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한일전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이다.”
- 김응용 前 한국 야구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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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
대한민국 스포츠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경기가 있을까.
가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한 양국.
FIFA에서 정한 세계 최고의 라이벌리로 꼽히기도 한 이 맞대결은 전승을 했다가도 이 경기에서 패배하면 비난이 쏟아지며 패배의 구심점이 된 선수는 평생 역적 취급을 받는다.
게다가 서로 만난 무려 대회의 결승에서 만났다. 아시안컵 최다 우승팀인 일본은 이번 대회까지 우승해 한국, 이란 등 라이벌과의 격차를 확실히 벌려 아시아 최고를 확고히 하고자 했고, 59년 만에 우승을 노리는 대한민국은 명실상부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되찾고자 했다.
한국은 전상욱, 이승민. 일본은 오카자키, 미나미노 등 양 국가 모두 할 수 있는 최상의 전력으로 내놓으며 영원한 숙적이자 라이벌을 상대할 준비를 마쳤다.
특별한 작전도, 깜짝 선발도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최고의 비기로 정면 승부할 참이었다.
“아마 내일 경기에서 지면 평생 한국에 못 간다.”
대표팀 경력 7년.
이미 여러 번의 한일전을 겪었던 주장 이승민이 선수들에게 담담히 말한다.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마, 이기는 것도 그냥 이기는 게 아니라, 얼마나 큰 점수 차로 이겨야 할지만 생각해.”
사실 객관적인 전력은 현재 한국이 일본을 명백히 앞서고 있었다.
전상욱이 없으면 비슷비슷하거나, 일본이 다소 우위이나 한국에겐 밸런스를 철저하게 붕괴시키는 선수가 있었다.
“상욱아, 자신 있니?”
“전 언제든 준비됐죠.”
“부디 보여다오. 아시아 최고의 선수가, 최강의 팀이 누구인지 말이야.”
그 어느 때보다 상욱을 애정 깊게 바라보던 승민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바라보자 상욱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으로 화답한다.
“쇼 앤 프르부, 일본을 상대로 증명해 내는 것쯤이야 간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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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초반 일본은 기세를 올려 한국을 압박했다.
한국보다 일정상으로 불리하고, 우즈백과의 4강에서 연장을 가서 체력적으로도 불리했던 일본이었으나, 모리아스 감독 특유의 지도력과 허를 찌르는 전술이 적중했다.
[우리의 장점은 후방에서부터 올라오는 빌드업인데 지금 그 장점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일본의 중원 압박은 대단합니다. 피지컬과 힘으로 찍어 누르는, 예전 한국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 주는 모습에 우리가 당하고 있네요.]
일본 선수들의 집중력은 이번 대회 중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시아 최강으로 불리는 중원은 한국을 압도하고 있었고, 토미야스-나카모토가 지키는 일본의 중앙수비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으며, 특히 나카모토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한국의 양쪽 윙을 막아 내고 있었다.
[중원에서 공이 못 도니까 저거 보세요! 자꾸 공간을 내주게 됩니다! 유야가 달려갑니다! 이거 위기예요!]
[위험했습니다! 오사코 유야!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좋은 공격수죠!]
순식간에 공간을 만들어 낸 일본의 주포 유야. 수비진을 과격하게 부수면서 나오는 공간을 활용하는 전술에 일본은 전반 초반 내내 경기력에서 우위를 점해 갔다.
“뭐 하는 거야 한국!”
“일본한테 지면 안 돼! 제발!”
일본 서포터 쪽에선 아쉬움과 활약의 탄성이 한국 서포터에선 불안한 경기력에 탄식이 터져 나오고, 이후에도 일본은 몇 번의 찬스를 더 가졌다.
“가자! 울트라 재팬!”
“사무라이의 혼을 보여 줘!”
전반 17분, 일본 서포터들의 열정적인 응원과 함께 오늘경기 최고의 활약을 보이고 있는 나카모토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저게 사무라이의 혼인가, 끊어지지 않는 의지인가 뭐 그런 건가. 일본 애들은 참 저런 거 좋아한단 말야.”
