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역대 최고의, 가장 위대한
마테이스 더 리흐트는 전반전이 끝났음에도 하염없이 자신의 진영 골대를 바
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저 정도로 빠른 선수를 지금껏 본 적 있었나?”
저번시즌 유로파 리그 결승에서 맞붙은 맨유의 래시포드나 미키타리안, 리옹
의 라카제트, 아약스의 베르트랑 트라오레까지.
스피드라면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과의 대결해 막아도 보고 뚫려서 골을 먹히
기도 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수비해야겠다고 정신 차리는 순간 이미 공은 지나간 후였으며, 뒤늦게 분명히
따라갔었으나 그는 스피드에서도, 피지컬에서도 더리흐트를 압도했다.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렇겠지”
부상 복귀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복귀해서 그런 것이다. 아마 제대로 된
컨디션이면 쉽게 막아냈을 것이며, 후반전엔 집중하면 충분히 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 경기내용이나 스코어에서 앞서고 있잖는가. 유리한건 자신들이다.
“전반 좋았어! 마지막에 먹힌 건 잊어버리고. 후반에는 더욱 강하게 프레스 해!”
“이예!”
“가자아!!!”
선수들을 독려하며 후반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더 리흐트가 휴식 후 경기장을
나서며 이죽거린다.
“후반엔 에인트호번 촌놈 새끼들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자고”
후반 54분,
아쉽지만 전반 막판에 보인 상욱의 돌파는 그저 우연이나 상욱의 초심자의 행
운 같은 것이 아니었다.
“헉...허억....뭐가 저렇게 빨라....”
상욱은 공을 잡자마자 마치 번개처럼 날아다녔고, 선수들 사이를 끊임없이 뛰
어다니며 공격의 활로를 마련하고 있었다.
[지금 보세요. 진이 아약스 수비진을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psv 공격에 숨통
이 트이고 있는 겁니다!]
[순간 돌파하는 진! 더 리흐트도 떨쳐냅니다! 슈웃!!]
갑작스레 나타난 상욱이 아크서클 정면으로 여러 번 벼락같은 슈팅을 내던지
나 골키퍼에게 겨우 막히고, 분위기는 서서히 psv 쪽으로 넘어간다.
“shit!!”
사실 더 리흐트가 상욱과의 대결에서 졌다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후반전에 몇 번 돌파를 허용했다고 한들 그만큼 막아낸 횟수도 몇 있고, 전반
전엔 아예 막판까지 그를 완벽하게 틀어막았잖는가.
그가 분노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정말 나랑 비슷한 수준이라고? 저 동양인이?”
다른 활약은 고사하고, 아직 1군 데뷔조차 하지 못한 17살 아시안이 무려 저
번 시즌 유로파 베스트 수비수에 뽑힌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비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는 더 리흐트.
[코디 가포가 간만에 좋은 드리블을 이어갑니다!]
상욱에게 수비가 쏠려 느슨해진 틈을 타 오른쪽 하프라인 끝에서 공을 잡은
코디 가포가 빠르게 위로 올라간다.
빠르게 상대방 진영 쪽으로 뛰어가던 그가 오로지 상욱만을 쳐다본 뒤 냅다
크로스 올리자 동시에 아약스 선수들 대부분이 화들짝 놀라 상욱에게 달려든다.
“아시안한테 기회를 주면 안 돼!”
더 리흐트의 외침과 동시에 수비 3명이 상욱에게 달려든다. 어찌나 압박이 강
력한지 뛰어올라 공을 받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으나-
“까불지....마!!!!”
환생 후 하루도 쉬지 않은 벌크업 훈련을 괜히 한 것이 아니다. 상욱이 이를
악문 채 있는 힘껏 점프한다.
다른 선수들보다 두 뼘 이상 차이나는 헤더에 놀란 아약스 선수들 사이로 그
대로 골대 구석으로 머리로 공을 찍어누르는 상욱.
[이제 동점입니다!! 진짜 더 탑퍼보다 치열하고, 재밌는 경기가 펼쳐지고 있
습니다!]
[방금 진이 넘긴 선수들은 보통 선수가 아니에요! 당장에레디비시 1군에서 뛰
어도 못하지 않을 하나하나가 대단한 실력자들입니다. 더 리흐트는 말할 것도
없구요!]
“proost!!!” (환호해!)
상욱은 원정 팬들에게 뛰어가더니 전반전 거꾸로 걸어놓은 걸개를 다시 걸고
함성을 응원하라는 제스처를 보낸다.
2골이나 들어간 이 시점에서 psv 팬들은 서둘러 걸개 위치를 바꾼 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고 강한 응원으로 보답한다.
[아주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하네요!]
