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이나믹 듀오 (1)
하디 크루거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무리 자신이 잘났어도 축구는 11명이 함께하는 스포츠다. 개인보다 팀이 우
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자신의 플레이 하나하나가 팀의 승리를 위
해 이뤄져야할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러나 잘되지 않는다.
하디는 2시즌 이상 실전 경험이 전무한 수준의 자신을 비싼 값에 사준 psv에
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폼 다 떨어져 17살 때 재능만으로 뛰고 있는 퇴물 유망주를 클럽 레코드를 지
불해 사주는 구단에게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디는 이곳에 오래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24살, 선수 생활을 정리하기엔 지나치게 어린 나이.
그는 다시 유럽 중심부로 돌아가 축구하길 원했고, 어떻게든 폼을 예전처럼
끌어올려서 잘나갈 때 기량을 되찾아 1~2년 안에 재이적을 준비했다.
물론 psv에게는 자신이 지금 온 이적료의 3배, 4배로 돈을 지불한 뒤 떠날 생
각이었다.
그러나 에레디비시 선수들은 예상외로 뛰어났고 이미 폼 떨어진 하디의 생각
처럼 압도하지 못했다.
이따금 씩 클래스를 보여주긴 했지만 경기를 뒤집을 만큼 위협적이지 못했고,
오히려 무리하게 돌파하다가 부상 당해 리저브 리그까지 내려앉은 상황에 놓
였다.
경기는 안 풀리고, 동료들관 못 어울리고, 실력은 점점 더 줄어들어 갈 때,
만난 것이 전상욱이었다.
고작 17살의 나이에 프로 데뷔한, 구단에서 각별히 신경쓰는 아시안 유망주.
구단 관계자 몇몇은 ‘아시안 호마리우’니 ‘한국의 반니스텔루이’니 극찬을 하
는 꼴이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가 더 꼴보기 싫었다. 예전에 실력 하나만 믿고 자신있게 그라운드
를 누비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고작 17살 주제에 뭘 한다고...”
놈의 자신에 찬 모습이 보기 싫었다. 자신에게 패스하라, 그러면 이길 수 있
다-는 단순한 생각이 짜증났으나 아시안 놈이 한번이라도 놓치면 흠씬 두들겨
패주자는 생각에 공을 잡고 본인의 장기인 빠른 스루패스를 진행한다.
[하디 크루거가 중앙에서 공 잡고 앞으로 길게- 찔러줍니다!]
[아...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자신이 공을 받자마자 빠르게 뛰어 들어가는 상욱을 보고 상대 수비 뒷공간
쪽으로 속공하는 하디.
“쳇, 너무 빨랐나?”
연습 부족인지, 실전 감각 하락인지 몰라도 그의 패스는 공격수가 받기 너무
빠르게 도착했고, 이미 상대 수비수가 컷팅을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아...아!!]
경악은 해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중들을 포함한 양팀 코칭스텝, 경기장에 있는 22명은 선수 전원이 한 선수
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전상욱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공을 받기 위해 뛰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뭐.뭐야? 육상선수인가?”
길게 찬 공은 이미 오른쪽 끝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으며, 이미 2m 앞까지 다
가온 수비수가 이를 걷어내기 직전이었다.
이럴땐 상대에게 공격패턴이 넘어가는게 당연한 거다.
종사자는 물론이고, 축구에 무지한 관중들마저 평범한 패스미스라고 생각했다.
어린 아시안은 인간이라기보단 치타나 독수리 같았다. 그는 단번엔 달려들어
넘어가기 직전의 공을 잡은 뒤 빠르게 상대 패널티 라인으로 뛰어간다.
중앙 수비 몇몇이 놀라서 달려드나 질주 속도를 조금도 낮추지 않은 아시안은
이들마저 제치고 골키퍼와 1:1 상황을 마주한다.
[남은건 골키퍼 한 명! 진....들어갑니다! 데뷔전! 데뷔골! 후반 시작 15초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먹잇감을 사냥하는 맹수와 같습니다! 패스가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psv가 앞서 나갑니다!]
자신을 믿어준 감독에게 동양식 인사를 하고 팬들에게 달려가 데뷔골에 대한
기쁨을 표시하는 17살의 아시안은- 하디가 지금껏 봐온 선수들과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이럴수가...이게...”
전상욱의 재능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천재나 리그 베스트 수준의 단어로 표
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하디 크루거는 생각했다.
Kaiser, 그는 감히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
“아 거 새끼, 패스 한번 더럽게 주네”
야유하던 팬들과 우릴 불안하게 쳐다보던 벤치가 한순간에 싱글벙글하게 변한다.
