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vs 중국 (1)
“제의는 대단히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만, EPL에서 온 제안을 거절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선수 시절엔 박지성부터, 감독으로는 전상욱까지 한국 선수들과 연관이 깊은 前 psv 에인트호번 필립 코쿠 감독이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선임위원장 김치곤에게 곤란한 듯 말한다.
현재 협회는 월드컵 이후 전상욱을 지지하던 친전상욱 쪽 임원들이 대부분 차지했다.
뭐, 이들 모두가 실질적으로 상욱과 무슨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상욱의 실력을 보고 한국 축구의 미래를 전상욱에게 맡겨 보자는 생각에서 그를 지지한 것이다.
월드컵 최초 원정 8강과 아시아 최초 발롱도르 포디엄 선수 배출에 한국 축구의 대한 전국민적 관심이 고조된 지금, 협회는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자본과 능력을 총 동원하여 감독 선임에 나섰다.
새로운 축협은 김치곤의 주장에 따라 전상욱을 잘 활용했거나, 프리롤로 둘 수 있는 감독 선임을 위해 노력했고, 그중 1순위가 psv 시절 상욱을 지도했던 필립 코쿠 감독의 선임을 시도했다.
psv 이상의 연봉과 코치진 전원 고용 약속, 4년간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한 협회의 통 큰 제안에 코쿠 감독은 진심으로 한국행에 마음이 흔들렸다.
실제 라니에리와는 달리 한국행에 큰 호의를 보였고, 진지하게 계약과 세부사항 등이 오고 갔으나, 계약 도중 무려 프리미어리그 팀에서 제안이 왔던 코쿠는 도저히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코쿠 이후 수비 전술 하나는 끝내주는 같은 네덜란드 출신 로날드 쿠만 선임을 준비했으나, 자국 대표팀 감독 지휘봉을 맡기 위해 거절했고, 선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레알 마드리드 출신의 훌렌 로페테기 감독에게 제안했으나, 세비야 감독직을 위해 거절했다.
아시안컵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감독 선임에 실패한 대한민국은 지난 러시아 월드컵에서 감독 대행 역할을 했던 토니 그란데 수석코치에게 임시 감독을 맡겨 아시안컵을 진행을 준비했다.
사실 협회 쪽에서는 제대로 된 감독 선임 전까지 계속 그란데를 감독으로 쓰고 싶었으나, 워낙 고령이기도 하고, 그란데 본인이 더 이상 미련 없이 은퇴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다.
전상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감독.
김치곤 위원장의 눈은 다시 한번 psv 쪽으로 가 있었다.
***
이승민, 황찬희, 김재민 등의 해외파 선수들과 김영현, 이성재 등의 국내리그 핵심 선수들이 모두 참여해 압도적인 관심을 모은 2019년 카타르 아시안컵.
한국이 속한 D조는 대한민국/이라크/필리핀/키르기스탄이 포함된 1강 1중 2약으로 한국의 압도적인 우세가 예상됐고, 이번 대회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으나 대표팀은 조별리그 1차전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오늘 필리핀의 수비는 우리가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게 앞서고는 있습니다만 상대 수준에 비해서······ 졸전이라는 비판을 피하긴 힘들어 보입니다.]
[상대가 텐백으로 수비한다고 불만 가지면 안 되는 겁니다. 저것도 전략이고, 그게 불만이면 뚫어 내면 되거든요!]
압도적인 볼 점유율을 기록한 한국이나 필리핀의 밀집 수비를 제대로 뚫어 내지 못했고, 오히려 몇 번의 위협적인 역습 찬스마저 허용하고 말았다.
공격 기회 때마다 기본적인 패스와 퍼스트 터치부터 미스가 나다 보니 제대로 된 전개가 되지 못했다.
월드컵에서 전상욱과 함께 찰떡 호흡을 보이던 이승민은 필리핀의 텐백 수비를 직접 돌파하고,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어 어시스트까지 기록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공격 템포를 늦추거나, 오히려 역습을 허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차전은 역사상 첫 A매치 경기를 펼치는 키르기스탄전.