[으하하! 무슨 프로 생활을 20년은 한 선수 같네요! 팬들 조련하는 게 아주
보통이 아닙니다!]
환호하다 못해 미쳐있는 관중석과 떠들썩한 벤치를 보며상욱이 조용히 읊조린다.
“지금. 한 골 더 넣어야 해”
그러더니 벤치 앞에 서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반니스텔루이 감독을 보며 무어
라 중얼거리는 상욱,
“꼭 당신 뛰어 넘어줄게, 선생”
***
반니와의 개인 교습은 그 어떤 훈련보다 효율이 높았다.
애초 현역 시절 나와 비슷한 스타일의 스타 선수가 몇 시간이고 코칭을 해주
는데 효율이 낮은게 이상한 일이긴 하다.
아약스전 D-2,
그날도 정규 훈련 이후 단둘이 훈련장에 남아있을 때 일이었다.
“뭐- 진 네 기본기야 워낙 완벽하니 더 입 뗄 게 없고”
그는 잠시 생각에 빠져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개인기 말 야. 너무 빨라”
“에? 빠르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건 에레디비시 선수들한테나 그렇고”
유럽 상위권 리그나 세계적인 선수들에게 그저 빠르기만한 개인기는 먹히지
않는다.
“빠르지 않더라도 좀 더 세밀하고, 좀 더 효율적인 개인기가 필요해, 자 예를
들면-”
딱 한번의 시도로 수비진을 무너뜨리고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개인기.
그는 공을 막으러 다가오는 날 보며 오른발 앞으로 공을 뒤로 보내서 날 완전
히 제친 뒤 왼발로 받아 다시 몰고 나간다.
“오..오오!”
감탄한 내 반응이 꽤 자랑스러운지 어깨를 으쓱거리던 그는 이번엔 단계별로
천천히 기술을 알려준다.
“이건 베르캄프가 현역 시절에 잘 쓰던건데..효율적이라서 나도 맨유 때 자주
썼지”
일명 베르캄프 턴이라 불리는 기술. 고난도의 개인기긴 하지만 제대로 쓸 줄
만 안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다.
“뭐..그렇다고 베르캄프가 나보다 위대한 선수냐? 그건 아닌거 알지?! 으하하!!”
데니스 베르캄프
초기 벵거볼의 핵심이자 90년대 델피에로, 라울과 함께 세컨드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로 이름 떨친 그 선수?
아무리 봐도 반니보다는 한 단계 위에 있는..‘반니스텔루이’가 아니라 ‘반바
스텐’에 비벼야 할 선수인 것 같으나 굳이 말하진 않았다.
“어우- 어려운데요?”
“하하! 당연하지! 나도 완벽하게 익히고 따라 하는데 3달은 족히 걸린 거 같아!
꾸준히 연습해라
언젠가 중요한 경기에서 한 번쯤 쓸 일이 있을거다.
***
70분을 넘어가며 선수들이 지치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헉헉-거리
나 이번 경기의 중요성을 알기에 양팀 선수들은 있는 힘껏 경기장을 뛰어다닌다.
“지이이인!!!!”
psv 중앙 미드필더 지미가 상욱에게 패스를 연결하고, 그는 곧 수비라인 안으
로 빠르게 달려온다.
남은 건 골키퍼와 놀라서 달려오는 더리흐트.
공이 골문을 가를 때까지 상욱의 볼 터치는 고작 2회. 그것도 잠깐 공만 발에
갖다댄 수준이다.
달려드는 골키퍼를 보고 뒤돈 채 오른쪽 발로 공을 위로 보낸 상욱. 골키퍼를
제친 공이 바닥에 떨어지자 이를 놓칠리 없는 데리흐트가 빠르게 달려와 태클
로 공을 걷어내려하자-
그는 태클로 바닥에 넘어지면서 왼쪽 끝 발로 공을 톡 건드리더니 이내 공은
천천히 골라인 안으로 들어간다.
[een ongelooflijk doelpunt!] (믿을 수 없는 골!)
[경기장 안에 베르캄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전성기 때의 베르캄프가
요! 대체 저 아시안은 누구란 말입니까!!!]
해설들의 흥분 뒤로 오히려 차분하게 경기를 지켜보는 반 니스텔루이 감독과
헨드릭 코치.
“우리가 멍청했군”
“...그렇네요”
“녀석은 2군이 아니라 유스나 리저브 팀에 있어야 할 놈이 아냐. 내일 당장 1
군으로 올려도 될 정도지”
그러더니 뭔가 찌릿 거리는 듯 상욱을 보며 읊조리는 반니.
“고작 이틀 만에 베르캄프 턴을..저 정도까지 구사한다고?”
상욱의 활약에 말도 안 되는 활약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니스텔
루이.
