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유럽으로 (1)
대건고의 오른쪽 윙이자, 전상욱과 함께 유일한 비 3학년 주전인 박찬민은 부
끄러워 도저히 상욱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아무 데도 쓸모없는 새끼”
“실력이 없으면 근성이라도 보여 멍청아!”
힘도 없고 별다른 기술도 없이 피지컬로만 밀어붙이는 상욱을 보고 지금껏 찬
민이 그에게 내뱉은 말이다.
그렇게 매일 같이 비난하고, 무시하던 차에 상욱의 실력이 급변이 일취월장한
모습을 봤으나 찬민은 그를 여전히 탐탁찮게 여겼다.
‘제까짓게 좀 해봤자지’ ‘1학년 주제에 건방지게 말야’
여러 경기에 나와 헤트트릭을 하거나 경기를 끝내는 환상적인 공을 넣어도 여
전히 좋아하지 않았다. 원래 있었던 재능이 생각보다 빨리 터진 거라고, 자신
도 곧 저 정도는, 아니 그 이상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전상욱 저 놈이야 말로...”
현대고와의 경기 내내 찬민은 제대로 된 슈팅 한번, 정확한 크로스 한번 날리
지 못했다.
자신의 장기인 빠른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나 그는 실력있는 울산의 수비를 한
번도 뚫지 못했고, 전국구라 불리는 김재민에게 조금의 위협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전상욱이 또 돌파합니다. 2명 제치고, 김재민까지- 아 슈팅으로 연결되지는
못합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받아줄 수 있는 선수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더 좋은기회가
생길 수 있었을텐데요]
오늘 본 전상욱은 자신 따위가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의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울산 수비진 전체를 농락했고, 거산(巨山) 김재민과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나 따위...나 따위는....”
경기를 망치고 있는 사람은 본인이다. 오늘 상욱이 만든 찬스를 한 번이라도
넣었다면 경기에서 승리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상욱, 넘어집니다만! 아! 저 공에 대한 열정 좀 보세요!]
[놀라우리만큼 대단한 집착! 대성할 선수입니다!]
가장 잘하는 선수가 가장 열심히 뛰고 있었다. 이미 지치다 못해 쓰러지기 직
전 상태로 다리를 끌고 다니는 그는 어느새 찬민 앞으로 다가온다.
“선배”
“어...엉?”
경기는 5분 밖에 남지 않은 상황,
배정환의 동점골로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만든 대건이나 이미 5경기 내내 풀
타임 뛴 주전들의 체력저하로 곧바로 골을 먹혔다.
현재 스코어는 2:3
“내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수비수 시선 뺏으면 공간이 생길거에요. 그럼 선배
가 마무리하는겁니다”
상욱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도 무어라 중얼거리는 찬민.
“너는 화도 안나냐?”
“네?”
“거...내가 너 많이 괴롭혔잖아. 그런데도 넌 내가 주목받았으면 좋겠어?”
찬민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씨익 웃으며 답하는 상욱.
“당연하죠, 우린 한 팀이잖아. 안 그래요?”
너무나 가볍고 적의 없는 상욱의 대답에 웃음이 절로 나는 찬민.
“할 수 있겠어요? 기회는 딱 한 번 밖에 없어요”
“1학년 주제에 임마! 동점 만들테니까- 역전골 만들 생각이나 하고 있어!”
상욱을 보며 버럭거리는 찬민이나 이번엔 그의 목소리에서 호의가 가득하다.
한계에 봉착한 상욱이 마지막으로 공을 잡고 수비수 사이로 뛰어 들어가자,
김재민을 포함한 모든 현대고 선수들이 상욱에게 뛰어온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무어라 중얼거리던 찬민에게 상욱이 빠르게 패스를 끌어낸다.
[패널티라인 정면입니다! 슛!!! 아! 골키퍼 펀칭!]
몸을 날린 골키퍼에 의해 공은 왼쪽으로 날아오자 이를 본 상욱이 공이 바닥
에 닫기 직전, 그대로 공을 들어 골키퍼 정면으로 보낸다.
“뛰어 들어가!”
상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찬민이 골라인 근처로 미친 듯 뛰어간다. 스루패
스가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들어갑니다아아!!!!!]
[혼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대건고 선수들이 함께 만든 골입니다!!]
이번 대회 첫 번째 득점과 극적인 동점골에 감격한 찬민이 바닥에 머리를 처
박고 흐느끼자,
“잘했어요 선배”
상욱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치며 웃는다.
“너 임마...아까 반말했지?”