키르기스스탄은 아시안컵을 앞두고 펼친 일본 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경기 내용을 보이며 0:4로 패배했고, 1차전 이라크전에서도 무기력하게 0:1로 패배했다.
당연히 압도적으로 한국이 승리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으나.
[아무리 한국 중원이 이성용과 이성재 부상으로 부진하다고 해도, 저 정도 팀을 상태로 이런 경기력은······.]
[공격이 잘 안 되면 수비라도 똑바로 해야 하는데, 우리 패스 미스가 너무 많습니다. 아, 지금도 보세요! 저런 실수가 방금도 상대에게 찬스를 내주는 겁니다!]
선수들 자체가 아직 월드컵 8강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으며, 그마저도 1차전에서 주전 미드필더들이 부진해 제대로 공도 돌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팀 주장 이승민의 골로 겨우겨우 승리하긴 했으나 부진한 경기력은 여론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2승으로 16강에 진출은 했습니다만, 이런 경기력으론 안됩니다. 이대로 이란이나 일본 같은 강팀들을 상대로 결코 이길 수가 없어요.]
[조직력을 더 갖추고, 절박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선수들 월드컵에서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해요!]
해설의 멘트와 더불어 한국 관중석에선 상욱을 부르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전상욱! 전상욱은 어디갔냐아아!”
“에이스 데려와라! 골든볼 데려오라고오오!”
인테르와 한국 협회와의 사전협의에 따라 전상욱은 8강부터 뛰기로 협의한 것을 알지만, 이러다가 상욱이 출전하기도도 전에 탈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국민들의 불안이 발산된 것이다.
[관중들이 전상욱 선수를 부르고 있습니다만 안 돼요.]
[그렇습니다. 같은 아시아권의 강팀과 상대할 때야 전상욱 선수가 필수지만, 이런 정도 팀을 상대론 전상욱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합니다.]
주장 이승민의 지휘 아래 제대로 단합해서 나온 이라크와의 3차전.
코너킥 상황에서 옆으로 빠져 있던 황찬희의 높은 크로스를 받은 김재민이 시원한 헤딩골을 성공시키고, 이승민이 자신이 만든 PK를 직접 성공시키며 1, 2차전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 준 주었다.
그러나 후반 막판에 대표팀 고질병인 패스미스와 집중력 저하로 인한 수비 불안으로 허무하게 2골을 내주고 말았다.
결과는 2승 1무, 조 1위로 넉아웃 스테이지 진출.
일각에서는 이렇게 애매한 경기력을 가진 팀이 꾸역꾸역 올라가 우승을 차지한다는 말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의견은 이런 경기력이면 우승은커녕 한일전에서 박살 날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였다.
16강 상대는 최근 역사와 사드 이슈로 갈등이 극에 달한 중국.
대한민국 대표팀은 중국을 상대로 역대 전적에서 압도하고 있으며, 객관적인 전력도 우수하지만 마르셀로 리피 감독이 부임한 이후론 빠른 스피드와 조직력을 앞세워서 팀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라이벌 한국에겐 지지 않는다!’ ‘전상욱이 없는 한국은 강하지 않다!’라는 중국의 자극적인 기사가 한국 포털사이트에서 번역 소개되어 경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뭐 물론 ‘한국은 월드컵 8강의 강팀이라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정상적인 반응도 있었으나 당연히 조명되진 못했다.
간만에 아시안컵 16강에 진출한 중국. 리피 감독은 “아시안컵을 가져와 고별전을 멋지게 장식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상황에서 양 팀의 운명을 가를 경기가 시작됐다.
***
[아니, 진짜 중국한테 지면 좆된다니까요!?]
1월 24일,
어제 새벽 비행기로 카타르에 도착한 상욱은 대표팀 훈련장에 입소하자마자 마로타 단장에게 전화했다.
아직 이탈리아어가 익숙지 않았던 상욱이었으나 맘이 급해지니 이상하게 입에서 어색했던 외국어가 술술 나온다.
