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불협화음
[아넬카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은 너무 어린 나이에 성공했다는 겁니다. 10대에
큰 성공을 두면 어린 선수들은 거기에 만족할 줄 모르죠.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잊혀진 유망주들이 그렇습니다. 보얀이나 벤틀리가 그랬
듯이요.
그렇지 않고 성공한 선수요?
뱌르샤에 있던 메시가 그러했고..지금은 아시아의 위대한 공격수도 포함할 수
있을 것 같네요]
-2026년 前 아스날 감독 아르센 벵거
***
하디 크루거는 좆같은 놈이다.
20년이 넘는 축구 인생으로 돌이켜보건대 저 새끼처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인 선수가 또 있을까?
구단 역대 최고액을 기록하고 이적했음에도 별 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재활을 위해 리저브 리그에 뛰면서 스트레스 받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근데 어떻게 본인의 감정만 생각할 수 있는가.
“하디! 이쪽으로 공 보내, 공간 비었어!”
아무리 소리를 질러봤자 그는 하디 새끼는 조금의 미동도 않는다.
그는 완벽히 경기를 망치고 있었다
단단한 조직력과 짜임새있는 수비전략으로 상대를 강하게 프레싱하는 발베이
크 리저브팀은 1군과 마찬가지로 결코 쉬운 팀이 아니었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우린 피지컬을 이용한 상대의 강력한 압박을 받아야만 했
으며, 이를 뚫기 위해선 빠른 발을 가진 공격수와 창의적인 패스를 해줄 수
있는 미드필더의 조합이 필수적이었다.
반니 감독의 작전은 상대의 카운터를 치기에 충분했다.
다만 선수들이 제 역할을 못해줄 뿐.
전반 10분.
좋은 위치에서 공을 잡은 하디를 보고 외친다.
“마이!!”
됐다, 내 스피드 정도면 수비수 몇 정도는 들어갈 수 있으니까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날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본인이 공을 몰고 앞으로 나선다.
못 들었나? 싶어 이번엔 어제 공부해 둔 짧은 독일어까지 섞어가며 하디에게
외친다.
“weitergeben!” (패스해!)
씹새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까딱하긴 하나 스스로 돌파해 들어간다.
1명, 2명은 제칠 수 있으나 메시·호날두가 아니고서야 덩치 큰 수비수들을 전
부 제칠 수 없다.
“반칙! 손으로 밀었다고!”
최종수비의 거친 수비에 고꾸라진 그는 심판에게 몇 번이나 반칙임을 항의하
나 주심은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경기를 속행한다.
처음에는 다급한가보다 싶었다.
그래도 전 소속팀이 바이에른 뮌헨이었는데 여기서 기량을 회복해서 다시 유
럽 상위리그고 가고 싶은 맘에 조급해서 이런 독단적인 플레이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이놈은 사람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놈이다.
전반 16분.
패널티라인 오른쪽 끝에 있던 하디 크루거. 곧바로 내가 중앙 쪽으로 달려 들
어가며 손을 번쩍 든다.
“크로스 올려!”
이번엔 올리겠지- 싶었으나 그의 선택은 수비를 제치고 그대로 반 박자 빠른
슈팅.
[아! 크로스바 맞고 맙니다!]
[괜찮은 슈팅이었습니다만 밑에 있는 진에게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
은데요]
분명 나쁘지 않은 모습이나 경기를 혼자 뒤집긴 힘든 클래스다.
“감독 말 못 들었어?! 제대로 좀 패스해!”
이를 보다 못한 우리 팀 주장이 다가와 단호한 표정으로 일갈하자 그를 살짝
째려보더니 이내 짜증스럽게 대답하더니 곧 사라지는 그다.
“네가 위치만 잘 잡았다면 패스했을 거야”
경기는 우리에게 전혀 좋지 못했다. 상대 공격진이 한심해서 아직 골을 넣지
못한 거지, 우린 벌써 여러 번의 위기를 맞았고 골키퍼의 기적과 같은 선방이
없었다면 벌써 몇 점이나 뒤지고 있었을 것이다.