오그라들지만 꽤 멋있는 말이다. 일본 팀은 이미 자신을 소년만화의 주인공, 한국을 스토리의 최종 보스처럼 만들어 승부욕과 팀 내 사기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뭐 그럼 나는 마왕쯤 되겠군.”
이란전과 같은 악역이 된 것 같아 괜스레 두근거린 상욱은 곧장 일본 사냥에 나섰다.
“키킥! 근데 어쩌나, 인생은 만화가 아닌데.”
오늘 경기 일본의 집중 수비에 별 활약 보이지 못했던 상욱이 중원까지 내려와 공을 잡고 위로 전진한다.
[전상욱이 공을 잡는데요, 그 위로 바로 나카모토가 따라붙습니다!]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공을 필드 위에 놔둔 채 옆으로 스루패스 하는 척 몸을 기울여 상대를 완전히 속인 다음 페널티 라인 위로 올라가 슈팅을 때린다.
[소름 끼치는 페인팅! 수비수 제쳐 내고요. 골대 안쪽 구석으로 전상욱! 아! 골키퍼 펀칭!]
[아시아 정상급 수비수 나카모토를 개인기 한 방에! 좋아요! 골로 들어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런 창의적인 슈팅이 기회를 만드는 거예요!]
역시 세계적인 선수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상욱의 깜짝 슈팅에 놀란 일본 선수들이 실점하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이승민이 곧바로 코너킥을 준비한다.
[이승민이 높고, 길게 전상욱 쪽을 바라보면서 크로스 올려 줍니다아!]
기본적으로 한국 선수들에 비해 신장이 작은 일본은 제공권에 약했고, 특히 전상욱과 같이 180대 후반의 선수들에겐 더욱 취약했으며, 상욱의 점프력은 두말할 것 없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대로! 내려찍습니다! 아아아! 들어갔습니다! 아시아 축구의 맹주가 돌아왔습니다! 대한민국의 선취 득점! 득점자는 오늘도- 전상욱입니다!]
[어나더 클래스! 오늘 경기장에 있는 그 어떤 선수보다 2, 3단계는 위에 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상대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상욱을 선제골을 기록하자마자 경기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국 공격에 활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1:3, 1:4로 붙는데 밀리긴커녕 오히려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니 경기가 살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보세요. 일본의 중원을 전상욱이 혼자 이겨 내면서 전방으로 패스를 전달하니까, 우리 선수들에게 공간이 만들어지고, 빌드업이 되는 겁니다!]
[저런 게 월드클래스 선수의 필요성이죠! 혼자서 경기를 바꿀 수 있는 선수가 바로 저런 겁니다!]
이번엔 아예 하프 라인 밑까지 내려와 공을 받은 상욱이 또다시 재빠르게 질주한다.
동시에 일본의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이 아예 대형까지 갖춰 가며 막으러 나오나, 어처구니없는 속도와 기적에 가까운 개인기에 따라가긴커녕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를 바라만 보고 있다.
“승민, 뛰어!”
어느새 상대 진영까지 달려온 상욱.
화려하고 큰 동작 없이 간결하고 재빠른 기술들로 상대를 뚫어 낸 상욱은 이승민에게 외치며 나카모토와 토미야스의 바로 앞에서 빠른 패스를 보낸다.
[저건······ 놀라기도 힘듭니다······! 전상욱이! 달려 나갑니다!]
상욱의 킬패스가 페널티 라인 안으로 파고드는 이승민에게 연결되자, 그는 쉽게 골키퍼까지 제친 뒤 마침내 추가골을 성공시킨다.
[2골째! 오늘 경기가 이렇게 기울어집니다! 전상욱! 두말할 것 없는 월드클래스 선수입니다!]
[탈압박, 드리블, 패스 그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축구를 잘한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선수네요!]
사실 이 경기를 보는 양국의 전문가들은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힘들었다.
