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크루이프와 베켄베워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로 손 꼽히는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
칸베워.
축구사 최고의 라이벌리의 역사를 돌아보자면 2010년대 메호대전, 90년대 지
단 호나우두, 80년 마라도나와 굴리트.
펠레라는 불세출의 전설이 지나간 1970년대 축구계는 두 말할 필요없이 크루
이프와 베켄베워의 시대였다.
공격수와 수비수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포지션의 두 선수가 축구계 전대
미문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까닭은, 월드컵 결승에서 맞붙은 것도 있겠으나 두
선수 모두 토탈사커의 구현과 리베로의 개념을 적립한 시대의 선구자이기 때
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같은 포지션에서-
2명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한다.
***
“반드시 이길 거야”
“찢어 버려줄게”
앞에선 매너있게 악수했으나 상욱과 재민은 각자 불같은 의지를 되새긴다.
전반 15분,
치열할 것 같았던 경기는 아약스가 주도권을 잡은 채 흘러가고 있었다.
크루이프의 토탈사커를 표방하는 아약스는 그저 케케묵은 옛 전술에만 국한되
지 않았다.
기존의 토탈 사커가 양쪽 측면을 넓히면서 풀백에게 과도한 짐을 지게 하거나
공간을 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면 에릭 텐하의 아약스는 달랐다.
오른쪽 풀백 마즈라위는 지속적으로 지예흐와 상호 연계하며 경기를 이끌었
고, 레이카르트의 재림이라 부르는 프랭키 더용은 홀딩 위치에서 상대 중원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텐 하흐의 아약스는 에레디비시 구단들과 궤를 달리했다.
현 유럽에서 가장 핫한 유망주 프랭키 더용과 더 리흐트와 지예흐-두샨 타디
치의 윙 포워드 라인은 psv 수비를 완벽하게 공략했다.
[로자노가 길게 돌패해 나갑니다! 아 빨라요- 리그에 로자노를 쉽게 막을 수
있는 선수가 또 있을....]
해설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난 더 리흐트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너무나
깔끔하게 공을 커트한다.
[더 리흐트의 완벽한 커팅! 역시 아약스의 미래입니다!]
지난 유스 경기 때보다 더욱 성장한 듯한 더리흐트가 로자노의 공을 뺏어내어
곧장 앞으로 길게 전달한다.
psv에게는 재앙 같게도, 그 공을 받은 선수는 다름아닌 리그 최고의 중앙 미
드필더 프랭키 더용이었다.
[프랭키 더용이 탈압박 해 나갑니다. 상대 수비 2명, 3명도 벗겨낸 다음 전진
패스까지!]
[레이카르트의 재림이라는 별명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용의 패스로 인해 무너진 psv 수비벽. 앞에서 반더비크가 곧장 공을 잡더니
그대로 골대가 찢어질 듯한 슈팅을 내지른다.
[골골골골골!!! Gooooool!! 경기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습니다!
아약스가 15분 만에 선취득점에 성공합니다!]
[완벽한 패스에 완벽한 골! 아약스는 역시 다릅니다!]
방금 공을 뺏긴 로자노 뿐 아니라 psv 선수 전체가 당황하여 술렁인다.
최근 2달간 psv를 압도하거나 비슷한 수준에서 붙은 팀은 레알 마드리드와 인
테르뿐이었으며, 리그에선 한 팀도 없었다.
그러나 아약스는 달랐다.
1억 유로 이상의 평가를 받는 프랭키 더용과 더 리흐트는 psv 공격을 완전히
틀어막은 뒤 역습까지 진행하고 있었고, 두샨 타디치-지예흐 등 유럽 상위권
공격라인은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전반 20분이 넘어가면서 아약스 쪽으로 경기흐름이 완전히 넘어갔을 때,
벤치에 있던 코쿠 감독이 조용히 읇조린다.
“시작해라 진”
그는 오늘 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시안 영웅이 공을 잡고 올라갑니다]
[오늘 공 잡을 기회가 없었던 진인데- 아! 역시 다릅니다!]
전술에서도, 선수 기량에서도 밀리던 psv나 코쿠 감독이 주눅 들지 않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을 마크하는 선수들이 보통의 수비수가 아닙니다. 당장 빅 리그로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들이에요!]
유벤투스와 바이에른 뮌헨, 두 거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전 유럽이
주목하는 중앙 수비수 더리흐트.
