······! 어! 이거 기회입니다!]
[순식간에 선수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포든이 깔끔하게 공 잡아내고요! 최종 수비는 바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경기를 압도하고 있는 포그바 브루노 페르난데스, 래시포드 등을 모두 벙 찌게 만든 상욱의 크로스는 곧 앞서 달려 나가는 필 포든의 발에 떨어졌고, 이를 뒤늦게 확인한 데헤아 골키퍼가 앞으로 뛰쳐나올 때, 옆으로 깔끔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한 골 따라붙습니다! 저런 크로스는 살면서 본 적도 없습니다!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진의 완벽한 어시스트- 포든의 깔끔한 마무리입니다!]
[진짜 농담이 아니고요, 진한테는 공 자체를 주면 안 됩니다. 수비 진영에 있든, 터치 라인 끝에 있던 저 선수는! 언제 어디서든! 골을 노릴 수 있는 선수예요!]
방금 상욱의 어시스트는 맨유 선수들에겐 꽤 타격이 컸다.
축구는 흐름이다. 지금 흐름은 분명 맨유가 가지고 있었고, 이를 조금도 빼앗기지 않은 채 경기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저 아시안은 그저 크로스 한 번에 지금껏 맨유가 일궈왔던 모든 흐름을 박살 냈다.
“쫄지 마!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인 별거 아니야. 지금 흐름을 유지하면 돼.”
방금 실점에 얼어 있는 선수들을 격려하는 포그바를 보며 비웃는 상욱.
“운이 좋았다고? 그럼 한 번 더 보여 주지.”
전반 45분 이후 추가시간.
제대로 몸 풀린 상욱을 막기 위해 사방에서 진을 치는 맨유.
[지금 시티 중원에서 제 역할을 하는 선수는 로드리가 전부인데, 오늘 맨유는 로드리 같은 선수가 3명이나 있습니다.]
유일한 정상 컨디션 미드필더 로드리와 함께 위로 올라가던 상욱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맨유 미드필더들을 상대했다.
[진 혼자서 맨유의 중원 압박을 떨쳐 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포그바와 프레드가 압박해 가면서 들어오는데요. 진! 와아, 정말 저 선수는······.]
몸을 낮추고 공을 뺏으려 달려드는 포그바는 완벽한 마르세유 턴으로 지나치고, 바로 뒤에서 압박하던 프레드는 순간의 방향 전환으로 넘어뜨린 뒤.
곧장 상대 진영으로 질주했다.
[저, 저 선수들을 넘어뜨리는 데 5초도 안 걸렸습니다!]
[브루노가 뒤에서 커버하는데요! 속도가! 어림도 없죠! 상대는 역사상 가장 빠른 선수입니다!]
마지막 미드필더 브루노마저 속도로 제압한 상욱은 긴장하다 못해 겁에 질려 있는 맨유 수비수들을 보며 비웃음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었다.
[맨유 수비들이 겁난 게 보입니다! 저기 있는 수비수들도 세계적인 선수들인데 말이죠. 진······ 지인!]
메과이어는 EPL 수비수 최고액을 갱신하고 이적한 선수이며, 바란은 의심의 여지 없는 월드클래스 수비 중 하나이다.
상욱은 이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그들의 뒤로 재빠르게 스루 패스를 전달했고, 이들의 뒤로 다시 한번 포든이 득달같이 달려와 강하게 슈팅했다.
[다시 한번 포든이! 데헤아! 아! 골대 맞습니다!]
[진의 원맨쇼입니다! 펩의 전술이 어떻고, 맨유의 오늘 작전이 어떻고 의미가 없어요! 저 선수는 경기 흐름을 자기 멋대로 바꾸는 선수예요!]
전반이 끝난 뒤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직전 포그바와 맨유 선수들을 보며 외치는 상욱.
“후반엔 무조건 역전해 줄 테니까, 꼭 기다려!”
상욱의 으름장에 맨유 선수 누구도 이에 대응하지 못했으며, 포그바 정도가 욕설을 고압적인 태도로 짜증을 부렸으나 별 힘이 되진 않았다.
이들 앞에서 이죽거리는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으니까 말이다.
***
필 포든은 또 한 번 자신들의 에이스에게 감탄했다.
분명 같은 축구 선수인데 이상하게 상욱의 발이 공에 닿을 때마다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흐름을 가져오는 선수가 아닌 선수 본인 자체가 흐름인 선수.
그것이 전상욱이었다.
“필, 후반에도 자신 있지?”
전반과 같은 상욱의 질문에 이번엔 확신에 찬 포든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진, 네가 함께잖아.”
포든은 확신했다.
저 아시안의 자신감은 오만 따위가 아니란 것을. 그는 오만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
“지금 스코어는 진 혼자서 억지로 만들어 낸 거지. 사실 경기는 0:2, 0:3으로 지고 있어야 정상이야.”
라커룸에 들어선 펩이 한숨을 내쉬며 선수들을 지도하고 교육했다.
경기 자체가 밀리고 있다. 원정 경기에 오늘 상대 미들진 컨디션이 대단히 좋은 건 알겠으나, 그것은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경기력은 용납 못 한다. 라인 더 올리고, 공간 만들어. 최대한 맨유 놈들을 압박하란 말이야!”
