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다이나믹 듀오 (2)
“젠장...왜 이렇게 찾기가 힘든 거야! 주변에서 30분은 헤맸단 말이다!”
양손 가득 맥주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소시지를 꺼내더니 탁자에 내려
놓는 하디 크루거.
“미성년자라서 클럽으로 부르지도 못하고 말야. 그래도 가끔 이런 소소한 자
리도 나쁘지 않지”
이 소시지 하나 가격을 알면 제대로 먹지도 못할 거라며 피식거리던 그는 여
전히 어안이 벙벙한 대근과 날 보며 소시지 더미를 던진다.
“헤이 아시안들, 이거 구워!”
대근 형은 하디 크루거의 등장에 완전히 충격받은 것이 눈으로 보인다.
평소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선수이자, 자신이 서포터하는 팀의 에이스가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온 것도 신기한데, 갑자기 맥주와 소시지를 식탁에 내리더니
구워오라고 말까지 한다.
“이.일단 내가...구울게”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듯한 대근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부엌으로 들어가
려고 할 때-
“Halt halt” (멈춰)
이 모습을 본 하디가 눈을 부릅뜨더니 나와 대근을 동시에 바라본다.
“헤이 아시안, 넌 진 저놈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그렇지 않아?”
“..네? 네네. 맞아요..제 6살 더...많죠”
나이가 많다,
6살이나.
하는 말에 그는 당장 내 손에 소시지를 쥐어준다.
“넌 예의라는 것도 없냐! 내가 만났던 아시아 선수들은 당연히 나이 어린 사
람이 다 했어!”
“????뭐라는 거야? 너 술 취했니?”
아니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말하는 건 50대 꼬장꼬장한 부장인데 생긴건
20대 중반의 잘생긴 금발 청년이 앉아있으니 도저히 매치가 안 된다.
“안 되겠다. 아시안, 아니 코리안. 너는 내가 선·후배 관계에 대해서 다시 알
려줘야겠어”
동료끼리, 아니 에인트호번 선·후배끼리 식사하고 술 한잔하러 왔다는 말에
괜히 이상하게 그에게 휘둘려 소시지를 직접 굽는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방금 먹었는디...”
“그러면 또 먹어! 요즘 애들은- 말야! 나 때는 동양인 선배들이 김치 먹으라
면 김치도, 낫토도 다 먹었어!”
저게 농담인지 진심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하디의 미친 소리에 어처구니가 없
어 헛웃음을 짓고 있으니 그는 먼저 맥주캔을 따 내 앞에 놔둔다.
“아- 나 미성년자야”
“어허! 그냥 받고 짠만 하는거야! 누가 마시라고 했나”
내가 지금 대건고 백승수 감독과 술을 먹고 있나 싶어서 대충 건배만하고 소
시지를 먹는다.
방금까지
“맛있지? 독일에서도 잘 못 구하는 소시지야. 나쯤 되니까 이렇게 많이 가져
올 수 있었던 거지-”
“근데 웬 소시지를 가져와?”
“네가 경기 중에 소시지, 소시지 했잖아. 먹고 싶단거 아니었냐?”
아..그..건 경기중에 너 편하게 부르려고 그렇게 부른건데, 라곤 말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야! 어때 맛있지?”
“음”
“이거 진짜 귀한 거야. 독일에서도 잘 구할 수도 없고”
”아이 알겠다고 무슨 소시지 얘기를 몇 번을 해!“
다소 짜증 난 듯한 내 반응에 하디는 꽤 나 즐거운 양 웃으며 맥주를 한번에
들이키다가 문득 다가온다.
”이봐 코리안“
”왜 절머니“
“오늘 경기장에서는 미안했다”
순식간에 2캔째 맥주를 들이켜던 그가 날 보며 조용히, 그러나 진심 어린 투
로 말한다.
하디가 이렇게 찾아와 먼저 사과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내가 이기적이었어. 진, 너나 다른 동료들한테 무례하기도 했지. 개인적으로
조급하고, 내 뜻대로 경기가 안 풀리니 답답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서 하디의 표정이 대단히 진지하게 변한다.
“동료들에게도 대할 때도 아차 싶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내 조급함에
하지 말아야 할 소리 들만 지껄이지”
그저 이기적이고 인성 개차반인 꼰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사과하
는 것을 보면 이놈 결코 악인은 아니며, 앞으로 좋게좋게 잘 지낼 수도 있겠
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물론 네 잘못이 없는 건 아니야”
아으 꼰대 새끼.