“neuken!” (씨발!)
챔피언스 리그까지 나가며 확실한 스텝업을 한 그는, 지금 진(Jin)이라는 아
시안 공격수에게 완벽히 당한 뒤 넘어진다.
“젠장! 이 새끼 그때보다...얼마나 강해진거야!”
[완벽한 크루이프 턴!! 아마 크루이프 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개인기가 우아할까요? 아시안 크루이프라고, 아니 그냥 크루
이프의 후예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더 리흐트를 넘으니 맨유에서 4년간 뛰었던 대형 수비수 데일리 블린트가 그
를 마크한다.
PL출신에 유로파 리그 우승 경력까지 있던 그는 단숨에 그에게 달려드나-
[팬텀 드리블! 진의 장기이죠!]
[더용이든, 더리흐트 등 누가 덤벼도 저 아시안 영웅을 넘을 수는 없을 것 같
습니다!]
그는 브린트까지 넘은 뒤 패널티라인 바로 앞까지 전진한다.
골대 앞엔 절망에 빠진 골키퍼 오나나가 상욱을 바라보고 있을 때, 스는 레알
마드리드 전과 같은 유려한 로빙 슛으로 상대 골문을 노리고 있을 때,
“들어갔다”
[고오오....!!!]
상욱과 해설 모두 득점에 확신하던 순간, 재민이 순식간에 나타나 볼이 골라
인 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걷어낸다.
[막아냅니다! 또 다른 아시아 스타입니다! 재!민!]
[이건 그냥 골을 막은게 아니라 한 골 넣었다고 봐도 됩니다. 정말 좋은 수비
네요!]
그저 한 번의 수비일 뿐이지만 이는 아약스에게 대단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진을 막을 수 있다, 우리 수비가 저 아시안 영웅보다 뛰어나다는 인식이 박힌
아약스 선수들은 더욱 활발히 상대 골문을 공략한다.
김재민은 오늘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진에게 쫄아있는 더리흐트와 진에 대한 정보 없이 덤벼 철저하게
당하는 블린트.
둘과 달리 상욱과 맞대결한 경험이 있었던 재민은 상욱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몰아붙인다.
전반 30분,
0:1로 여전히 아약스가 이기고 있을 무렵.
[하디가 진에게 스루 패스! 아 블린트는 상대가 못 됩니다, 결국 재민만 남았
습니다!]
최종 수비 김재민과 상욱이 치열하게 대치한다. 아까 로빙슛이 막혔던 상욱은
이번엔 유려한 개인기로 그를 뚫고자 한다.
[마드리드와 인테르 수비들도 막지 못했던 진입니다. 그대로 돌파! 아!!!]
‘이때 쯤 플립플랩하겠지-’
상욱의 플레이 영상을 질릴 때까지 봤던 재민은 오른쪽으로 드리블하다 순식
간에 반댓발로 바꿔 돌파하는 상욱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또 막았습니다! 재민입니다!!!]
[진이 데뷔하고 나서 저렇게 막히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상대의 플레이를 읽어내서 공을 가로채는 소름끼치도록 대단한 인터셉트 능력.
그저 상욱을 보러온 스카우터들은 덩치 큰 또 다른 아시안 선수를 보고 순간
어떤 선수가 떠올랐다.
‘프란츠 베켄베워’
그 후에도 백쓰리의 가장 후미에서 경기를 마크하던 그는 뒤이어 빠르게 들어
오던 코디 가포와 로자노를 완벽하게 막아내고, 이번엔 중앙까지 나가 중거리
슛을 노리는 상욱까지 커트한다.
[오늘 그 대단한 진이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재민을 보고 생각한다.
수비능력 뛰어난 수비수.
그러나 그의 능력은 그저 수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늘 경기 최고의 활약을 보인 재민이 중앙으로 나옵니다]
그러더니 그는 공을 찍고 psv 패널티라인으로 길게 공을 차낸다.
[긴- 롱패스가 이어집니....아! 지예흐가 받았습니다! 골키퍼 정면 그대로
슛!!!]
재민이 보낸 패스는 그대로 상대 패널티 라인에 있는 하킴 지예흐에게 이어지
고, 공을 받은 네덜란드 포워드는 실수 없이 골을 성공시킨다.
[판타스틱한 패스입니다! 지금 그의 플레이는 딱 하나만 떠오릅니다! 시청자
여러분도 아시는 바로 그 선수입니다!]