이는 선제골을 넣어서 그런 것도 있으나 전반 내내 부딪쳤던 나와 하디 크루
거의 합작품으로 골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안도감도 있을 것이다.
저 새끼들 싸운 거 아니구나- 생각하겠지.
벤치와 관중석을 돌며 세 리머니하면서 하디에게 다가가 조용히 영어로 속삭
인다.
“패스 좀 제대로 해. 못 넣을 뻔했잖아”
“닥쳐. 이번엔 제대로 넣을테니까”
여전히 쏘아붙이는 하디이나 그의 표정은 묘하게 웃고 있는 듯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골이 들어가니 수비수들은 내가 에이스임을 깨닫고 대부
분이 날 마크하기 시작한다.
유니폼을 몰래 잡아당기거나 190cm가 넘는 선수들은 위에서 내 어깨를 누르거
나 바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기도 한다.
방금 들어간 골이 꽤 충격이긴 했나보다.
후반 55분,
수비에서 길게 찬 로빙패스를 받은 하디 크루거가 이를 악물더니 크게 외친다.
“아시안! 들어가!!”
놈의 스루패스는 하디 크루거라는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수준이었다.
정확하게 3초 뒤 내가 뛰어가서 받을 거리에 공을 전달한 하디의 패스는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고, 수비수들이 막아보려 발을 뻗으나 공을 우습게도 정확히
내게 전달된다.
골키퍼는 10분 전과 똑같은 상황에 긴장된 표정으로 몸을 굽힌 채 수비를 위
해 나오나,
“내가 바본줄 아나”
그대로 골대 왼쪽 구석으로 공을 밀어넣는다.
[또 들어갑니다! 하디 크루거의 완벽한 스루패스!]
[이건 하디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루트, 같은 득점! 이번에도
전상욱입니다!]
어찌나 완벽한 패스였는지 하디를 싫어하는 우리팀 동료들조차도 어느새 다가
와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놀라움에 어깨를 툭치고 지나간다.
썩 나쁘지 않은 표정의 하디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이를 보이며 이죽거린다.
“이런 게 패스란다. 꼬마야”
“뭐....아까보단 확실히 낫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살면서 그러니까 다니엘 잭슨을 포함해서 본 패스 중
가장 정확한 패스였다.
데뷔 전에서 2골.
“빨리 1군으로 넘어가려면-”
그래도 헤트트릭은 해야지.
***
후반 65분이 막 넘어가고 있을 때,
발베이크 리저브팀 수비수들은 경기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1분에 한 번씩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전광판을 보나 아직 경기는 15분이나 넘
게 남았다.
[하디 크루거가 짧은 크로스 골키퍼 정면! 아 크로스바 맞고 맙니다!]
[지금 발베이크 선수들이 하디-진 이 두 선수를 전혀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겁에 질린 것 같아요!]
금발의 독일인과 앳되고 잘생긴 동양인은 차례로 자신들의 진영을 박살내고
있었다.
하디의 패스 한방에 공간이 열리고 진의 슈팅에 골대가 열리며, 수비수들의
자존감이 계속 떨어진다.
“지랄 마 진짜. 여긴...리저브 리그라고!”
수비수 하나가 상욱의 돌파에 대한 마크를 실패하며 짜증스럽게 외친다.
여긴 리저브 리그다.
1군에서 뛰기 부족한 선수들이 오는 곳이지, 당장 1군에서 뛰어도 탑 클래스
로 뛸 만한 선수들이 올 곳이 아니란 말이다.
하디가 폼 떨어진 것은 발베이크 선수들도 알고 있었다.
여전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협력해서 막으면 저 독단적인 미드필더를
가둬놀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실제로 전반 내내 이들은 하디를 잘 막았다.
별 다른 위협없이 후반에도 같은 작전으로 놈을 묶고 역습까지 하려고 했으나
이들의 작전은 웬 괴상한 동양인 선수에게 무너진다.
유스리그에서 4경기 만에 올라온 키 큰 동양인 공격수.
전반전엔 팀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같은 팀 하디와 싸우는 등 한심한 모습
을 보여 별 신경 쓰지 않았으나 후반전에 들어온 놈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
람이었다.
“큭...저 동양인 놈....!”
“막아!!!”
후반 72분,
[Jin]이란 유니폼을 입은 놈이 또 한번 질주한다.
선수들은 그를 따라잡긴커녕 겨우 뒤꽁무니만 쫒아가는 것이 전부였고, 이번
엔 골키퍼와 수비가 위치를 잡고 상욱을 막으려고 할 때-
“야 소세지!!!!”
