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깝치지 말지어다 (2)
“한심한 새끼”
하디의 물병을 차며 역겹다는 듯 토해내는 동양인 스타의 모습에 놀란 팀 동
료들이 뛰어오나 이미 분노한 하디 크루거가 그의 멱살을 잡은 뒤였다.
“이 개새끼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한 하디. 분노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으나 이상
하게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으며, 언제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우리끼리 이러지 말자! 고작 한 경기일 뿐이잖아!”
“그래 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원래 안 이랬잖아!!”
팀원들 역시 상욱의 돌발행동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평소 성격이 대단한
호인이라곤 할 수 없으나 사람들과 관계도 나쁘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이었던
상욱의 모습에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진을 말리는 것뿐이다.
“왜 치려고? 리저브 때랑 달라진게 아무 것도 없구나”
“....적당히 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으니까”
서로 알 수 없던 말을 지껄이던 두 사람. 하디가 눈치를 보며 거칠게 잡았던
멱살을 풀어내자 상욱은 그에게 이죽거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다.
“뻑킹 게르만. 너랑 같이 뛴 4개월의 시간이 아깝다”
***
하디는 오늘 경기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패스도, 슛팅도, 평소 본인이 가장 잘하던 뱀같은 드리블도 전혀 통하지 않았
다. 후스코어드 평점 4.5, 스카이스포츠 선정 4.0으로 psv 입단 후 가장 부진
한 모습을 보인 하디였으나 상욱이 분노한 모습은 그저 부진하기 때문이 아니다.
경기 내내 그의 예전 모습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독단적이고,
남을 믿지 못하며,
스스로 뭔가 보여줘야한다는 부담감에서 나오는 실책.
모든 것이 뒤섞여 최악의 경기력을 만들었다.
어려운 경기였으나 하디-진이 제대로 작동만한다면 크게 밀릴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상욱은 경기 내내 하디를 찾았고, 그와의 협력 플레이를 기대했으나-
도르트문트라는 예전의 트라우마와 혼자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경기를 망친
것이다.
전반에야 팀이 아예 밀렸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후반에 공을 잡은 하디는 정
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공을 끌고 돌파하려다 실력 좋은 수비수들에게 전부 뺏기고 본인의 장기인 측
면에서 활동하며 공략하려 했으나 오늘 그는 단 한 번의 돌파도, 조금의 위협
적인 모습도 보여주지 못했다.
”Scheiße..Scheiße!“ (씨발!)
경기가 끝난 뒤 집이 아닌 훈련장에서 슛팅 연습을 하며 이를 갈아대는 하디.
언론은 오늘 그를 제대로 혹평했다.
[몰락한 독일 스타, 팀을 위기에 빠트리다]
[최악의 경기력 하디, 2차전 배제되나?]
에레디비시 리그에 수십 배는 넘는 관심을 받는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은
사람을 반쯤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고, 그는 간만에 몇 년 전까지 바이언에서
먹던 욕의 몇 배를 오늘 받았다.
도르트문트 SNS팬 계정에서는 하디의 오늘 경기 부진한 영상과 함께-
- Danke Hardy! (고마워요 하디!) -
아예 이런 문구를 만들어 업로드 했고, 팬들은 하디는 다시 유럽 빅리그로 갈
일은 없겠다며 그를 평가절하했다.
”젠장!!!“
집에만 있으려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아 훈련장에 나와 있는 힘껏 공을 차는 하
디이나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헤이-“
어두컴컴한 훈련장에 유려한 영어를 하며 다가오는 남성.
리저브팀 감독 반니스텔루이다.
”감독님이 왜...“
”필립이 오면 괜히 질책하려고 찾아오는 것 같잖아“
그는 밝은 표정을 하며 하디에게 병맥주를 건넨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 맞지?”
반니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하디. 둘은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맥
주를 들이킨다.
“도르트문트는 강한 팀이야. 지금 우리 전력으론 지는게 당연한데.. 팬들이나
수뇌부나 다들 기대치만 높아져서..”
”어쭙잖은 위로할 거면 됐어요. 연습 더 할 거니까“
자존심 강한 하디가 냉정히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번엔 반니 역시
차갑게 말한다.