“아 뭐래”
“뛰어 들어가! 반말했잖아. 건방진 새끼, 이리콤”
90+5분에 3:3 동점
앞으로 1분 후면 후반전마저 끝나는 상황에서 연장으로 흘러가면 진다는 것을
안 대건고 전원이 공격에 나선다.
이미 전상욱은 더 이상 뛰지 못해 경기장 중앙에 앉아있으며, 교체 카드 역시
모두 사용한 후다.
얇은 스쿼드 때문에 연장까지 가면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이 뻔하니 전원 상대
패널티라인 앞까지 뛰어 들어갈 때, 박찬민이 30M 앞, 먼 거리에서 프리킥 찬
스를 얻는다.
[오늘 경기 양 팀의 마지막 공격 찬스와 위기가 한번에 펼쳐집니다. 키커는-]
[네...에이스가 나와야죠]
마치 좀비처럼 비틀거리면서 다가온 상욱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골대를 바라본다.
“먼 거린데 어떻게, 뛰어 들어갈까?”
“아니면 앞으로 갈테니까 땅볼로 패스할래?”
배정환과 박찬민 등 선수 몇몇이 다가오자 상욱이 가볍게 중얼거린다.
“괜찮아요, 직접 찰게요”
그 골은 지금껏 찬민이 본 그 어떤 프리킥보다 아름답고 유려했다.
우아하게 꺾이는 곡선은 주니뉴의 것을 닮았고,
넘치는 파워는 카를로스를,
자로 잰 듯한 정확한 각도는 베컴과 같았다.
[대체 저 선수는 누굴까요! 한국축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선수
일까요! 뭐 상관없습니다! 대건고가! 결승에 진출합니다!]
***
4:3
대건고는 결승에 진출했으며, 2골 1도움을 기록한 나는 이번 대회 가장 핫한
스타로 떠올랐다.
경기 관람하러 온 한 유튜버가 내 활약상을 찍어올린 것이 꽤 유명세를 타 펨
코, 디씨, 클리앙 등 각종 대형 커뮤니티 등에 게시글이 올라갔고, 난 하루아
침에 유명인사가 됐다.
이미 인터넷 커뮤니티엔 사람들이 모여 내 플레이가 누구와 닮았는지,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방구석 전문가들의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ㄴ와 프리킥 공 휘는거 봐라; 발렌시아 이강인보다 더 정교하지 않음?
ㄴㅋㅋㅋㅋ살다살다 라리가 1군 데뷔 직전인 선수랑 한국 고등학교 선수를 비
교하네ㅋㅋ 병신이냐 진짜? 프리킥 잘 차는거 빼면 그냥 좀 치는 유망주구만
ㄴ윗에 댓글 올린 새끼. 전상욱 플레이 영상보긴 했냐? 쟤는 프리킥보다 치달
이랑 슈팅이 진짜야 병신아
ㄴ응~ 어쩌라고~ 그래봤자 프로와서 증명해야 해~
세간에서는 황선홍-이동국-박주영을 잇는 대표 스트라이커의 탄생이라며 호들
갑을 떨었으며, 다른 이들은 그저 프로 진출하면 망가질 유소년리그용 선수라
폄하하기도 했다.
뭐-
어찌됐든 전국구 유망주가 된 지금, 경기장을 빠져나갈 때 여러 스카우터와
에이전트들이 달려든다.
“대구fc 배진영이라고 합니다! 연락 한번 주세요!”
“JB스포츠입니다. 전상욱 선수! J리그 가볼 생각 있어요?!”
“FC서울 황진호 코치입니다. 국내에서 뛸 거면 수도권 팀에서 뛰어야죠!”
내 반응은 똑같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어떤 제안도 듣지 않을 것이며, 천천
히 생각해보겠다고. 그리고-
“상욱이는! 3년간 우리 학교에서 뛰고! 그 다음엔 인천으로 갈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어!”
컨택 오는 사람들마다 큰 소리로 쫒아내는 감독과 벌써 부딪치고 싶지도 않았
고, 무엇보다 끌리는 조건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스포츠코리아 배한영 실장입니다”
선수 대기실 앞에서 날 기다리며 명함을 건네는 30대 초반의 잘생긴 남성.
“저희 회사는 기성용, 지동원, 박주호 선수 등 국내외 여러 선수들을 모시고
있으며...그냥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이미 여러 에이전트들이 접촉해 피곤해 보이는 내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그는 명함 한 장만 딱 꺼내서 공손히 전달한다.