그냥 바로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선배가 흥분하면 후배는 차분히 넘어가야 하는 법도 있는 거야. 특히 나 같
은 슈퍼스타면 더더욱”
동양의 꼰대 사상과 서양의 오만한 스타의식이 뒤섞인 이 끔찍한 혼종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봐 코리안”
어느새 내 조국을 정확히 인지하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하디 크루거.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빨리 좀 말해. 왜 이리 뜸을 들여?”
“네가 가진 재능은 보통이 아니다. 보통 선수들은 감히 비빌 수 없고 어쩌면
월드컵 MVP를 지녔던 나보다도 더”
이렇게 말하면서 조금의 장난도 섞이지 않은 진지한 표정을 짓는 하디의 모습
에 나와 대근 형이 살짝 놀란다.
저렇게 자의식 높은 사람이 대놓고 남을 칭찬한다고?
“넌 반드시 여기서 성공할 거다. 아니, 성공 따위를 뛰어넘어 네덜란드 안에
선 신으로 불릴 수도 있겠지”
“....그래서?”
“오늘 너랑 같이 경기하고 나서 깨달았다. 나와 넌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야. 아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듀오로 성장할 수도 있겠지”
이미 3캔째 맥주를 따고 있던 하디는 자신 옆에 멍하니 앉아있는 대근에게 맥
주와 소시지를 건네며 말을 잇는다.
“진, 너도 목표가 있을 거 아니냐.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든, 발롱도르든 말야.
그러기 위해선 더 큰 리그에, 더 강한 팀으로 가야 해. 그러려면 여기서 활약
을 해야하고-”
어찌됐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이다.
“난 2시즌 안에 이곳을 떠날 계획이다. 대신 이적료는 역대 최고액으로 비싸
게 나갈 거야. psv는 날 비싸게 사준 고마운 팀이니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란다는 거야?”
이 부분에서 그는 내 앞에 놓인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를 전부 들이킨다.
“앞으로 2년, 목숨을 걸고 뛰는 게 좋을 거야. 그 2년이 네 인생을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바꿀 거니까”
이번엔 놀란 나와 대근을 보며 싱긋 웃어보이는 하디.
“물론 나 역시 지금부터 목숨을 건다. 네덜란드에서 커리어를 끝내기엔...내
재능이 너무 아까워”
진심 어린 남자의 다짐에 몇 시간 전까지 안고 있던 응어리가 한순간에 풀린다.
보통 선수들이 말한다면 그냥 열심히 하자는 단합대회에 지나지 않으나 그 상
대가 독일 역대 최고의 재능이라 불렸던 하디 크루거라면 그 분위기가 다르다.
그 다짐,
기꺼이 받아주지.
“좋아, 잘 부탁해 파트너”
씩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권하자 갑자기 눈살이 찌푸려지는 하디.
“동양에선 선배가 악수하기 전까진 하는 게 아니지 않냐? 쯧쯔....이런 건방
진 아시안을 봤나!”
아오 진짜
이 미친 서양 꼰대 진짜
***
일주일 뒤 캄뷔르 2군과의 리저브리그 경기.
[하디가 길게 올려주는데요! 살짝 짧습니다만 진이 올라갑니다! 태클로 균형
무너집니다만- 역시!!!]
[굿! 하디와 진의 굿플레이입니다! 캄뷔르 수비가 전혀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다음 트벤터 리저브팀과의 경기.
[오늘 경기 이미 동점골을 기록한 진입니다만, 또다시 득점기회를 엿보고 있
습니다. 뛰어 들어가면서- 이번엔 하디 쪽으로 연결합니다! 왼발!!!]
[결국 들어갔습니다! 하디 크루거의 감각적인 왼발 슈팅! 예전 레버쿠전 시절
에 자주 보여주던 폼입니다!]
지난 3경기 동안 psv 2군이 기록한 득점은 총 11골.
11골 중 상욱과 하디는 서로 10골을 합작하며 팀의 중심으로 우뚝 서고 동시
에 팬들 사이에서 다이나믹 듀오니, 하디-진 라인이니 찬사를 들었다.