[잘하면 8강에서 뛰기도 전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판이라니까요?]
협회와 구단이 상욱의 출전에 대해 약속한 건 8강부터. 그러나 협회와 대표팀은 상욱에게 부탁해 16강부터 경기에 뛰도록 구단에 설득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진, 진 약속했잖아. 우린 8강도 양보한 거야. 그리고 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다면······ 사실 우리는 너무 좋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인테르는 상욱이 아시안컵에서 우승하기보다 탈락하길 바라고 있었다.
팀의 대체불가 에이스를 한 경기라도 빨리 사용하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부상당하지 않겠습니다. 명심할게요, 단장님. 돌아가면 인테르, 반드시 우승시킬게요.]
잠시 숨 고른 상욱이 이번엔 정에 호소하자 단장은 한숨을 내쉬며 괜히 말을 돌린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냐. 감독에게도 물어봐야 하고······.]
[감독님한테 물어보면 당연히 반대하시겠죠. 단장님, 그러면 후반전에 교체라도 부탁드립니다.]
경기에 뛰고 싶다는 선수의 간절한 부탁에 단장이 할 말이 있겠는가. 긴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다.
[······후반 교체 정도는 가능해. 대신 한가지 약속하자.]
[넵!]
[이왕 이렇게 된 거 무조건 우승해라. 그리고 절대로 부상당하지 마. 그땐 콘테가 널 진짜 죽이려 들 테니까.]
단장의 허락에 미소와 함께 화답하는 상욱.
[우승컵 들고 갈테니 사진 한번 찍자구요!]
***
[다시 한번 대한민국! 중국과의 16강 경기가 이곳 두바이 막품 빈 라시드 스타디움에서 펼쳐집니다!]
[네, 대단히 중요한 경기입니다. 특히 중국이 공한증을 깨게 만들면 안 되고요. 우리 선수들 조별 예선에선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토너먼트에선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승리해야죠.]
[오늘 경기 중요 포인트라면 역시 어제 새벽부터 교체명단에 이름 올린 전상욱 선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네, 원래 8강부터 뛰기로 협의가 되있었는데, 소속팀과 원만히 해결된 것 같네요]
이번 대회를 끝으로 축구계 은퇴가 확정된 그란데 감독.
사실 그는 한국이 아시안 컵에 대해 얼마나 절박한지 몰랐으며, 사실 우승하든 못하든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지휘하는 팀이 승리하면 좋겠으나 그렇다고 이제 막 날개를 펼쳐 비상하는 어린 선수를 무리하게 출전시켜 혹시시키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소림 축구로 악명 높은 중국이 아닌가.
“진, 너는 가장 필요할 때 나간다. 최대한 기다려.”
축구계 선배로서 그는 상욱의 활약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아마 그는 자신이 평생동안 지휘했던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가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
[확실히 조별리그때보다 몸이 풀리긴 했네요. 대회 4경기 만에 우리 수비가 확실히 돋보입니다.]
김재민-김영현이 지키는 수비는 우레이가 이끄는 중국 공격진을 단단히 지켰고, 강철-김용이 뛰는 양쪽 풀백은 좋은 크로스와 오버래핑으로 중국의 수비를 긴장시켰다.
문제는 공격이었다.
공격라인은 거의 다 퍼져서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주장 이승민은 타이트한 리그 일정으로 인한 체력 저하 여파를 보이며 지친 기색을 보였고, 황찬희 역시 장거리 비행 여파로 평소의 자신 있는 돌파를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게다가.
[태클 거칠었습니다! 중국 수비가 이승민에게 달려듭니다!]
[아, 이거 발목 쪽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요! 아, 카드가 안 나오나요? 이승민 선수 교체해야 할 것 같은데요?]
후반 50분.
다급해진 그란데 감독이 조용히 벤치에 앉아 경기에 집중하는 상욱에게 다가간다.
“준비해라 진. 보여 줄 시간이다.”
< vs 중국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