”하디. 지금 너 혼자만으론 2차전 절대 못 이겨“
”뤼트!!!“
“네가 독일 팀에, 특히 도르트문트에 가지는 특별한 감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이 대목에서 그는 악의 없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전한다.
“네 실력으론 어림없다, 하디”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축구하고, 독일 리그에서 활약하고, 독일을 위
해 월드컵 결승에서 골을 넣은 하디는 자국팀을 상대로 뭔가 보여주고 싶었다.
자국리그 최고의 팀 바이에른 뮌헨에서 방출당해 외국으로 쫒 겨나듯 이적한
그는 자신이 약했던 자국 팀과 상대해 활약하여 자국 리그에 대한 속상함과
더불어 팬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싶었다.
PSV 리저브 팀에 있으면서 이러한 심적 부담과 문제가 극에 달했던 그는 상욱
을 만나면서 괜찮아지나 싶었으나,
자국 리그 최상위권 팀인 도르트문트와 대결하면서 그의 심적 문제가 다시 발
생한 것이다.
게다가 라이벌이라 불렸던 마르코 로이스에게 철저하게 당한 것은 그의 자존
심을 박살낼만한 일이였다.
“혼자선 못 이겨 하디, 둘이면 모를까”
“...뭐라구요?”
눈살을 찌푸리는 하디에게 반니는 2번째 맥주를 권하며 말한다.
“이 맥주 진이 주라고 한 거야”
순간 맥주를 집어들고 골똘히 생각하는 하디. 생각해보니 작년 리저브 팀에서
진을 처음 만나고 싸운 뒤, 서로 화해했을 때 그의 집에서 마셨던 맥주임이
생각난다.
“진이 전해 달라더라. 정신 차리라고”
“진.....”
지난 7개월간 하디와 진은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고, 리그 내 최고의 듀오로
이름을 날렸다.
“혼자 부담 갖지 마, 하디. 지금 너랑 같이 뛰는 놈이 누군데?”
데뷔와 동시에 1군으로 콜업, 리그를 씹어먹고, 디펜딩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
를 10분 만에 박살내고, 강등권에 가까운 팀을 우승권까지 만들어 낸 현 세대
최고 유망주 아닌가.
“네가 주연이 될 필요 없어. 그저 지켜보는 거야”
괴물이 어떻게 프로이센을 망치는지 말야.
***
다음날 psv 라커룸,
당장 내일 있을 리그 경기를 위해 선수단이 바쁘게 움직여야할 상황임에도 라
커룸은 그 어느 때보다 정적에 휩싸여있다.
어제 있었던 무기력한 패배와 더불어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 2명의 다툼으로
무너지는 팀 분위기에 가라앉은 팀 분위기.
게다가 하디는 아직 연습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반갑다. 제군들....응?”
뒤이어 들어오던 코쿠 감독이 상욱 옆에 비어있는 하디의 라커룸을 보고 의아
해한다.
“뭐야? 하디는 어디 갔어? 늦을 녀석이 아닌데”
“저 그게.....”
주장 제룬 조엣이 아직 훈련장에 나타나지 않은 하디를 변호할 말을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어이- 진!!”
상의는 뒤집어 입고, 바지는 거꾸로 입은 술에 취해 얼굴이 벌건 잘생긴 백인
남성이 터덜터덜 거리며 라커룸 안으로 들어온다.
“하.하디..너..너....!”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코쿠 감독은 뭐라 말도 못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
고, 팀원들 역시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디는 어제 자신이 먹었던 맥주병을 상욱의 앞에 놓은 채 그대로 상욱 앞에
놓인 물통을 발로 뻥 차버린다.
“앞으로 한 골이라도 놓쳤단 봐, 아시안”
이죽거리던 하디는 뒤이어 연습을 해야겠다며 머리를 긁적이며 옷을 입기 시
작하고, 뒤이어 겨우 정신을 차린 코쿠 감독이 분노에 점칠된 표정으로 크게
소리친다.
“하디 크루거!!! 당장 여기서 나가!!!!!!!”