마레즈, 로드리, 워커 등 오늘 경기 부진한 선수들 몇몇에게 특별 지도 한 감독이 이내 더브라위너 쪽에 얼굴을 멈춘 뒤 중얼거렸다.
“후반엔 케빈이 빠지고 페르난지뉴가 들어간다.”
“가, 감독님······.”
“미안하다 케빈, 네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욕심이 났어. 후반엔 쉬거라.”
오늘 경기 최악의 활약을 보인 케빈 더브라위너.
평소 넓은 시야와 빠른 판단력으로 합리적인 볼 배급과 상대 허를 찌르는 킬패스로 상대 미들진을 부숴 버리며 세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는 그였으나, 오늘 경기는 컨디션 난조로 맨유의 압박을 조금도 뚫어 내지 못했다.
최대한 선수를 배려하는 투의 감독이었으나 이는 팀 내 주축 중의 주축 더브라위너의 속을 뒤집어 놓기 충분했다.
“감독님.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이대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음?”
“부탁드립니다. 후반엔 꼭 다른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장 감독의 말에 순응하고 따르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에 살짝 짜증이 난 펩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걱정 마세요.”
의미심장한 말투의 펩과 결의를 다지며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쉬는 게 어때? 케빈, 당장 다음 주 포르투전에 집중하는 게-.”
“진.”
진심으로 동료를 걱정하는 상욱의 말을 끊고 웃어 보이는 더브라위너.
“지금 공미 자리에서 뛰지? 난 너와 파트너로 뛰고 싶었다. 네 파트너 하디가 샘났어.”
“······어?”
“오늘 활동량은 부족하겠지만, 패스는 쓸 만하다. 그러니 날 이용해 줘.”
더브라위너의 말을 이해한 상욱이 큭큭 웃으며 그와 어깨동무하며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섰다.
“좋아. 대신 제대로 해야 해. 아니면 하디가 돌아왔을 때 무슨 말을 들은지 알겠지?”
“그건 죽기보다 싫군.”
***
[후반엔 진이 미드필더로 내려왔군요. 맨유와 대놓고 중원 싸움을 하겠다는 겁니다.]
[포그바가 프레드 쪽으로- 래시포드가 내려와서 받으면서 다시 브루노에게 연결합니다.]
서로 간결한 패스를 이용해 천천히 후방에서부터 전진하는 맨유.
[어, 이거 위험한데요! 브루노가 카바니 쪽으로 연결하는 공! 디아스가 재빨리 처리합니다!]
맨유의 재빠른 패스에 지속적으로 밀리는 맨시티.
페널티 라인 깊숙한 곳에 있던 카바니에게 연결되기 직전 수비수 디아스가 걷어 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위험한 상황이 또 나올 뻔했다.
맨유의 공격이 계속 이어질 때 이를 보고 있던 상욱이 중얼거렸다.
“아후. 축구를 왜 저렇게 답답하게 하는 거야? 케빈, 한 방에- 알지?”
“알겠어.”
오늘 경기 본인들의 장기인 티키타카와 빌드업이 안 되고 있던 맨시티. 펩 역시 이 상황을 알고 있었으며 그는 이런 위기 상황을 타파히기 위해 전상욱을 영입한 것이다.
[더브라위너가 공을 잡자마자 맨유 선수들이 압박해옵니다. 그대로- 아! 대지를 가르는 패스!]
자신의 진영에서 더브라위너가 쏟아 내는 대지를 가르는 패스. 이는 순식간에 맨유의 압박을 뚫어 내고 선수들을 전진시키기에 충분했으나, 다소 길었다.
[아, 패스가 조~금 긴 것 같습니다. 바란이 나와서 처리하는데에! 역시! 진!]
[대체 얼마나 빠른 겁니까! 저 선수는! 진이 공 잡고 뜁니다. 진은요! 원래도 빠른데 공을 잡았을 때 더 빠른 선수예요! 그대로오오오!]
어느새 나타난 상욱이 공을 앞으로 보낸 뒤 질주하면서 수비수를 완전히 따돌리고, 페널티 라인 왼쪽 부근에서 마침내 동점 골을 성공시켰다.
[동점!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마침내 동점을 만들어냅니다!]
[패스도 좋았고요, 골은 더 좋았습니다! 이런 게, 이런 게 바로 클래스라는 겁니다!]
동점 골이 들어갔으나, 상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후반 70분.
이번엔 왼쪽 측면에서 공을 잡은 상욱이 반대편에 있는 더브라위너 쪽으로 길게 전달했다.
[진이 길게- 전달하는 공, 오른쪽 페널티 라인에 있는 더브라위너에게 연결되고요. 그대로 원터치 패스!]
[마레즈 발에 걸립니다! 슈우우웃! 들어갔습니다! 아- 역전! 역전 골이 터집니다!]
폼 좋은 상욱이 내려와서 플레이하니 바로 중원에서 활기가 돋았다.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왼쪽 메짤라까지! 오늘 진은 하디 크루거의 빈자리를 완벽하다 못해 그 이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놔둬도 차이를 만들어 내는 선수입니다! 어찌 이 선수를 세계 최고라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젠 역전한 스코어를 가리키며 포그바에게 다가가며 이죽거리는 상욱.
“너도 맨체스터 선수인데, 식스 앤 더 시티가 무슨 말인지는 알지?”
< 식스 앤 더 시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