“유럽 진출해볼 생각 있으세요? 잉글랜드부터 스페인, 독일 터키까지. 네덜란
드는 바로 입단 테스트를 볼 수도 있어요”
유럽이란 말에 라커룸 앞에서 그의 명함을 받아든다.
“큰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죠. 진짜 여기서 3년간 뛸 생각은...아니잖아요?”
자신감넘치는 미소를 보이는 한영을 바라보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대회 끝나고 연락드리죠”
***
대건의 결승 상대는 전주 영생고.
K리그 최강팀 전북 현대 모터스의 유소년 팀으로, 09년에 창단한 신생팀이나
모기업의 강력한 지원 아래 13년 전국대회 준우승, 작년 대통령금배 우승의
디펜딩 챔피언이다.
에이스 전상욱이 체력 저하와 컨디션 난조로 벤치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절대
적으로 불리한 대건고였으나 선수들은 오히려 자신감에 차 있었다.
팀 전체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지배하는 성향의 백승수 감독 부임 아래 학년
간의 파벌이 심하고, 주전/비주전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대건고.
대회 우승은커녕 1승이 목표인 꼴찌팀이었으나 전상욱이란 남자가 팀을 완전
히 탈바꿈시킨다.
대단한 리더십이 있는 것도, 말을 잘해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실력,
일반 고교선수를 씹어먹는 말도 안 되는 축구 실력이 주전에게는 경각심을,
후보 선수들에게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상욱이 득점을 하고 성적을 내니 절로 분위기가 좋아지고, 경기에서 감독이
배제되니 자연스레 선수단은 화기애애해져갔다.
“이제 딱 한 경기 남았다”
결승전을 앞둔 대건고 라커룸,
경기에 앞서 주장 배정환이 선수들을 독려한다.
“전상욱이 못 나오니까 상대는 우릴 무시하고, 깔 볼거다. 원맨팀에 원맨이
안 나오면 쓰레기라고 말야”
주장의 말에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대건고 선수들. 역시 주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린 쓰레기가 아니다. 지난 5경기, 전상욱이 바꿔준 경기! 오늘은!!! 우리
가! 바꾼다!!!!”
할수있나! 물어보는 주장의 결집에 선수단 전원이 뭐에 쓰이기라도 한 듯 라
커룸이 떠나가라 외친다.
“우아아!!”
“간다아!!!!!”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팬들은 영생고의 무난한 승리를 점쳤다. 지난 대회 우승
멤버들을 반 이상 지켜냈으며, 이중 2명은 청소년 국가대표 주전으로 뛰고 있
는 호남권 최강 영생에게 대건은 감히 비빌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 최대 인기팀은 당연히 대건고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매 경기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상욱이 빠졌음에도 영생고에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경기 주도권은 영생고가 가져가나 대건고의 선수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목숨을 다해 공을 막아낸다.
유효슈팅이 3배 이상 차이나고, 점유율 역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을 후반 83분.
[드디어 대건의 게임체인저가 나섭니다]
[네, 이 중요한 경기에 에이스가 안 나올 수가 없죠]
상욱이 들어와 공을 잡자마자 영생고 선수들이 순간 움츠러든다. 이들도 상욱
의 경기를 본 것이다.
“야! 대건 13번 부상이야!”
“못 뛰고 공 뒤로 넘길거니까 그냥 압박만 해!”
저번 경기에서 얻은 상욱의 부상은 최소 2주는 갈만한 통증이었으며, 영생고
측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못 뛸 것이다,
길게 패스하거나 공을 뒤로 돌릴 것이다-
그러니까 직접 득점할 힘은 없으니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영생고 벤치와 선수들의 바람과는 달리 상욱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 정도도 못 뛸 바보는 아니지”
주장 배정환이 씨익 웃자 상욱은 마치 육상 선수와 맞먹는 스피드로 수비진을
뚫어낸다.
“막아!!!”
“그냥 밀어서 넘어뜨려!”
영생고 벤치에선 상욱을 막으라고 아우성이나 수비들은 그를 전혀 잡지 못한다.
[전상욱! 이미 두명, 세명 제칩니다, 네명까지!!! 아아아아아!!!!!]
[골골골골!! 대통령금배 새로운 챔피언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감히 생각도
못했던 대건고입니다!!!!]
경기종료 후,
파티 중인 대건고 축구부 사이로 상욱이 백승수 감독에게로 간다.
“감독님”
“그래! 우리 에이스 왔구나! 왜?!”
얼굴 가득 미소짓는 감독을 보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는 상욱.
“저 이제 유럽으로 갑니다. 오늘 경기가 대건고에서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유럽으로 (2)