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밀월과 함께 춤을 (1)
2017-18시즌 이후 2년 만에 다시 1부 리그로 올라온 밀월FC의 이번 시즌 전망은 밝지 않았다.
3년 전 기적적으로 승격 후 바뀐 구단주는 팀 컬러를 바꾸기 위해 팀에서 뛰던 기존 노장 선수들을 모두 갈아치우고 젊고 어린 선수들로 팀을 꾸려 시즌을 시작했으나, 급조한 팀이 통할 만큼 EPL은 만만한 리그가 아니었다.
당시 팀을 맡은 베니테즈 감독은 17-18시즌의 반도 지나기 전에 경질당했고, 이들은 최근 10년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다시 챔피언쉽으로 강등당했다.
그 후 한 시즌을 더 헤매며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밀월은 다시 라파 베니테즈를 선임했고, 곧바로 1부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생존한다.”
1부 생존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캐치프라이즈를 가지고 시즌에 돌입한 밀월이었으나, 예상외로 영입에 난항을 겪으며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이 되지 않았으며, 베니테즈 감독의 너무도 독단적인 모습에 선수들과 불화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개막전 상대는 현 세계 최고의 공격수를 품은 맨체스터 시티.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팬들은 맨시티의 대승을 예상했으나, 라파는 예상외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기자단 앞에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인 베니테즈 감독. 이에 사람들이 의외라며 흥미를 보였다.
“축구공은 둥급니다, 90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죠. 더군다나 시즌 초반엔 더더욱요.”
베니테즈의 말도 마냥 허황되진 않았다.
이적생 전상욱과 하디 크루거가 대단한 선수는 맞으나 이적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고, 시티 대부분의 주축 선수들이 유로 2020을 치르고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력적으로도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컨디션과 조직력이 완연한 시즌 중반이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면 밀월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수비 전술 하나는 일가견이 있었던 베니테즈는 단단한 수비로 시티의 공격진을 틀어막으면서 한 방을 노릴 생각이었고,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베니테즈는 맨시티전을 위해 말 그대로 칼을 갈고 있었고, 승리를 위한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있었다.
밀월의 유일한 불안 요소라면 전생의 소속팀에 대한 복수심을 가진 아시안 청년이었으나 베니테즈가 이를 알 리 없었다.
***
“어우, 진. 대체 그런 패스는 어디서 배운 거냐?”
현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패스마스터이자 찬스 메이커라 불리는 더브라위너가 연습경기에서 나온 상욱의 패스를 보며 감탄했다.
연습경기 중 자유롭게 위치를 바꿔 가며 뛰어다니던 그는 수비수 3명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스루패스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진이 당장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한다면, 내가 주전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공격수로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고, 미드필더로서도 이미 월드클래스 수준인 상욱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는 더브라위너.
“영어는 왜 또 이렇게 잘하는 거야? 너 무슨 인생 2회 차냐?”
“말이 안 나오는군.”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마레즈와 베르나르두 실바 역시 상욱의 플레이에 혀를 내두르며 이번 시즌 팀의 주축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 확신에 빠졌다.
PSV에서 성장해서, 인테르에서 이미 완전체 공격수가 되었다고 평가받은 상욱은 이제 스트라이커뿐 아니라 축구라는 전 포지션에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내 눈이 맞았군.”
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는 펩 과르디올라.
챔피어스 리그, 그보다 더 높은 벽을 노리는 그에게 밀월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
프리미어리그 1라운드 맨체스터시티FC VS 밀월FC
맨체스터 시티 라인업
FW : 필포든, 전상욱, 마레즈
MF : 하디 크루거, 로드리, 케빈 더 브라위너
DF : 주앙 칸셀루, 후벵 디아스, 존 스톤스, 카일 워커
GK : 에데르송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2020-21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이 이곳 더 댄 스타디움에서 펼쳐집니다!]
[디아스, 하디 등 맨시티에 좋은 선수들이 영입됐지만, 오늘 경기가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건 현 세계 최고의 공격수가 있기 때문이죠?]
[네- 드디어 저 선수를 잉글랜드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해설의 멘트와 동시에 오랜만에 더 댄(The Den) 밀월 홈구장으로 돌아온 상욱은 왈칵 터지는 눈물을 참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밀월. 자신이 전생에 평생을 바쳐 뛰었던 팀이다. 5살에 팀에 입단해 35살까지 30년간 한 팀에서만 뛰었다. 서포터들은 모두 자신의 친구였으며, 동료들과 구단 관계자들은 가족만큼 가깝고 소중했다.
은퇴하면 영구결번과 함께 동상이 세워진다고 했으며, 후에 코치와 감독 자리까지 제시받았다.
그러니까 구단 역사상 최초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기 전까지 말이다. 전생에서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고, 한순간에 모든 걸 포기해야만 했다.
“다들 여전하군.”
팀이 승격은커녕 3부로 떨어져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응원하던 팬, 매일같이 술집에서 경기 시작 직전까지 함께 맥주를 들이켜던 서포터들.
지금은 동양인 전상욱으로 달라진 그의 모습을 경계하는 소중했던 동료들.
“헤리슨, 데이비드, 해리!”
예전 동료들을 보며 반갑게 다가가는 상욱과 생전 초면인 선수의 접근에 놀라는 밀월 선수들.
“너 뭐야? 우리 알아?”
“진 같은 선수가 우릴 안다고? 이거 영광인데?”
“오랜만이다. 근데-.”
그와 동시에 상욱은 이들을 보며 조용히 웃어 보이는 상욱.
“너희를 봐줄 생각은 없어. 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이 몸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이 자식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어디 아픈 거 아니냐? 레프리! 이 사람 좀 이상한데요?”