프로 데뷔전에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던 나이나 전반 내내 아무런 활약도
없이 허무하게 끝내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축구는 혼자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미드필더 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유자재로 골을 만들어내기엔 아직 부족한
수준이며 네덜란드 센터백들의 피지컬과 거침은 가히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지금 상태론 골은커녕 기회도 만들 수 없다.
제대로 된 패스와 공간이 필요했다.
0:0
양 팀의 지루한 공방전이 지속되고 있는 전반 35분.
중앙에서 공을 받은 하디 크루거가 돌파하려다 이내 생각을 바꿨는지 동시에
오른쪽 윙어를 보며 버럭 외친다.
“야 뛰어 들어가!!!!!”
아무런 사인도 없이, 그것도 질주상태도 아니여서 속력도 붙지 않았는데 빠르
게 상대 수비 근처까지 멀리 스루패스를 보내니 윙어가 아무리 빨라도 공을
받지 못했다.
그의 패스는 다가오는 상대 센터백에게 간단하게 막힌 뒤 오히려 롱볼을 이용
해 역습 위기까지 놓일 뻔 한다.
“Arschloch! (병신새끼!)
누가 봐도 욕인거 같은 독일어로 크게 외치던 그는 아쉬워하는 윙어를 보며
바득바득 소리친다.
“젠장! 빨리 뛰어 들어갔어야 할 것 아냐!!!!”
순간 당황한 윙어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하디 앞에 나타나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싱긋 웃으며 말한다.
“이봐, 하디 크루거”
“...뭐?”
“패스한번 좆같이 주는구나”
그는 내 영어를 100% 다 이해하진 못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fuck,
suck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자 이를 차갑게 쏘아붙인다.
“좆만하게 어린 새끼가 뭐라는 거야?”
바닥에 침을 뱉고 이죽거리는 하디.
당장 바닥에 머리부터 거꾸로 꽂아주고 싶었으나 경기 중이라 참는다.
“내가 너 같은 놈들 잘 알지”
대신 입은 살아있다.
“17, 18살 때 재능으로 까불다가 빅리그에서 쳐 망해 2부로 온 퇴물새끼”
“꼬맹아, 까불지마. 저기 네 리저브팀 친구들이랑 가서 공이나 뺏어와. 골 넣
어줄테니까”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뱉어낸 ‘퇴물’이란 단어가 그의 퓨즈를 건드린 모양이
다. 그는 어느새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날 죽일 듯 쏘아본다.
“으하하! 폼 다 떨어진 퇴물주제에 아직 입만 살았구나!”
“....이 개새끼가 진짜!!!
관중들이 있는 경기장에서 상대 선수도 아닌 같은 동료의 멱살을 잡은 채 위
협해대는 하디 크루거.
“난 1군으로 가면 그만이야! 너희 같이 2군에서 주전 스파링 파트너나 하는
리저브들이랑 다르다고!”
나를 포함한 선수들 몇몇이 소릴치며 하디에게 따지며 경기는 그야말로 아수
라장이 된다.
[아...에인트호번 쪽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오늘 데뷔한 진과 하디 크루거가 다투고 있습니다. 빨리 진정시켜야 할 것
같네요]
“거기- 뭐 하는 거야?!!”
“진! 하디!!! 정신 차려!!!”
마침 우리 쪽을 지나가던 부심과 주장의 제지가 없었더라면 정말 주먹다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며, 발베이크 선수들은 막장인 우릴 불구경
하듯 웃어댄다.
전상욱 축구 인생 최악의 데뷔전의 반이 이렇게 끝났다.
***
“동양인, 너 다시 말해봐!”
라커룸에 들어서자마자 고압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날 위협하는 하디. 이거 말
이라도 잘못했다간 이빨 한 두개 쯤은 날아갈 듯하다.