지난 월드컵에서 8강, 16강까지 올라간 양 팀은 이제 아시아 축구가 세계 축구의 중심에 들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저 괴수 하나에 생각을 바꿨다.
그는 한국 선수이면서, 한국 선수가 아니었다. 상욱은 혼자서 일본 대표 전원과 상대했고 이들을 완전히 압도했다.
오로지 전상욱이 전략이고, 전상욱이 발끝에서 득점이 나오고, 경기가 뒤바뀌었다.
“세계적인 공격수 하나에 경기가 이렇게까지 기울어질 수 있는 것인가······.”
일본 쪽 분석관이 씁쓸한 미소를 짓자 옆에 있던 동료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한다.
“일본뿐만 아니야, 세계 어떤 나라도 저 괴물을 제대로 막을 팀은 없을 거다.”
***
일본 서포터석이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다.
상욱의 헤더 선제골이 들어갔을 때 팬들은 ‘아직 역전할 수 있다!’며 더 크게 응원하거나, 일부 과격한 팬들은 ‘할복하라!’며 큰 소리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욱의 비상식적인 드리블과 이승민의 추가골이 들어갔을 때, 침묵하다 못해 고요해진 일본 서포터들은 2번째 골에 더 이상 같은 팀을 응원하지도 비방하지도 않았다.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합니다]
일본 축구의 전설이자 이번 아시안컵 해설을 맡은 혼다 케이스케가 담담한 목소리로 전한다.
[모리아스 감독의 전술은 적중했고, 우리의 경기력은 대회 중 최고이며 라이벌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EPL 탑 윙어 이승민에게도요.]
이 대목에서 혼다는 지속적으로 돌파를 시도하는 상욱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우리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이 아니, 앞에 있는 저 소년이 이상한 겁니다. 불합리해요, 현실 세계에 있는 선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캡틴 츠바사 같아요.]
일본의 전설적인 축구 만화 캡틴 츠바사의 주인공, 오오조라 츠바사를 빗대어 표현하는 혼다.
작중 넘사벽에 먼치킨, 스포츠 만화에서도 보기 드문 ‘최강의 천재’를 타국 선수에 비유하는 것을 보면 지금 일본이 상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난 십수 년간 우린 한국 축구를 재빠르게 뒤쫓아 왔고, 이젠 어느 정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저 선수 하나 때문에 다시 십 년간, 한국에게 밀리게 생겼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화도 안 나고, 별로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저 선수는 차원이 다른······ 저것 보세요!]
해설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공을 잡은 상욱이 다시 한번 일본 진영으로 재빠르게 드리블해 나갔다.
[이승민-황찬희 그리고 전상욱! 한국의 삼각편대가 역습에 나섭니다. 이거 막아야 합니다!]
스피드로는 세계적 수준인 이승민과 황찬희, 그리고 가장 뒤에서부터 출발해도 단 몇 초 만에 상대 페널티 라인 근처까지 달려오는 상욱.
오른쪽으로 스위칭한 이승민이 공을 올리고 이를 상욱이 받자 토미야스가 이를 악물고 수비를 위해 달려 나온다.
[토미야스가 막기 위해 섰습니다. 한 번이라도 보여 줬음 좋겠습니다!]
한국의 김재민, 일본은 토미야스.
아시아의 차세대 거물 수비수라 불리는 토미야스는 이번 경기, 단 한 번만이라도 상욱을 막아 보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다해 다가서나.
상욱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수비수를 앞에 두고 찬 캐논 슛이 수비와 골키퍼를 지나쳐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겐 신이자, 일본에겐 지옥의 악마와 같은 존재입니다.]
[저, 저 슈팅 좀 보세요! 츠바사의 필살기 사이클론 슛을 보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안 돼요, 정상적인 방법으론 도저히- 저 괴물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3:0으로 끝난 전반.
생각보다 시시한 대회와 싱거운 일정. 이미 상욱의 머릿속은 친정팀 PSV와의 챔피언스 리그로 가득했다.
< 또다시 PS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