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깝치지 말지어다 (1)
“선발은 진, 하디, 로자노, 반힝컬...”
vs 도르트문트 전
코쿠 감독과 psv 멤버 전원은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라커룸에 앉아있었다.
이들의 작전은 리그와 동일하다.
08-09시즌 발렌시아 CF가 자주 쓰던 4-2-3-1.
4231은 현대 축구에서 많이 쓰이는 전술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높게 구현하
기는 어려운 전술이기도 하다.
수비와 공격의 균형을 추구하고, 협력 수비를 통해 상대를 강하게 프레싱하는
전술로 각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닌 유기적으로 계속 이동하기 때문에
체력적 부담감이 상당하다.
전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단숨에 상대에게 뒷공간을 내주거나 큰 위험
에 노출될만한 완성도가 높고 어려운 전술이나 지금의 psv에겐 결코 무리가
아니다.
풀백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오버래핑을 시도하고, 양쪽 윙어 코디 가포와 로
자노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공격형 미드필더가 공을 뿌리기 좋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면서 공격 가담을 시도한다.
또한 4231 전술의 핵심은 최전방에서 공을 받는 센터 포워드 1과 세명의 중앙
미드필더 3의 꼭지점에 있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가장 중요한데,
이들이 전상욱, 하디 크루거인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현재 psv는 명실상부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의 다크호스로 불리고 있었으며,
상욱을 포함해 주전 선수들 대부분이 유럽 빅클럽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미 풀백 둠 프리스는 인테르와의 개인 합의를 마쳤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로자노 역시 세리에 복수의 구단들과 협상 중이며 이중 나폴리와 진하게 링크
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하디 크루거는 라리가의 AT 마드리드와 협상을 진행 중인 듯했다.
“우리가 결승까지 갈지는 모르겠다 다만-”
라커룸 안에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던 코쿠 감독이 상욱을 슥 쳐다보더니 자
신감 넘치는 얼굴로 외친다.
“적어도 16강에서 짐 쌀 생각은 없다. 프로이센 얼뜨기들을 부셔버리자고!!!!”
“헤이 프로이센 얼뜨기 1호기, 잘할 수 있겠냐?”
‘독일 얼뜨기’란 말에서 상욱은 하디에게 얼뜨기라 칭하며 그를 놀렸으나-
평소와 달리 그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
“아시안 스타만 막으면 돼. 나머진 별거 아냐”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경기 3일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 토마스 투헬 감독이 선수들을 격려한다.
지금이야 과도기를 거치고 있긴 하나 그래도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적이 있는
도르트문트는 psv에게 결코 쉬운, 아니 전상욱이 없었을 땐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강팀이다.
몇 년 전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경험도 있는 도르트문트 선수
들은 대 에인트호번 전에 나선다.
현 도르트문트의 라인업과 전술은 psv과 비슷, 아니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전술도 4231로 같고, 전체적인 경기 스타일도 발 빠른 선수들을 이용해 상대
뒷공간을 노리고 역습 위주의 축구를 구사하는 팀이다.
게다가 이번 경기의 가장 큰 포인트가 있다.
“마르코, 피에르”
감독이 팀의 에이스 마르코 로이스와 지난 시즌 분데스리그 득점왕 피에르 오
바메양을 부른다.
효율적인 드리브와 특유의 공간 이해 능력을 이용해 질 좋은 패스를 만들어내
는 로이스와 축구 역사상 가장 빠른 스피드와 킬러 본능으로 골을 만드는 오
바메양.
“psv에 하디와 동양인 꼬마가 나댄다는 소문이 있는데- 질 수 없잖아. 안 그래?”
“물론이죠”
“부숴버릴게요”
에이스와 주포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한 투헬이 선수단 앞에
서 말을 이어나간다.
“진이란 놈이 잘한다고 해도 고작 18살짜리 꼬마야. 게다가-”
이 대목에서 그는 씩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린다.
“하디 크루거는 원래 우리 밥이잖아. 안 그래?”
***
[psv 에인트호번과 도르트문트의 16강 1차전 경기가 여기! 지그널 이두나파크
에서 열립니다. 오늘 경기 관전포인트가 어떤 게 있을까요?]