극적인 순간에 상욱이 힐킥하여 뒤로 공을 빠르게 보내자 이는 뒤따라오던 하
디에게 정확하게 걸렸고 그는 오른쪽 구석으로 너무나 깔끔하게 골을 성공시
킨다.
[또 들어갔습니다! 이번엔 하디! 전반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에인트
호번입니다!]
[이번 골은 진의 어시스트와 하디의 골이었습니다. 두 선수 함께하는 경기가
오늘이 처음 아닌가요?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라도 한 걸까요?!]
이미 경기는 기울었다. 발베이크 선수들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침울한 표정으
로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애초 전상욱과 하디 크루거는 리저브 리그에서 뛸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게 패.스란거다. 꼬마야”
이번엔 역으로 상욱이 하디에게 이죽거린다.
“지랄하지 마. 나정도 클래스가 아니었다면 못 받을 정도로 빠른 패스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런거까지 다 계산하고 한 패스라고-”
물론 거짓말이다.
상욱도 보내면서 아차! 싶었으나 하디는 이를 귀신같은 터치로 받아내더니 간
단하게 골까지 연결한다.
경기 진행 90분이 넘어가는 시간,
경기 종료까지 1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3:0 스코어.
이 정도면 적당히 볼만 돌리다가 끝낼 수도 있는 상황일진대 하디와 상욱은
오히려 경기에서 밀리고 있는 것 마냥 미친 듯 뛰어다닌다.
[하디가 마치 메시처럼 돌파하고 있습니다!]
[수비가 진에게 몰리고 있으니까 자신에 대한 프레스가 헐거워졌다는 걸아는
거에요!]
미친놈이 1명만 있어도 버거워서 허우적대는데, 2명이나 된다.
왼쪽 패널티 라인 끝으로 이동한 하디가 헛다리짚기를 이용해 수비를 제쳐내
고 짧게 크로스를 올리자 동시에 패널티 라인 끝에 있던 상욱이 득달같이 달
려온다.
[와 뛰어 오르는 높이 좀 보십쇼!!!]
[진- 헤더!!! 또 들어갑니다!]
4:0
상욱은 데뷔전에서 무려 해트트릭을 기록했으며, 서포터들은 경기가 끝났음에
도 쉬지 않고 진과 하디를 연호한다.
“진, 하디!! 이 예쁜 자식들-”
경기 종료 후 이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어오는 반니스텔루이 감독.
그러나 상욱과 하디는 감독이 오는 것도 모른 채 또 으르렁거린다.
“어때, 내 말대로 하니까 쉽게 이겼지?”
“까불지마 아시안. 동양은 선·후배 관계가 깍듯하다더니 네놈은 그런 것도 못
배웠냐?”
또 다시 불붙기 시작하는 두 선수.
이번에도 재수 없게 감독이 두 사람의 다툼을 확인한다.
“이....진! 하디! 너네는 주급 1주 정지다!!!!!”
***
주급 정지래 봤자 애초 얼마 받지도 않아서 별 타격도 없었다.
하디나 3천만 원 넘게 손해지 뭐.
게다가 징계내린 반니 감독이 신경 쓰이는지 자비로 이미 3주치 주급을 주고
가기도 했다.
처음 날 벤치로 내리려고 했던 반니 감독의 마음도 이해했다. 아무리 나를 아
낀다고 한들, 새파랗게 어린 2군 선수를 두둔할 순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상
대는 클럽 레코드를 주고 영입한 선수가 아닌가.
데뷔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대근은 서프라이즈 파티라며 상다리를
부러지게 저녁 식사를 차린 뒤 내게 안긴다.
“데뷔전 헤트트릭! PSV의 자존심! 에레디비시의 자랑!”
대근 형의 오버가 썩 귀찮지 않다. 먼 타국에서 대근이 형 같은 대단히 헌신
적이고 좋은 매니저도 없을 것이다.
“아유- 뭘 이렇게 준비하셨어요. 대충 먹으면 되지...”
“대충 먹기는! 팀의 미래인데!! 이거 다 먹어야 돼!”
형의 호들갑에 따라 저녁 식사 후, 간만에 위닝을 하기 위해 소파에 앉자,
딩-동
집 앞 초인종이 울린다.
“뭐야? 누구 올 사람 있어요?”
물어보자 대근은 황당하다는 듯 답변한다.
“상욱아, 여기 너네 집이야...왜 나한테 물어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
“offene Tür! Hardy Krüger!”
(나 하디크루거야! 문 열어!!)
다이나믹 듀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