감독의 샤우팅에 상황파악이 된 듯한 하디가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라커룸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뒤에서 상욱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린다.
“의심하지마 친구”
가볍고, 애정 듬뿍 담긴 목소리다.
***
바로 주말에 열리는 리그 경기.
상대팀 FC에먼은 다소 자신감에 찬 상태로 psv전을 준비한다. 평소 전력이라
면 에먼이 psv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우나 지금은 다르다.
주중 챔피언스리그 경기로 인해 체력적으로 지쳐있는 psv는 심지어 그 경기에
서 무기력하게 패배해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하디크루거가 음주로 팀 훈련에 불참해 2주간 주급 정지 당했다는 소식은 팀
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을 것이며, 이는 에먼에게 분명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동안 2골! 오늘도 하디-진입니다!]
하디는 상대는 당연하고, 아군도 알아차리기 힘든 곳에 멋대로 스루패스를 쏘
아댄다.
누구도 받지 못하고 골라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이 여러
번 연출되나 당최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되는 위치에서 상욱이 공을 잡
는다.
[그대로 슛- 들어갑니다! 왼쪽 파포스트 정면을 노린 진의 완벽한 골로 해트
트릭을 달성하는- 여러분 이 선수가 누굽니까?!]
관중석에서 진, 진! 이라는 환호와 동시에 관중석 전체가 무너질 듯 웅성인다.
[상식적이지 않은 위치에서 패스를 하는데 공을 잡는 선수는 상식을 뛰어넘는
선수죠!!!]
[그게 바로 진입니다!! 이번 골로! 득점 1위! 리그 득점왕 경쟁에 한발 앞서
나가는 전-상-욱!!]
“이건 사기야”
에먼의 감독이 후반 직전까지 끊임없이 공격하는 psv의 선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진과 하디는 이미 네덜란드 리그에서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둘 다 괴
물이긴 하나 특히-
“대체 저 아시안은 뭐란 말이냐”
몇 해 전 상대했던 루이스 수아레즈? 반니스텔루이? 아니 진의 잠재력은 그보
다 훨씬 위에있다.
94년 호나우두보다 더욱.
“미친놈들! 왜 뺨은 독일 놈들한테 맞고, 왜 우리한테 화풀이 하냐고!!”
[진의 해트트릭! 하디의 도움 해트트릭! 국가도, 나이도, 인종도 다른 두 선
수가 마치 형제처럼 움직입니다!]
psv와 도르트문트의 16강 2차전이 시작된다.
***
“이번 시즌? 늦어도 1년이 더 걸리진 않을 거야”
하디 크루거는 psv에서 뛸 수 있는 경기가 많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는 분명히 이적할 것이고, 자신을 비싸게 사준 psv와 서포터들을 위해 목숨
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그와 컵 대회, 챔피언스리그까지.
이전보다 조금 더 자신있는 모습의 하디가 경기를 준비하고-
“이번엔 무조건 우승한다”
도르트문트의 주장이자 하디 크루거의 라이벌이었던 마르코 로이스 역시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칼을 간다.
그에게는 무조건 이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하디 크루거
2013-14시즌, 발롱도르 포디움이자 한 때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었
던 하디 때문에 불운하게도 로이스는 커리어 하이 시즌에 모든 상을 뺏겨야했다.
빠른 주력과 신들린 드리블, 터프한 돌파와 간결하지만 멋드러진 개인기. 마
지막으로 잘생긴 외모.
여러 해 동안 비슷한 스타일의 라이벌 소리를 들었던 마르코 로이스와 하디
크루거.
로이스는 이번 대회를 끝으로 그를 완전히 넘어 압도할 생각이었고, psv를 침
몰시켜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하디 크루거와 마르코 로이스.
역대 독일 공격형 미드필더 중 최상위 권에 속하는 선수들이나 2차전에서 이
들은 스스로의 승부욕이 얼마나 별 것 없었고, 한심했는지를 깨닫는다.
2차전,
전상욱은 이들에게 악몽을 선사했고, 이들은 경기에서 新 축구황제를 목도한다.
정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