[네, 먼저 최근 5경기 연속 골을 넣고 있는 동양인 괴수 진의 미친 활약이 어
디까지인지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해설자들의 말과 동시에 그라운드 안으로 선수들이 들어온다.
[두번째는 로이스-오바메양과 진-하디. 현재 유럽에서 가장 핫한 공격 듀오들
의 대결도 주목됩니다. 관록의 도르트문트인지! 패기의 psv인지!]
현재 유럽 내에서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팀의 공격을 이끄는 선수들.
이미 월드클래스라 불리는 로이스-오바메양에 대항하는 현 세계 최고 유망주
진과 월드컵 MVP 출신의 하디 크루거가 이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설자와 관중들의 시선이 진이 아닌 독일 선수에게로 향한다.
[하디 크루거가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경기장 안에서 몸을 푸는 하디가 긴장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자, 곧 상욱이
다가와 너스레 장난친다.
“야 절머니. 너 왜 그러냐? 왜 이리 쫄아있어?”
“....았어”
“뭐?”
“안 쫄았다고! 자식, 쫄긴 누가 쫄았다고 그래!!”
평소 같았으면 본인이 먼저 나서서 내가 다 할 테니 진 너는 패스나 잘하라는
둥, 알아서 이기기 해주겠다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을 하디이나 오늘은 달랐다.
그는 누가 봐도 긴장한 티가 역력했으며, 그 강도는 작년 레알 마드리드 전보
다 더욱 강한 듯했다.
“하디, 할 수 있다. 저 새끼들 별 거 아냐”
그라운드 끝에서 상대편이 다가오자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하는 하디와 곧 그
의 천적이자, 철천지 원수인 도르트문트 선수들이 나타난다.
하디 크루거는 이상하리만큼 도르트문트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분데스리가 mvp를 받던 2013-14 시즌의 하디, 당시 그는 말 그대로 리그를 씹
어먹고 월드 베스트까지 올랐으나 이상하리만큼 도르트문트에는 약했다.
당시 피지컬이 강한 편이 아니었던 하디는 빠른 스피드와 뛰어난 드리블 실력
으로 상대의 압박을 벗어내는 플레이를 보였는데-
도르트문트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게겐프레싱으로 불리는 이들의 경이로운 수준의 압박은 하디 같은 테크니컬
위주 선수들에겐 쥐약 그 자체였고, 빈틈을 노려 공을 앞으로 보내려고 해도
도르트문트 선수들의 훌륭한 간격 유지로 인해 전부 막히고 말았다.
1,2경기 정도 완벽하게 막히니 그 다음 경기에선 도르트문트가 부진해도 이미
주눅이 들어있던 하디는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했고, 그의 롤모델이자 현 분
데스리가 최고의 선수라 평가받는 로이스에게도 처절히 밀렸다.
같은 포지션에서 맞대결 할 때마다 대단한 활약을 보이는 로이스에 비해 하디
는 도르트문트라는 이름값과 이들의 노란색 유니폼에 몇 년이나 주눅들어 있
었다.
“그게 몇 년 전 얘긴데- 무조건 이길 수 있어”
여러 번 다짐하는 하디 크루거이나 이미 그는 사시나무 떨듯 긴장하고 있었다.
***
전반 25분
[이번 시즌 진을 가장 잘 막은 팀이 있다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무조
건 도르트문트입니다]
토마스 투헬 감독은 기존 게겐 프레싱에 자신만의 유연한 전술운영을 플러스
시켜 상대를 공략했다.
[반힝컬이 구티에레즈 쪽으로 패스하면서 위로 올라갑니다. 로자노 쪽으로 빠
르게-]
[깔끔하게 막힙니다. 오늘 경기 컨디션이 최상인 소크라테스입니다!]
긴터-소크라테스로 이어지는 강력하고 피지컬과 촘촘한 조직력의 중앙수비는
진과 하디를 제외한 psv 선수들이 뚫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의 psv는 하디, 진만 빼면 유럽 3류팀이다”
벤치에 앉아 조용히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투헬이 조용히 읊조린다.
말 그대로 psv 선수들은 도르트문트의 강력한 프레싱에 맥을 못 추리고 있었
고, 제대로 된 골 찬스 한번 만들지 못하고 있다.