함께 발을 맞춘 지 고작 3주밖에 되지 않은 두 사람이나 서로 가진 천재성은
그저 숙달된 연습으로 익힐 수 있는 호흡이 아니었다.
하디가 상대는커녕 아군도 눈치채지 못할 깊숙한 곳으로 찔러준 스루패스가
정확히 상욱의 발에 걸려 골까지 연결되고, 분명 아무도 없는 곳에 올리는 크
로스를 상욱이 가슴으로 받아 드리블 해 나간다.
이들을 막기 위해 리저브 리그 내 다른 팀들도 놀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
지컬 좋은 수비수들을 배치해 하디를 압박하거나 발 빠르고 낮은 수비수를 이
용해 상욱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나-
[진의 돌파, 아무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대로 크로스 올라가는데요! 하디!!!!]
[축구 교본에 나올 법한 발리 골입니다! 하디-진이 만들어낸 오늘 경기 4번째
골!]
애초 클래스가 다른 두 선수를 건드리는 것을 불가능에 가까웠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경기는 끝나기 직전이나 하디와 상욱은 이상하
게 절박하리만큼 골에 집중한다.
[오늘 경기 마지막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하디가 수비라인 앞으로 길게 스
루패스!]
하디의 패스가 길었던 건지, 상욱이 재빠르게 돌파하지 못했던 건지 알 수 없
었으나 골키퍼에게 막힌 뒤 경기가 종료된다.
[골키퍼가 깔끔하게 처리하고, 경기 끝났습니다. 4:1로 psv 리저브팀이 승리
합니다]
환호하는 서포터들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반니스텔루이 감독이 이들을 격려
하기 위해 다가오나-
“야 너 마지막 뭐냐?”
하디가 상욱에게 불만 가득히 말한다.
“뭐?”
“마지막에 왜 놓쳤냐고. 그것만 아니었어도 1점 더 낼 수 있었단 말야!”
그냥 늘 하던 대로 개소리하는 거다. 평소엔 대충 무시하던 상욱이나 오늘은
괜히 심술이 난 상욱이 짜증스럽게 답한다.
“네가 이상하게 패스를 주니까 놓친거 아냐. 무슨 미드필더가 패스도 똑바로
못해-”
“뭐?! 이상?!! 아시안 너!”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내내 신경질을 부리는 하디이나 상욱을 포함한 팀원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그의 모습이 재밌는지 낄낄거리는 선수까지 있을 정도다.
지난 3주간 하디 크루거는 변했다.
상욱을 만나 플레이에 여유가 생긴 건지, 아님 정신을 차린 건지 몰라도 차츰
차츰 동료들에게 패스하고 조금씩 소통하기 시작했다.
상대의 실수를 비난보다 격려하고, 상대가 악의적인 반칙을 했을 때 불같은
성격으로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팀을 위해서 싸워주니 팀 내에서 평이 달라
졌다.
‘그냥 성격 이상한 미친놈일 뿐이지, 나쁜 녀석은 아니었어!’
라는 여론을 받은 하디는 점차 팀에 적응해갔고, 지나치게 예의를 갖추는 꼰
대에 웃긴 이미지가 점칠 되어 라커룸 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었다.
“너네- 그만 좀 싸워라”
찡그린 표정으로 들어오는 반니 감독. 지난 3주간 하디와 상욱의 틱틱거림을
말리느라 3년은 늙은 듯한 반니가
“오늘 다들 잘했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 기량이 나아진다는
것도 중요한거야”
간단히 경기 총평을 한 감독은 문득 생각났는지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 그리고 하디는 내일부터 1군에서 뛴다”
“...네..네?!”
놀란 하디의 반응이 의외라는 반니 감독.
“뭘 그리 놀라? 1군으로 가야지. 구단에서 주급을 제일 많이 받는데 리저브에
서 뛰면 되겠어?”
“아...그...그렇죠”
분명 기쁜 일이나 하디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는다. 지난 3주간 상욱과
함께 지내며 축구 했던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기 중 하나였던 것
이다.
1군으로의 복귀에 기쁘나 씁쓸함이 함께 묻어나오는 하디의 표정.
“아 하나 깜빡했다”
이 모습을 정확히 파악한 반니가 즐거운 듯 마치 아이처럼 말한다.
“진, 너도 내일부터 1군이다. 바로 짐 싸”
루크 더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