밀월의 옛 동료들이 상욱을 무슨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며 피하고 있을 때, 곧 경기가 시작됐다.
[맨시티의 공격이 대단히 매섭긴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시티 선수들 자체가 지친 것이 보입니다. 선수들 대부분이 유로2020을 뛰고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게 화근인 모양입니다. 이에 과르디올라 감독도 불만을 표시한 바가 있고요.]
유기적인 스위칭으로 주도권을 가진 뒤 공간을 만들어 내면서 골까지 연결하는 맨시티의 전술과 현 전력은 뛰어나나 아직 컨디션이 좋지 못했고, 이에 필드 플레이어 전원의 터프한 수비를 뚫지 못했다.
[포든이 왼쪽 터치 라인에서 공 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진 쪽으로 길게 크로스! 아, 수비 걷어 냅니다.]
[오늘 밀월은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만, 수비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해내네요!]
펩에 밀리긴 하나 베니테즈 역시 리그와 챔스를 모두 우승해 본 명장이다.
그는 텐백 전술을 사용하며, 맨시티 특유의 공간을 내주지 않았고, 공격은 원톱 루카 요비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이번엔 진이 공 잡고 위로 올라갑니다. 그렇죠, 제로백! 저걸 잉글랜드 무대에서 봅니다아!]
늘 그렇듯 빠르게 돌파한 뒤 득점까지 연결하려고 할 때, 밀월 수비들이 튀어나와 상욱에게 거친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수비가 뛰어들어 막아 냅니다! 손을 들어서 반칙을 주장하는 진입니다만······ 주심! 깃발 올리지 않습니다! 온전한 몸싸움으로 봤다는 거예요.]
[이게 리그 적응의 문제란 겁니다. 방금 플레이, 세리에에서는 무조건 파울에 카드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입니다만 프리미어리그는 다릅니다. 아무래도 잉글랜드 무대에 적응하기 쉽지 않겠는데요?]
주심의 경기 진행에 허탈하게 웃어 보인 상욱은 곧장 다음 공격 진행에 나섰다.
그러나 거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압도적으로 거칠고 ‘남자의 축구’를 구사하는 밀월은 육탄방어를 통해 상욱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브라위너가 공간 만들어 내면서 질주합니다. 뛰어 올라가는 하디 쪽으로 그렇죠!]
더브라위너가 중앙에서 찔러 주는 패스가 순식간에 측면으로 이동하는 하디에게 연결되고, 동시에 중앙으로 이동하는 마레즈 쪽으로 패스하나. 서로 호흡이 맞지 않았고, 이미 수비진에게 막혔다.
[하디의 패스가 좀 더 빨랐습니다! 아직은 이적생들의 손발이 맞지 않는 듯 보입니다.]
[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죠. 이제 리그 첫 경기니까요.]
별다른 소득 없이 전반이 끝났을 때, 영국 내에서도 거칠기로 유명한 밀월 서포터들이 기쁜지 상욱을 조롱하며 웃어댔다.
“위대한 아시안은 어디 갔냐!?”
“더 댄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팀은 없다네~.”
***
전반 종료 후.
라커룸에 들어온 맨시티 선수들은 아무 말 없이 초조한 모습으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파르르 떨어 대기도 했다.
“왜들 그리 쫄아 있어? 후반엔 더 몰아쳐서 골 만들어 내면 되지!”
이를 본 하디가 살짝 놀라 선수들을 독려하나, 맨시티 선수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하디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모르면 그냥 앉아 있어······.”
“오늘 같은 경기면 감독이 가만 안 있을 거야.”
“우린 좆됐어 진짜······.”
콘테가 마피아 보스면 펩은 사이코패스 편집증에 가깝다. 팀이 이기고 있어도 경기력이 좋지 않으면 화를 내는 편인 펩은 지금 경기력은 당연하고 스코어까지 동점인 지금 이 상황에서 그는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병신 같은 자식들! 집중해, 집중하라고!’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물병을 걷어차고, 펜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강하게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감독이 라커룸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선수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후반엔 더 나은 모습 보이길 바란다.”
그러나 라커룸에 들어온 펩은 화를 내긴커녕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선수들 몇몇은 끔찍한 경기력에 드디어 감독이 돌았다며 속삭였고, 차라리 지금 무릎 꿇고 빌면 봐주지 않을까 속삭이기도 했으나 펩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이들을 격려하더니 조용히 앉아 있는 상욱을 바라봤다.
“진, 어때 프리미어리그는 다르지?”
정중앙에 조용히 앉아 있는 상욱을 보고 재밌다는 듯 웃어 보이는 펩.
“적응하는데 쉽지 않을 것 같지?”
애초 그는 상욱이 실패한다는 생각 따윈 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지금껏 성공만을 위해 달려와 오만한 어린 선수가 부침을 겪어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며, 상욱이 부진하여 더욱더 노력하고, 이를 악물고 뛰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상욱은 너무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적응요? 이미 끝냈습니다.”
“자신 있니?”
상욱의 끝을 모르는 오만함에 다소 빈정 상한 듯한 펩. 이후 상욱을 보며 묘하게 웃던 감독이 중얼거린다.
“그럼 보여 줘라. 전반전 부진을 씻어 버릴 해트트릭. 할 수 있겠지? 네가 차기 황제라면 그 정도는 증명해야지, 안 그래?”
리그도, 팀도 아무런 적응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트트릭이라니. 듣고 있던 동료들마저 당황하고 있으나 상욱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채 밝게 웃어 보였다.
“3골로는 부족해요, 4골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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