“슬슬 가자”
전반 내내 공을 잡자마자 자신에게 달려드는 4면 압박에 그대로 당한 상욱이
이를 악물고 드리블을 시도한다.
상욱이 아무리 탈압박과 드리블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극강의 조직력을 가진
수비 4명이 동시에 에워싸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진이 올라갑니다만, 받아줄 선수가 없습니다!]
[뭐 이번 시즌 psv에겐 익숙한 일이죠. 아 정말 빠릅니다! 현재 속도로는 전
세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터치라인에서 공을 잡은 상욱이 어떻게든 수비벽을 뚫으며 패널티라인 위로
올라가는 하디에게 스루패스 한다.
[하디가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진이 길게 하디 쪽으로- 아 로이스가 내려와
서 막아냅니다!]
[저게 바로 게겐프레싱이죠! 공격라인에서 공을 뺏기자마자 수비를 해오니 아
무리 진이라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하디의 실책으로 공격이 실패하자 이를 본 상욱이 장난스레 중얼거린다.
“정신 차려. 게르만”
그러나 하디는 동료의 말에 집중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채로 가만 서있을 뿐
이다.
“Ich bin hier wieder, Hardy”
로이스가 그를 보며 속삭이듯 말하자 그는 아무 것도 못한다.
“쟤가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상욱의 물음에 사색이 된 하디가 중얼거린다.
“또 지러 왔구나, 하디”
***
“코쿠, 에이스를 믿는건 좋은데 의지하면 안 되지”
전술에서부터 카운터를 맞았다.
천재 전술가로서 유럽 내 명성이 자자한 투헬은 상대와 비슷한 전략을 쓰고도
경기 내내 끊임없는 경기 지시와 전술 변경을 통해 psv를 압도했다.
코쿠 감독과 기본 역량에서부터 차이를 보였던 투헬.
psv 공격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전상욱을 어떻게든 막아내자 공격의 활로가 끊
기고, 뒤이어 팀의 공격 전개를 담당하던 하디를 차단해 상대를 완전히 틀어
막는다.
[로이스가 로핑패스 올립니다! 테저가 막으러 뛰어오는데요!]
로이스의 로핑패스. 분명 psv 수비 테저가 더 가까운 위치에서 공을 걷어내려
다가오나 오바메양이 먼저다.
[오바메양이 와아! 빠르게 달려와서 탈취합니다! 골키퍼 정면!!!!]
[들어갔습니다! 로이스와 오바메양의 완벽한 호흡! 선취점을 가져오는 도르트
문트입니다!]
0:1
이번 시즌 위기가 한 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 에이스들이 금방 동점
과 역전을 만들어주리라 생각했으나,
[코디 가포가 진에게 낮게 깔아주는 공! 아...수비가 많습니다]
[지금 하디가 아무 것도 못해주고 있어요! 도르트문트 압박에 패널티 라인에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하니까 공격 전개가 전혀 안됩니다!]
오히려 도르트문트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전반 내내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한 하디 크루거. 어떻게든 상욱이 볼을 잡고
기회를 만들어도 받아주는 선수가 아무도 없다.
후반 87분,
[우스만 뎀벨레가 돌파...하지 않고 수비 앞에 두고 오! 빠르게 올리는 크로
스!!!]
다소 길게 올린 크로스에 psv 수비가 별 무리 없이 처리하려고 할 때, 오늘
양 팀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로이스의 헤더가 작렬한다.
[또 들어갑니다! 스코어 2:0! 로이스 정도 되니까 가능한 골이에요!]
[올 시즌 psv가 처음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경기 종료 후.
왜인지 모르겠으나 하디는 야유하는 팬들을 뒤로하고 그라운드에 고개를 처박
은 채 퇴장하고, 상욱은 분노로 점칠되어 뛰어 들어간다.
***
0:2 패배.
진이 있었음에도 무기력하게 패배한 psv 라커룸은 그 어느 때보다 침울하다.
선수들 전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라커룸에 들어와 서로의 눈치만 봐대고, 하디
역시 평소와 달리 고개를 숙인 채 쓰라린 상처를 달랜다.
쥐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에서-
어느새 나타난 상욱이 바닥에 놓인 하디의 물통을 퍽 차며 소리친다.
“Gravur!”
좆같은 새끼!
깝치지 말지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