“퇴.물이라고. 존나 축구 못하는 새끼라고”
“너- 진짜 미쳤구나?”
“왜 틀려? 내가 너 같은 놈들 한두 해 본 줄 알아? 10대 때 반짝해서 빅클럽
까지 간 걸로 위세 떠는 새끼들. 수도 없이 봤어”
하디는 점점 더 내 곁으로 다가온다. 곧 주먹질이라도 할 듯 하다.
“2부리그에서 주전도 못 먹는 주제에 아직도 지가 맨유니! 아스날이니! 깝쳐
대는 꼴 보면- 결국 밀월 같은 약팀에서도 나가 떨어지더라고”
“아시안, 넌 좀 맞아야겠구나”
하디는 멱살까지 쥐고 주먹까지 위로 올려 때리려는 자세를 취하나 오히려 이
죽거리며 그를 노려본다.
“병신 퇴물새끼, 때릴 힘 남았으면 공이나 똑바로 차”
“Welpe!” (이 개새끼가!)
하디의 주먹이 그대로 내 턱에 들어가고, 그는 곧 두 번째 펀치까지 날리려고
하나, 이번엔 내 주먹이 빨랐다.
난 그대로 그의 코에 주먹을 날렸고, 서로의 분노가 격에 달했을 때-
“하디! 진!!”
라커룸 안으로 들어온 반니 감독이 나와 하디를 죽일 듯 노려보더니 이내 실
내가 울리도록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진! 하디! 네놈들은 2주간 주급 정지다! 그리고 둘 다 후반에는 벤치에 앉는다”
“아,아니 감독님!”
“입 닥쳐!!!!”
하디의 반응에 반니 감독이 처음으로 살기 가득한 모습으로 나와 선수단 전체
를 노려본다.
감독도 대충 알 것이다.
하디의 이기심을 참다 못한 내가 그에게 반항했고, 이에 분노한 하디가 날 공
격했다는 것을.
“진, 설명해라”
그렇기에 반니는 내게 상황설명을 맡겼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
라 벤치행이었던 지금 상황이 다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디가 개새끼임을 천명하고 싶었으나-
“감독님”
“...왜?”
앳된 목소리로 불쌍하게 말하니 그래도 애제자라고 차분하고 애정담긴 목소리
로 바라보는 반니스텔루이.
“먼저 경기를 망쳐 팀원들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공손히 라커룸 중심으로 가서 선수들에게 동양식 목례를 하며 조용히 꾸벅거
린다.
“저와 독일 친구의 불찰로 다른 선수들까지 피해를 입혀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어색한 네덜란드 어로 조곤조곤 말하니 곧 얼어붙어있던 라커룸 분위기가 조
금씩 녹기 시작한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괜찮아, 진”
팀원들은 이 사건의 원흉이 내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리고 경기를 망친 주범
이 내가 아닌 것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 총대를 매준 것에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며, 하디 크루
거 역시 아무 말 하지 못한다.
다니엘 잭슨으로 살면서 이런 경험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다.
팀원들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내게 미안해할 것이다.
꽤나 어른스러운 행동에 선수단 몇몇이 날 불쌍하고, 대견스럽게 바라본다.
물론 하디 크루거는 눈에 불을 켜고 날 노려보고 있지만.
“감독님”
“왜”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선수단을 등에 엎고 반니 감독에게 공손히,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방
금 행동으로 선수단의 신뢰를 쌓은 상황에서 단칼에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후반전에 아까와 같은 상황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하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감독의 말에 끝남과 동시에 하디에게 고개를 돌린다.
“독일놈아, 딱 45분만 내 말 대로 해라"
“....뭐?”
하디의 눈을 내려다보며 분명하게 말한다.
“후반전 45분 동안만 내가 하라는 대로 패스해. 그동안 이 경기 못 뒤집으면-”
이 부분에서 다소 애절하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적의나 악의 따윈
전부 빼고 말이다.