[프란츠 베켄베워가 재림한 것 같습니다!!!]
***
전반 40분에 0:2는 상황은 결코 좋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 절망적이기까지
하며, 게다가 명색이 코리안 더비 상대에게도 철저히 밟히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나 상욱의 표정은 밝다.
“김재민이 베켄베워라고?”
하프라인 왼쪽에서 천천히 경기를 바라보던 상욱이 싱그럽게 웃어보인다.
“그럼 내가 크루이프 해주 마”
어느 순간 하프라인 밑 쪽에서 활동하는 상욱. 어떻게든 돌파하다보니 지금껏
놓쳤던 경기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직전처럼 공을 몰고 홀로 올라가던 상욱. 곧 재민이 그를 확인하고 1:1 마크
를 위해 뛰어온다.
[응? 왜 저 쪽으로...와아! 하디 크루거가 받아냅니다!!]
상욱의 대지를 가르는 패스가 순간 메짤라처럼 오른쪽 윙으로 활동하던 하디
에게 연결된다.
뒤늦게 진의 의도를 파악한 재민이 하디에게 달려가나 이미 거리 차이가 심하다.
[이건 진과 하디 둘 다 대단한 겁니다! 저런 곳에 공을 보내고 받는 건 보통
천재성으로 가능한 게 아니에요!]
“뭐라도 보여 줘!!”
상욱의 말에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는 하디.
“내가 바본 줄 아나-”
골대 왼쪽 구석을 정확히 노린 슈팅이 깔끔히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완벽한 패스와 완벽한 골! 아직 경기 안 끝났습니다! 진과 하디입니다!!!]
[진이 패스까지 이렇게 잘하는 선수였나요?! 그저 경이롭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네요...]
지난 2개월 동안 하디에게 패스와 시야를 읽는 것을 배운 상욱.
경기장 전체를 보는 시야,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쏘는 창의적인
패스는 마치-
“크루이프가 따로 없군”
맨유 스카우터 데릭 랑글리가 상욱의 활약을 보며 헛웃음을 짓는다.
퍼거슨의 추천을 받아 무리뉴 감독의 지시로 상욱을 보러온 그는 두 한국인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다.
“저 코리아 듀오는 정말...”
“잘만하면 맨시티를 넘을 수도 있겠는데요?”
부하 직원의 말에 조용히 읊조리는 랑글리.
“맨시티는 무슨, 저 두 놈만 있으면 유럽의 왕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전반 48분.
방금 골로 당황한 아약스와 어떻게든 동점으로 전반을 마치고 싶었던 psv.
‘개인기? 아니면 이번에도 패스인가?’
상욱에게 패스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재민이 긴장된 표정으로 상욱의 걸음을
쫒는다.
‘뭐든 상관없어. 무조건 막는다’
재민은 그가 개인기를 하던 패스를 하던 그는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진의 영
상을 수십 번, 수백 번 넘게 본 그다.
마크를 위해 튀어나오는 재민을 본 상욱은 이죽거리며 다시 한번 돌파를 시도
한다.
그의 플레이는 단순했다.
유려한 드리블이나 우아한 개인기가 아니었으며, 상대를 이용하는 패스는 더
더욱 없었다.
“난 크루이프가 아냐”
그는 하프라인에서 아약스 진영까지 그저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달려가기 시작
한다.
[멀리 공을 차고 달려가는 진! 더용도, 리흐트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아니 지금 이게....말이 됩니까?]
프로축구다.
그것도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나가는 팀끼리의 대결이다.
그런데 상욱은 그저 스피드로만 상대를 제쳐내고 있었다.
“완전히 미쳤군!”
맨유 스카우터 랑글리도, psv 감독 코쿠도, 아약스의 에릭 텐하흐까지 자리에
서 일어나 입을 떡 벌린다.
“안 진다!!!!”
뒤이어 다가온 재민이 발을 뻗으나 상욱은 오직 스피드 만으로 재민까지 제쳐
낸 뒤 그대로 골을 성공시킨다.
“안 된다니까 그러네-”
조용히 읊조리며 동점을 만드는 상욱을 본 해설자들은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
린다.
[.....축구는 혼자 하는 게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만-
지금 우리는 축구의 개념을 벗어난 최초의 선수를 보고 있습니다]
작가의말
바닥을 보이는 세이브 원고
네덜란드의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