“이거 뭐 전술을 짤 필요가 없군”
존재 자체가 전술인 선수,
11명과 혼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선수,
그게 지금의 전상욱이다.
***
3:2
이기고 있는 상황.
“진이라고 했나?”
경기 시작 75분 만에 더 리흐트가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부른다. 그만큼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리라.
“장난은 끝났다, 아시안 보이”
“뭐래, 오렌지 보이”
“더 이상의 실점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건 네가 다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남은 시간은 15분.
더리흐트의 말은 아예 허풍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최선의 컨디션에서 지속적으로 골문을 두드리나 더리흐트는 당최
유스팀이라곤 믿기지 않을 스피드와 커팅 능력으로 번번히 공격을 막아낸다.
[또 막아냅니다! 이건 유스 경기가 아니에요!]
[실제 1군 경기와 비슷한 수준의 경기력입니다!]
이 치열한 명승부에 흥분한 관중 몇몇이 경기 분위기를 망친다.
“Slit Asian!!”
“똥 피부 아시안아!! 한국으로 꺼져서 개고기나 드시지!”
아약스 관중이 날 좋아할 리가 없다.
라이벌 팀에 새로 나온 공격수가 자신의 팀 레전드의 트레이드 마크 개인기를
사용한 것도 모자라 그 기술로 팀 핵심 유망주를 제치고 공을 넣었다-
열 받을만하지. 게다가 본인들이 이겼다고 생각한 경기를 3골이나 넣어 역전
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는 홈 팬들의 분노와 더불어 앞으로 수년간 마주할 상대팀 에이스의 기죽이
기를 위함이기도 했다.
“씨발! 이건 아니잖아! 경찰은 뭐 하는거야?!!”
반니를 포함한 코치진 전원이 나서서 항의하고 흥분한 psv 팬들은 펜스를 부
수고 상대 팀 진영으로 뛰어나갈 기세를 보인다.
심각해지는 분위기에서 경기가 잠시 중단되자 코디 가포가 내게 조용히 다가
온다.
“진, 괜찮아?”
“어? 뭐가?”
“...너무 맘 쓰지마. 저 사람들도 그냥 화나서...”
쟤는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상처 받을 거라 생각하는가 보다.
“뭐- 별 생각 없는데?”
“그렇지 않다는 거 알아.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계속 말을 꺼내기 그렇다만, 밀월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밀월에서 중요한 골 찬스를 놓쳤을 땐 기본적으로 패드립을 듣는다,
나 때문에 경기를 망쳤을 땐 아내를 뺏겠다니, 오피스 와이프로 삼겠다니 하
는 것이 보통이고,
혹시나 라이벌 팀으로 이적했을 땐 집에 창문이 부서지고, 경기장에서 몇 대
얻어맞는 것쯤은 일상적인 일이다.
뭐...
그 정도에 비하면야.
당연히 기분이 좋진 않으나 버틸만하다. 잠깐의 중단 뒤 다시 경기 시작하자
아약스의 주장이 내게 다가온다.
“미안하다. 오늘 경기 팀을 대표해서 사과할게”
동양식 목례를 하며 사과하는 마테이스 더 리흐트.
뭐 딱히 본인 잘못은 없는데..이런 모습을 보면 괜히 어린 나이부터 프로에
갈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까불지마 좆밥년아. 경기나 똑바로 해”
괜히 이죽거리며 욕설을 내뱉자 더리흐트는 바로 세 번째 손가락을 꺼내며 응
수한다. 그러나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띈 채 경기에 집중한다.
후반 80분
혼전 상황에서 더 리흐트의 헤더골로 3:3 동점이 된 상태.
마지막 총공세를 펼쳐야하는 입장에서 조던 테저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
져있다. 아마 방금전 헤딩경합으로 인한 부상인 듯하다.
“나 교체 안해”
그는 유니폼으로 피를 쓱 닦더니 이내 포효하며 일어선다. 주장의 부상으로
밀릴 수 있었던 상황에서 저런 퍼포먼스는 팀의 사기를 올리기 완벽한 선택.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한다.
“진, 난 평생 더 리흐트란 존재에 가려져 살아왔어. 대표팀도, 1군 데뷔도,
리그 대항전도. 저놈은 나와는 다른,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단
말야”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장난스레 중얼거리자 금세 웃으며 내 양 어깨를 꼭 잡고 분명히 말하는 테저.
“이봐. 나 이번 경기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이겨줄 수 있지?”
진심 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어 보인다.
“물론. 보여줄게, 내가 어떤 놈인지 말야”
작가의말
저니맨이 축구를 잘함 ☞ 낭만을 꿈꾸지 않는 축구천재
제목 변경했습니다 ^^;
프로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