“퇴물이니, 쓰레기니, 쓸모없는 병신이니. 했던 말들 다 취소할게. 아니 네
눈 앞에서 사라져주마"
쓰레기나 병신은 한 적이 없지만...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중국인. 그 약속 꼭 지켜”
“한국인이야 시발럼아”
“뭐든”
어깨를 으쓱거리는 하디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도 못 잡고있는 반니
감독에게 다가가 120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감독님, 다시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기회 달라고 했던 게 대건고 시절에도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대건의 백승수 감독도 준 기회인데 반니스텔루이가 거절할 리가 없다.
이렇게 선수의 말을 번복한다는 것이 잘못됐음을 그도 알고 있겠으나 사랑하
는 제자의 진심 어린 부탁을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하디, 진”
“넵!!”
“예”
반니가 나와 하디가 듣기 편하도록 영어를 분명히 귀에다 때린다.
“마지막 기회다”
내 예상 그대로 나온 감독의 말에 최대한 동양식으로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라
커룸 밖으로 나설 때,
“진, 잘할 수 있겠니?”
반니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 듯 묻는다. 큰 소리로 혼내긴 했으나 내가 걱정
되긴 했나보다.
감독의 좋은 결단과 애정 담긴 걱정을 뒤로한채 씩 웃어보이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다.
“걱정마세요, 완전히 찢어버릴 테니까”
***
독일 축구의 현재이자 미래로 평가받던 하디 크루거.
아직 24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지금 자신이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다.
17살에 프로 데뷔 후 센세이션한 활약. 18실엔 리그 베스트를 먹고 19, 20살
엔 자신이 속한 중위권 팀을 말 그대로 하드캐리하여 유럽대항전에 올리고,
컵 대회까지 딴다.
2014년엔 21살의 나이로 월드컵 위너와 MVP까지 딴 그는 바이언 역대 최고 이
적료를 기록한 뒤 자국 무대 최고의 팀으로 이적한다.
여기까지 하디는 자신이 독일 최고, 아니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의 선수시절 모든 커리어는 21살을 기점으로 완전히 끊겼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혼자였다.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월등했던 그는 늘 월반해서 뛰었고 감독, 코치들은 그
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선수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기 충분했고, 축
구만 10년 이상 해온 하디 크루거와 친한 동료는 아무도 없었다.
‘축구는 혼자 하는거야’
‘나 혼자서도 승리할 수 있어’
선수 생활내내 강박관념에 맞춰 살아오던 하디.
자신을 중심으로만 뛰던 전 소속팀과는 달리 바이언은 하디와 같은 선수가 11
명씩 뛰는 팀이었고, 생전 처음으로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닌 다른 자리에서
뛰게 된 그가 팀에 적응하기엔 불가능과 같았다.
그는 팀에서 요구하는 플레이를 맞추지 못하고, 점차 밀려갔으며 전 소속팀에
서는 열정으로 포장했던 하디의 불같은 성격은 바이언에서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선수들과 다투고, 팬들의 야유를 듣다못해 관중석으로 달려들고, 선발로 못
뛰니 아예 훈련을 거부하기도 했다.
바이언에 있던 2년 6개월간 뛴 공식경기는 고작 20경기 가량.
그마저도 제대로 된 골이나 도움을 기록한 적도 없었다.
[바이언 역대 최악의 영입!]
[‘골든보이 출신’ 하디 크루거 독일 떠나 psv 이적]
축구판에서 완전히 잊혀진 선수가 되어 네덜란드 리그로 도망치듯 이적한 하
디 크루거.
이미 망가진 폼에 자존심만 남은 별볼일 없는 삼류 선수인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그리고 다른 별볼일 없는 삼류 선수들처럼 여기서 커리어가 끝날 것이라는 것
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인생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하기 시작한다.
작가의말
하디와 감독의 모습이 불편하다는 분들이 계셔서 수정했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이나믹 듀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